71. 내가 너 말고 누구랑 결혼을 해.2021.12.05.
세희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퉁퉁 부은 눈으로 알리샤가 앉아 있었다. 독일에서 헤어진 후 처음 만나는 거지만 서로에게 안부 인사조차 묻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 후, 알리샤가 툭 첫마디를 내던졌다.
“나 오늘 서강준이랑 이혼했어.”
오늘 서강준과 알리샤가 만나길 고집한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이혼. 알리샤는 받을 돈 때문에 그렇다 치고 서강준은 그럼 왜?
“독일에서 서강준 비서는 나 못 알아봤는데 서강준은 바로 알아보던데? 그것도 나를 보자마자 바로.”
그건 세희도 사실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강준의 다음 행동이 예측되지 않았을 뿐.
“바로 짐 싸라고 하는데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 전용기에 태워서 한국 끌고 와서 호텔에 처박고 이혼에 협조하라고 하는데 나라고 별 수 있니?”
“강준 씨가 언니한테 뭐 물어봤어?”
“차라리 뭘 물어보면 다행이었지. 아무것도 안 물어보니까 더 무서웠거든? 뭐든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데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
알리샤의 말에 세희는 생각이 깊어졌다. 독일에서 귀국 후 강준은 완벽하게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언론에서 한신 후계자의 행보에 대한 기사를 연일 쏟아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바로 이혼을 준비하고 자신을 찾아내고 강 관장까지 포섭했다. 어쩌면, 자신이 떠나기 전에 짜놓은 플랜일지도. 그 남잔 대체 어디까지 예상했던 걸까. 비상한 머리도 머리지만, 추진력은 불도저 급이었다.
“근데 눈이 왜 부었어, 울었어?”
“독한 네 남자 때문에 울었다, 어쩔래?”
“……내 남자 아니야.”
“그럼 내 남자니? 난 이름만 빌려줬잖아. 결혼식도 네가 올렸고 같이 산 것도 너고 잠도 너랑 잤으니 네 남자지!”
대답 대신 세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리샤의 말이 맞다. 서강준은 엄연히 내 남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이복언니의 남자를 빼앗은 나쁜 년이라고 자신을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해보다는 헐뜯길 좋아하는, 그게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나 네가 시킨 대로 다 했어. 이제 돈 줄 거지?”
“응.”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알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주겠다고? 이대로 돈 안 주면 나한테도 복수하는 건데?”
“그럴 맘은 없는데 언니가 원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아니이!”
깜짝 놀라 소리 지르듯 대답하는 알리샤는 아이 같았다. 그런 면이 세희는 가끔씩 부러웠다. 자신에겐 절대 없는 알리샤의 단순함과 천진난만함이. 세희는 브리프 케이스 안에서 준비해왔던 서류 봉투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5억은 통장에 넣어놨고 남은 15억은 펀드에 들어놨어. 그 안에 자산 관리사 명함 있으니까 전화해서 도움받아. 언니 돈 관리 안 해봤을 거 아냐. 그대로 주면 다 쓸 게…… 왜 그런 눈으로 봐?”
알리샤가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원래 닮은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 거야. 아니면 사랑하다 보니 닮아간 거야?”
“무슨 소리야?”
“가만히 보면 너랑 서강준 씨 많이 닮았어. 성격도, 분위기도. 둘 다 독종에 완벽주의라고 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세희가 눈을 깜빡거리자 알리샤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왜 말 안 해줬어?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거.”
“다 지난 일이야.”
“와, 부정은 안 하네?”
“…….”
“그럼 주세희 네가 더 독종이네. 그 남잔 아직 너 못 잊은 것 같던데 넌 보란 듯이 버리고 떠났잖아. 어떻게 그게 가능해?”
가능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절박했고 간절했고 선택사항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랑까지 버릴 만큼 엄마한테 복수 꼭 해야 하는 거야? 좀 편해지면 안 돼?”
“내가 관두면, 이모도 날 가만히 둘 거라 생각해?”
이번엔 알리샤가 대답하지 못했다. 복수 때문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세희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도 세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건 조 여사였다. 자신의 쌍둥이 동생에게 하지 못했던 걸, 바람 핀 남편에게 못 했던 걸, 애꿎은 세희에게 죄다 돌리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나락으로 떨어져야 끝나는 관계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알리샤는 핸드백 안에서 반지를 꺼내서 세희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네 건데 왜 날 줘. 안에 네 이름, 이니셜까지 새겨져 있던데.”
J, S, H. 반지 안에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는 걸 안 건 며칠 전이었다. 팔아먹으려면 작은 흠도 있으면 안 되기에 꼼꼼히 반지를 살펴보다가. 두 사람에게 받은 게 있으니 이 반지는 내놔야 할 것 같았다. 나도 그 정도까지 쓰레긴 아니니까. 알리샤는 두 개의 서류 봉투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다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세희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야, 독종. 고마웠어.”
서강준이 복수를 포기하고 호의를 베푼 것도. 엄마의 치마폭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것도. 다 주세희 때문이란 걸 아니까. 생각해 보면 짠하고 안쓰러운 이복동생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부러웠던 아이. 이런 앨 감당할 남자는 서강준밖에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집 두 채 받았으니까, 한번 큐피드 노릇 해 봐?
“서강준 씨. 나랑 이혼하고 어디 그룹 막내딸이랑 결혼할 생각인가 봐.”
“…….”
“우연히 기사 봤어. 나도 잘은 모르니 직접 물어보든지.”
저 독종이 서강준에게 먼저 마음을 표현할 린 없으니 이런 식으로 자극해줄 수밖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만 보여주면 서강준은 똑똑한 남자니까 알 것 같았다. 그게 질투라는 걸, 여전히 사랑이라는 걸. 주세희가 반응만 하면 나머진 그 남자가 알아서 하겠지. 혹시 모르니 날벼락 맞기 전에 메시지는 한 통 날려줘야 하나. 그래도 집을 두 채나 받았는데. 고민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알리샤는 슬쩍 돌아보았다. 열심히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는 세희를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이봐, 아직도 신경 쓰면서.
*** 알리샤와 헤어진 후, 강준을 기다리는 세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서강준이 이혼했고 오늘 만나자고 했다는 건 급하게 할 말이 있단 뜻인데 그게 뭘까. 당연히 결혼은 아닐 것이다. 그걸 증명한 건 바로 한신 후계자의 결혼설이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건지 구체화가 안 된 건지, 메인 기사로 다루진 않았다. 하지만 알리샤의 말대로 작은 언론사에서 쏟아낸 결혼에 관한 기사들이 꽤 많았다. 한신 자동차로 검색할 땐 나오지 않던 기사들이었다.
“하긴, 나와 결혼하면 감당할 게 많긴 하겠지.”
자신과 결혼을 하게 되면, 조용히 묻힐 추잡한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영원한 비밀은 없고, 조 여사가 두고 볼 리 없으니까. 또한 세희를 예뻐했던 서 회장과 연숙도 속사정을 알면 싫어할 게 뻔했다. 사기 결혼이라는 게 밝혀져도 기업 간의 좋지 않은 소문은 결국 쌍방 모두의 이미지를 실추한다. 그런데 그 사기 결혼에 막장까지 추가되면? 세희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뭐든 추한 막장일수록 사람들은 오래오래 그걸 재밋거리로 삼는 법이니까. 실제로 기업 오너들의 막장 러브스토리는 몇 번 있었고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사실 자신에 비하면 그 러브스토리도 막장은 아닌데. 그런데도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국민들은 불매 운동을 했으며 결국은 책임을 통감한 오너가 교체되었다. 그만큼 세상은 모질고 냉정했다. 연예인 못지않게 기업인들도 공인이었기에, 국민들이 보여준 심판의 잣대는 가혹했다.
“그러니까 내가 깨끗하게 끊어내야 해.”
서강준이 못 하겠다면 내가,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유태령으로 살아가면서 두 눈으로 몸소 보고 겪은 재벌가의 삶은 과유불급이었다. 너무 넘쳐나는 삶에 즐거움은 있었지만 행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삶 자체가 보여주기식이었고 모두 가식이었다. 대부분이 쇼윈도 부부에 오냐오냐 자란 탓에 아이들은 인성이 썩 좋지 않고. 부모고 형제고 핏줄이고 뭐고, 유산 다툼하느라 바빴고 자기밖에 몰랐다. 가장 걱정인 건 재벌가 아이들의 삶이었다. 태어날 적부터 조기 교육을 시작하고 부모들이 재단해놓은 삶을 살아야 한다. 공부 좀 못 하면 어때서, 스팩이 나쁘면 뭐 어때서. 문득 연숙에게 들었던 강준의 어릴 적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한신 그룹 서 회장의 귀하디귀한 손자. 태어나기도 전에 전문가가 짜놓은 진학 플랜에 따라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정해졌다. 다행스럽게도 강준은 타고나길 잘나게 타고나서 무리 없이 소화했다고 했지만. 또한 강준이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따라붙고 작은 것 하나마저도 기사화가 됐다. 지나치게 과도한 관심은 제 아무리 강준이라 해도 어린 나이에 부담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언론을 통제하고 매스컴에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고, 연숙이 말했었다. 결론은 한신가의 아이로 태어난다면 그런 막중한 책임감과 과도한 관심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아기는 평생토록 좋지 않은 꼬리표가 따라붙을 것이다. 세희는 작은 동네였지만, 아기는 대한민국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다. 내 사랑 하나 이루겠다고 아기에게 그 모든 짐을 떠넘기기 싫었다. 꿈틀거리는 모성 본능에 세희의 손이 저절로 배를 감쌌다. 내 아기만큼은.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줄 거야.”
그 또래 애들이 즐길 수 있는 건 죄다 경험하면서 평범하게 자라도록. 부모로 인한 더러운 꼬리표가 붙지 않도록. 그래서 더더욱 서강준은 안 돼. 아기에 대해서도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준 선물임은 분명하지만, 온전히 내 아이니까. 또한 서강준이 결혼을 생각할 린 없을 테니까. *** 카페에 들어서자, 창가에 놓인 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희가 보였다. 문득 귀국파티를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어떻게 앉으면 자신이 예뻐 보이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던 아내가. 지금도 그랬다. 단정한 옆얼굴과 꼿꼿이 앉아 있는 자태가 매혹적이다. 홀린 듯 바라보며 바로 옆까지 다가갔지만, 세희는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있었다.
“주세희 씨.”
“…….”
“주세희.”
“…….”
“세희야.”
어떻게 불러도 대답 대신 찬바람 쌩 날리는 반응에 강준은 빠르게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은데 그 포인트를 모르겠다는 것. 강준은 하는 수 없이 세희의 옆에 앉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조용히 앉는 수밖에. 그렇게 나란히 옆에 앉은 강준은 세희가 보는 곳에 시선을 주었다. 딱히 볼만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뭘 보는 건지. 빠르게 흥미를 잃은 강준은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작은 손을 보니 문득 생각났다. 품에 제대로 안아본 지도 오래됐지만 손깍지를 껴본 지도 오래되었다는 걸. 크기 차이가 심한 손인데도 손가락을 얽으면 퍼즐이 맞아떨어지듯 기분이 좋았는데. 테이블 위로 슬금슬금 손을 움직여 가느다란 손끝을 톡 건드려 보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번엔 슬그머니 손깍지를 끼려는 순간, 세희가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줄 생각이었는데. 쏘아보는 눈빛이 매서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땐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는 게 상책이란 걸 본능적으로 캐치했다.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세요?”
그런데 첫마디가 당혹스러울 만큼 공격적이다.
“이혼하셨고 다시 선도 보고 결혼도 하실 거고. 그럼 저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두 번째 말은 더더욱.
“아니면, 절 세컨드라도 삼으시게요?”
마지막 말은 나가도 너무 나갔잖아. 하도 기가 차서 강준은 말문이 막혔다. 손깍지 한번 끼려고 했다가 덜컥 받은 원망 가득한 눈동자, 느닷없는 공격성 발언.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작은 언론사들에서 한신 후계자 결혼 소식을 다루길래 세희에게 말해줬어요. 열심히 핸드폰 뒤져보던데 혹시 주세희가 질투하면 알아서 잘 해명해줘요.]
알리샤가 처음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강준은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는.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감정을 잔뜩 드러낸 주세희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오려 한다. 영영 안 볼 것처럼 굴더니, 신경이 쓰이긴 하나 보네.
“이혼했으니 당연히 결혼도 다시 해야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세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단정한 눈빛과 표정으로 강준을 마주 보았다.
“오늘 만남을 마지막으로 더는 대표님과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그 말 하려고 연락드린 거예요.”
주세희의 끊기 신공은 강준조차 감탄할 수준이었다. 그뿐인가. 자존심은 더럽게 세고 독하기는 혀를 내두를 만큼 독하고, 얄미울 만큼 새침스럽고. 이 여자 때문에 애간장이 녹아든다. 그런데도 환장하게 좋은데 어떡하라고.
“이혼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실 결혼도요.”
“…….”
“진심으로 대표님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매끄럽고 단정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세희가 돌아서자 강준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세희.”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강준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가는 허리를 휘감아 당겨오며 움찔하는 작은 어깨에 턱을 올리곤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내가 너 말고 누구랑 결혼을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혼했는데. 이 얄미운 요마녀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