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임신. (70/110)

70. 임신.2021.12.02.

16564552355781.jpg[아, 임신 테스트기? 오케이, 알…… 뭐어!]

마지막은 하이톤으로 올라가는 진경의 음성에 세희는 아차, 싶었다. 흥분한 김진경을 진정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서였다.

16564552355788.jpg“진경아, 미안. 오늘은 그냥 오지 말아줄래? 내가 내일 전화할게.”

16564552355781.jpg[아냐아냐! 나 지금 그거 사서 바로 갈게! 그러니까 너 꼼짝 말고 집에서……?]

16564552355788.jpg“김진경.”

세희는 놀라울 만큼 차분한 음성으로 진경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잘랐다. 핸드폰 너머가 고요해지자 그제야 차분히 말을 이었다.

16564552355788.jpg“나도 혼란스러워. 그래서 혼자 생각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아. 그래 줄 수 있지?”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결국 진경은 긴 한숨과 함께 알겠다고 대답하며 끊었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진경의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진경을 집에 들이고 상대할 만한 여력이 세희에겐 없었다.

16564552355788.jpg“그냥 내가 사 오는 게 낫겠다.”

바람도 쐬고 약국도 들를 겸, 세희는 가볍게 카디건을 걸친 후 집을 나섰다. 늘 차만 타고 다녔지, 집 근처를 이렇게 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걸으니 일렁였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테스트기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16564552355781.jpg“어? 505호 사시는 분 맞죠?”

빌라 입구에 도착한 순간, 뒤에서 누군가 세희에게 말을 걸어왔다. 천천히 돌아서니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세희를 보며 웃으면서 서 있었다.

16564552355788.jpg“누구세요?”

16564552355781.jpg“이런, 서운한데요? 우리 엘리베이터 같이 탄 적 꽤 많은데. 저 605호 사는 사람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웃사촌이고 그쪽 위층 사는 사람.”

세희는 대답 대신 남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빤히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16564552355781.jpg“저 이상한 사람 아니니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솔직히 이 집에 사는 정도 수준이면 기본 신원 보증은 해주는 셈 아닌가요?”

단지 안에 30 가구만 살 수 있도록 지어진 고급 빌라는 한 채당 집값이 20억 원 정도였다. 저가도 아니지만 고가도 아닌, 서울에서는 평균적인 집값. 그런데 집값이랑 신원 보증이랑 무슨 상관일까. 남자는 세희가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돈을 기준으로 삼는 허세만 가득한 인간.

16564552355781.jpg“그냥 같은 동 사는 이웃사촌끼리 인사하면서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세희는 차분하게 남자의 말을 잘랐다.

16564552355788.jpg“죄송해요. 제가 비사교적인 데다 폐쇄적인 성격이라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 걸 잘 못 해요. 예의상 적당히 지내는 건 더 못하구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대로 돌아선 세희는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같은 동인 관계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남자와 같이 탈 수밖에 없었다. 철저히 무시하는 세희에게 남자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16564552355781.jpg“근데 향수 뭐 써요? 늘 느끼는 건데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내가 향수를 뿌리든 뭘 뿌리든 무슨 상관인지, 이쯤 되니 희미한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하지만 세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앞만 보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하자 얼른 내렸다. 눈길조차 주지 않은 탓에 세희는 몰랐다. 천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남자가 끝까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집에 들어온 세희는 소파에 앉아 테스트기 설명서를 읽었다.

16564552355788.jpg“임신 호르몬이 제일 농축되어 있는 아침 첫 소변으로 검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함. 그럼 오늘은 안 되겠네.”

테스트기를 내려놓은 후 아직 납작하기만 한 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정말 이 작은 공간에 생명이 숨 쉬고 있을까. 아직 확인도 안 해보았는데 심장이 미묘하게 두근거린다. 임신이라니, 미처 짐작 못 했다. 아니, 그런 걸 떠올리지 못할 만큼 독일에서 돌아온 후의 삶은 버겁고 바빴다. 서강준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느라, 지금껏 준비해왔던 계획들을 실행하느라. 그럼에도 간절히 바란다. 서강준이 내게 준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 알리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정 법원으로 향했다. 이혼을 마무리한 후 혼자 걸어 나오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먹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인데. 거센 비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발을 내딛는 게 두려웠다. 이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정말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 같아서. 한신의 후계자와 이혼을 한 이상 이노그룹에선 자신을 버릴 것이다. 차라리 버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조 여사가 쫓아와서 앙갚음할까 봐 두려웠다. 딸이라고 절대 봐줄 여자가 아니란 건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아니까. 결론은 지금 자신에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그래서 더 경수가 보고 싶어지는 알리샤였다.

16564552384241.jpg“바보 같은 놈. 진짜 죽었기만 해 봐.”

작게 중얼거리는 알리샤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당장은 짚이는 게 있어 독일로 갈 생각이지만 경수가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지낼 자신이 없었다.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이혼까지 했고. 할 일은 끝났고 만약 주세희가 약속을 어긴다면, 자신은 빈털터리 거지가 된다.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니 알리샤는 덜컥 겁나고 두려워졌다. 자존심도 상했다. 주세희에게 제 인생을 통째로 맡긴 꼴이니. 설마, 영악한 그 독종이 나한테도 복수하려고 계획한 거라면? 그렇다면 제대로 성공한 거다. 이노그룹에서 자신의 유일한 효용성은 서강준과 이혼한 순간 끝났으니까. 그제야 눈앞이 깜깜해졌다. 난 왜 그 독종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계약서 하나 받아놓지 않고 덜컥 믿고 따랐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16564552384241.jpg“돈만 안 줘 봐, 주세희.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벼랑 끝에 몰린 이상 절대 나 혼자 안 죽어. 독하게 마음을 굳힌 알리샤가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1656455238425.jpg“알리샤 바튼.”

뒤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다. 돌아서자 긴 다리를 뻗으며 성큼성큼 다가온 서강준이 알리샤의 앞에 멈추어 섰다.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빛, 무심한 표정. 이 남자 앞에만 서면 절로 긴장감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다. 빈털터리로 이혼까지 한 지금, 비참하기까지 했다.

1656455238425.jpg“잠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알리샤는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호텔에 처박아 놓고 모든 건 비서를 통해 연락하고 전달했다. 그래놓고선 이제 와서 무슨 대화를 하자고?

16564552384241.jpg“싫다면 어쩔 건데?”

알리샤는 눈을 치뜨며 조그맣게 쏘아붙였다. 악마 같은 새끼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만 그런 것에 반응할 남자가 아니었다.

1656455238425.jpg“아직도 본인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착각하나 보군요.”

나직하게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차갑고 무심했다. 알아서 따라오라는 듯 알리샤를 스윽 지나친 강준이 계단을 내려갔다. 경수의 말대로 이 남잔 감정을 못 느끼는 인공지능이 분명했다. 지독한 놈. 왕재수 놈! 얄미울 만큼 잘난 뒤통수를 노려보면서도 알리샤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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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알리샤는 약속이 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이동했고 약속장소 근처에 있는 카페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1656455238425.jpg“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고 경수가 죽었어요. 이제 믿어줄 겁니까?”

강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알리샤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런 알리샤를 보고 있으니, 다시 한번 주세희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강준이었다. 주세희를 사랑하기 전에도 그 예쁜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건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는데. 마치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덜컥 눈물을 흘리려는 알리샤는 오히려 짜증 났으니까.

1656455238425.jpg“그 눈물은, 경수의 죽음을 조금은 애도하는 거라 생각해도 됩니까?”

16564552384241.jpg“지독한 새끼. 악마 같은 새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1656455238425.jpg“대답.”

16564552384241.jpg“나도 경수를 사랑했어!”

짓씹듯 내뱉는 알리샤의 눈에서 기어이 흘러내린 눈물이 뺨으로 번졌다. 그 눈물을 무심히 바라보는 강준을 노려보며 알리샤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16564552384241.jpg“당신이 믿든 말든 상관없어. 난 경수를 내 방식대로 사랑했을 뿐이니까.”

1656455238425.jpg“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모는 게 알리샤 바튼의 방식인가 보지?”

노골적인 비꼼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알리샤는 강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16564552384241.jpg“남자들이 하는 말 중에서 가장 믿으면 안 되는 게 바로 ‘사랑해’야. 근데 그 말을 어떻게 덜컥 믿어? 그래서 테스트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런 독한 말을 듣고도 여전히 날 사랑한다면, 경수가 한국까지 쫓아올 줄 알았으니까. 진짜 죽길 바란 건 아니었다구…… 흐윽.”

1656455238425.jpg“…….”

16564552384241.jpg“내가 지금껏 누려왔던 것들을 경수보다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었다고. 이제 됐어? 둘 다 잃고 후회하는 내 꼴 보니 속 시원하냐구!”

다시 털썩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알리샤에게 강준은 준비해온 서류 봉투를 건넸다.

1656455238425.jpg“경수에게 주려고 독일에 사둔 집이 두 채 있어요. 현금으로 주면 관리 못 하고 흥청망청 쓸 게 뻔하니 그 안에 있는 명함 번호로 전화해서 도움받든지.”

얼떨결에 받아든 봉투의 안을 확인한 알리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64552384241.jpg“이걸 왜 나한테…….”

1656455238425.jpg“경수가 그러길 원할 것 같으니까.”

이제야 강준은 알 것 같았다. 경수가 왜 자신에게 알리샤와 결혼해주라고 부탁했는지. 다른 남자들은 몰라도, 강준만은 알리샤에게 흔들리지 않을 걸 알아서였다. 알리샤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결혼 생활을 유지할 것도. 강준의 성격대로라면 알리샤에겐 이 결혼이 지옥일 테고 더더욱 경수를 그리워할 것이다.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이혼해서 돌아오길 바랐을 테고. 그럼 죽지 말고 돌아오길 기다렸어야지. 어쩌면 알리샤에게 진짜 복수를 한 건 자신이 아닌 경수일지도 몰랐다. 이 결혼으로 인해 뒤늦게 알리샤가 사랑을 깨달았을 때 자신은 없을 테니까. 그만큼 알리샤는 후회하고 아파할 테니까. 그럼에도 경수는 알리샤가 잠시만 아파하고 행복하길 바랄 놈이었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 끝까지 독하지 못한 놈 같으니라고.

1656455238425.jpg“그리고 주세희를 만나게 해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라고 하죠.”

16564552384241.jpg“……!”

1656455238425.jpg“내가 빚지는 건 딱 질색이라.”

천천히 일어나려는 강준에게 알리샤가 불쑥 물었다.

16564552384241.jpg“주세희는 당신에게 대체 뭔가요?”

주세희란 이름에 섬뜩할 만큼 차가웠던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1656455238425.jpg“뭐겠어요.”

중얼거리듯 말하는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1656455238425.jpg“……사랑이지.”

남자가 안 하던 짓을 하는 이유가, 미치는 이유가, 눈이 돌아버리는 이유가. 그거 말고 또 있을까. 주세희를 떠올리니 참았던 그리움이 폭발했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이혼했으니 보러 가지 못할 이유도 없지. 강준은 천천히 일어나며 알리샤를 향한 말을 끝맺었다.

1656455238425.jpg“우연이라도, 다시는 보지 맙시다.”

이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갈 때였다. ***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 때문일까. 세희는 정말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1시.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눈 부신 햇살에 적응하려고 세희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16564552355788.jpg“……테스트기.”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자 부재 전화가 꽤 많이 와 있었다. 김 비서, 진경이, 알리샤, 그리고 서강준까지. 진경은 왜 전화했는지 알 것 같아 가장 나중에 전화하는 걸로. 세희는 욕실로 향하며 우선 알리샤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4552355788.jpg“무슨 일이야?”

16564552384241.jpg[우리 청산할 거 남아 있잖아. 오늘 당장 만나. 몇 시에 만날래?]

하여간 성질도 급하고 제멋대로지. 세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벽시계를 확인했다. 처음으로 집콕이란 걸 해보려 했건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처리할 게 있으면 후다닥 해버리는 게 속도 편하니까.

16564552355788.jpg“오후 1시에 만나. 약속장소는 내가 10분 후에 메시지로 보낼게.”

알리샤와 통화를 끝낸 세희는 욕실로 들어가 테스트기를 했다. 소파에 테스트기를 고이 올려놓은 후 바로 볼 자신이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고르고 있는 그때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강준이었다.

16564552355788.jpg“타이밍 하난 기가 막히다니까.”

작게 중얼거리며 세희는 전화를 받았다.

16564552355788.jpg“네, 대표님.”

1656455238425.jpg[납니다, 오늘 시간 언제 돼요?]

알리샤에 이어 강준까지, 오늘 무슨 날인가.

16564552355788.jpg“저 오늘 약속 있는데요.”

1656455238425.jpg[그럼 그 약속 끝나고 나 좀 봅시다.]

16564552355788.jpg“언제 끝날지 모르는데요?”

1656455238425.jpg[그건 내가 알아서 기다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세희는 지금 눈뜨자마자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오늘 대체 왜 이래. 알리샤에 이어 서강준까지 무대보처럼 만나길 고집하니. 한숨을 내쉬며 무심코 테이블을 바라본 세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테스트기에 뜬 아주 선명하고 붉은 두 줄. ……임신이었다.

1656455238425.jpg[주세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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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 없는 침묵에 강준이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세희는 멍하게 말했다.

16564552355788.jpg“오후 2시에 봐요. 약속장소는 제가 메시지로 보낼게요.”

전화를 끊은 세희는 한참 동안 테스트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그만 웃어버렸다.

16564552355788.jpg“정말 나한테 뭐든 다 해주네.”

알라딘의 요술 램프 지니도 아니고. 뭐든 말만 하면 다 해주겠다던 강준은 이번에도 정말 그래 줬다. 내 인생 최고의 눈부시고 소중한 선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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