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내 여자는 무섭단 말이지.2021.11.28.
“나 지금 선전포고하는 겁니다.”
앙증맞은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여주자, 어깨를 움찔하며 주세희가 눈을 맞춰왔다. 다채로운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동요하는 걸 지켜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오로지 나만이 이 여자를 흔들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눈을 깊숙이 바라보며 강준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주세희 씨, 긴장도 하고 방어도 해요.”
그러니까 주세희, 뭐든 해도 돼. 날 미워하든 밀어내든 무시하든. 다 좋으니 내 앞에서 사라지지만 마.
“뭐든 받아줄 테니, 나만 신경 쓰고 나만 상대하라고.”
사실 선전포고보다 강준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못하면 내가 해.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힘든 일들, 싹 쓸어서 내가 정리해 줄 테니 넌 나만 상대하라고. 꾹 다물려 있던 부드러운 입술이 무슨 말을 할 듯 달싹거렸다.
“대표님, 저는…….”
할 말이 많겠지. 하지만 아직은 듣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을 말들이 나올 게 뻔할 테니.
“그 가방.”
강준은 조수석에 놓인 브리프 케이스로 시선을 주며 여유롭게 말을 잘랐다.
“잘 들고 다녀주니 기분 좋네요.”
억대의 몸값을 자랑하는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는 두고 가고, 서류 가방은 챙겨가고. 하여간 독특해, 흔하지 않아. 그런 모습까지도 내 취향이지만.
“연락하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준은 차 문을 닫아주었다. 주세희가 왠지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서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강준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내 여자는 무섭단 말이지.”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강준이지만, 주세희가 화내는 건 무섭다. 사실 집무실에서 바로 세희를 따라 내려가지 않은 건 잠시의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주세희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머리로 이해했다. 연애가 아닌 결혼이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히 복잡한데 얽힌 사연은 하물며 막장이다. 머리 아팠겠지. 나에게 그런 냉정한 대답까지 들은 이상, 떠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겠지. 그래서 떠난 줄 알았는데.
‘그깟 사랑이 뭐라고요.’
그 말을 했을 때의 주세희를 기억한다. 또렷하고 단정하고 의지가 확고한 눈을. 상황에 떠밀리긴 했지만 주세희는 선택한 거였다. 사랑이 아닌 자신의 삶을, 강준이 아닌 자신을. 강준은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철저히 버림받은 거다. 그럼에도 그런 결정을 내린 주세희를 존경한다.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여자였고, 지금껏 몰랐던 걸 알게 해준 여자였다. 그 질긴 고집과 깊은 독기와 또렷한 주관과 칼 같은 냉정함까지. 그것조차도 다 완벽하게 내 취향이란 말이지. 사실 모르겠다. 주세희가 내 취향인지, 주세희에게 취향이 맞추어진 건지는. 결론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한 거였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이런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다. 다 포기하더라도 그 여자만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준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집무실 층에 도착했다. 팬츠 포켓에 손을 꽂은 채 내리는 강준의 표정이 여유롭다. 이제 2차전을 치르러 가볼까.
*** 조 여사가 오늘 한신 자동차를 찾아온 이유는 제 딸 때문이었다. 딸이 돌연 사임을 표명했고 주세희를 전문 경영인으로 추천했다. 그러곤 잠적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연락만 피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런데 한신 자동차 본사 화장실에서 주세희를 마주쳤다. 가증스러운 것을 떠올리니 분노감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감히 날 아줌마라 불러?”
거금을 투자했고 꾸준히 관리한 덕에 매끈한 피부엔 주름 하나 없다. 체구가 작은 몸은 날씬했고 스타일은 세련되었다. 그런 내 어디가 아줌마인데.
“그나저나 그것이 여긴 웬일이지?”
설마 제 엄마처럼 서강준에게 꼬리 쳐서, 뭐 좀 얻어보겠다 이건가? 아니면 둘 사이에 진짜 뭐라도 있나? 하지만 서강준이 마음줘봤자 주세희는 고작 세컨드일 것이다. 이쪽 남자들은 권력과 명예를 감정보다 중시하니까. 서강준이야 그렇다 쳐도 고귀한 한신가에서 그런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아직도 남자를 몰라서야. 실컷 상처나 받으라지.”
사실 조 여사도 서강준이 눈치챌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멍청한 놈이 아닌 이상, 몇 개월을 같이 산 아내가 바뀐 걸 모를 리가 없으니까. 어찌되었든 당장 이혼은 안 할 것이다.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니고 기업 간의 협약에 서강준의 복수심이 얽힌 결혼이니 더더욱. 그 틈을 노려 제 딸이 임신만 해주면 되는 거였다. 아들이면 더 좋고. 워낙 손이 귀한 집이니, 게임 끝이다. 그 후 서강준이 제 딸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그건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조 여사의 생각이 다시 주세희에게 흘렀다.
“영악한 년, 잘도 날 속였겠다.”
도라 쇼핑몰 진짜 사장이 주세희일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세 배에 달하는 투자금으로 이노패션이 도라를 인수하게 했다. 완벽하게 자신에게 엎드려서 방심하게 해놓고선 뒤에서 몰래몰래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젠 강 관장과 손잡고, 주세희란 더러운 이름으로 이노패션의 대표직을 달겠다니. 원하는 걸 얻었으면 곱게 떠날 것이지, 이렇게 뒤통수를 치려고 할 줄이야. 어쩐지 바짝 엎드려 죽는시늉한다고 했다.
“흥, 그래도 어림도 없지.”
주세희를 지지하는 강 관장 쪽 주주들의 지분을 다 합쳐도 자신만 못했다. 뒤늦게 이노패션 지분을 싹쓸이해서 14%를 보유한 주주까지 제 편에 선 이상, 과반수는 넘지 못할 확률이 크고. 그래서 강 관장 쪽도 그 주주를 찾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못 찾겠지. 그쪽 방면에 유능한 정 실장도 찾지 못했는데. 그 주주의 비서가 먼저 접선해오지 않았다면 자신도 못 찾았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조 여사는 여유로웠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강준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교차해서 앉은 모습이 물 흐르듯 매끄럽고 우아했다. 하지만 소파 헤드에 느슨히 걸친 팔은 건방지다 못해 오만했다.
“여사님께서 먼저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먼저 말할까요.”
서강준은 늘 이런 식이었다. 정중한데 건방지고, 배려하는 듯하면서 제멋대로이고.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진 자의 오만이고 여유일 것이다. 재수 없는 새끼, 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X가지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속으론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조 여사는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아까 그 아가씬 무슨 일로 자넬 찾아온 건가?”
“회사에서 만날 이유가 뭐겠습니까? 비즈니스지.”
이 새끼가 날 바보로 아나. 한신 자동차와 이노패션이 비즈니스로 엮일 게 뭐 있다고! 넌 알잖아! 그 애가 네 아내 노릇 했던 애라는 거! 빽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느라 조 여사의 눈꼬리가 파들거렸다. 속내가 전혀 읽히지 않는 놈에게 괜히 대놓고 드러냈다가 약점을 잡히면 안 되니까.
“그 아가씨 미모가 워낙 출중하길래 자네가 다시 엄한 짓 하나 했네. 늙은이의 괜한 노파심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게.”
“신경 안 씁니다.”
바로 흘러나온 느긋한 강준의 대답에 조 여사는 확신했다. 이 새끼는 날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고. 분해 죽겠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강준은 자신이 함부로 할 상대가 아니기에.
“그나저나 내 딸 지금 어디 있나? 독일에 간 후부터 연락이 안 되니 묻는 거야. 아내니까, 자넨 알고 있겠지?”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이혼 마무리되면, 따님이 알아서 연락하든지 할 테니.”
이혼이란 단어에 지금껏 잘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이 흐트러졌다. 조 여사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이혼이라니? 누구 맘대로?”
“흥분하지 말고 앉으시죠, 여사님.”
별일 아니라는 듯 강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분명 내려다보는 건 자신인데, 왜 이놈이 날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것 같지? 그럼에도 우선 조 여사는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신그룹 법률팀이 유능하다는 건 여사님도 잘 아실 테고.”
“……!”
“한신에서 이노를 상대로 사기죄로 고소 안 하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조 여사는 눈앞의 강준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미묘하게 바뀐 눈빛은 잘 벼른 칼날 같고, 정중함을 걷어낸 정교한 얼굴은 섬뜩했다.
“첫째, 위자료 없는 이혼을 조용히 받아들일 것. 둘째, 지금 이 순간부터 주세희를 만나지도 말고 건들지도 말 것. 조건 수용하겠습니까?”
그제야 조 여사는 깨달았다. 주세희를 향한 서강준의 감정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그래, 너희 둘이 눈 맞았다 이거지?
“예고를 하나 해드리자면 고소는 안 하겠지만 훗날 상황에 따라 한신이 이노를 압박할 순 있습니다. 그 결정권은 안타깝게도 제가 쥐고 있는 게 아니라 확답은 못 드리겠고.”
“당사자들이 싫어서 이혼하겠다는데 어른들이 뭘 어쩌겠나. 받아들여야지.”
우아하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조 여사는 이제 속으로 두 사람을 비웃고 있었다. 이것들 봐라, 놀고들 있네. 차마 결혼은 못 하겠고, 은밀히 숨겨놓고 만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정성 한번 갸륵해라. 결국 너도 똑같은 남자 새끼구나. 비밀스럽게 사랑 놀이 좀 해보겠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래도 그 영악한 것이 제 어미를 닮아 남자 후리는 재주는 타고났나 보다. 천하의 서강준을 이 정도로 홀려놓다니. 전이라면 괘씸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세희는 내가 먼저 찾을 일은 없을 걸세. 나도 딱히 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하지만 우연한 만남까진 나도 어쩌지 못해. 그건 참고해주게.”
말을 끝맺은 후 일어나서 돌아서며 조 여사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사랑이란 참 우습기도 해라.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이라지. 하지만 조 여사가 생각하는 사랑은 다르다. 적에게 내어줄 수 있는 약점, 빈틈. 그래서 조 여사는 태어난 이래 자신 외의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없었다. 남편도, 자신을 거둬준 양부모님도, 그리고 제 딸도. 그러니 제발 사랑이기를. 내가 당장은 네 놈을 공격 못 하지만, 기회는 언제든지 있으니까. 두고 봐, 받은 만큼 돌려주마. 절대 혼자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을 테니. *** 모처럼 여유롭게 맞는 아침이었다. 한계에 다다른 몸에서 제발 하루만 쉬어달라고 세희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래서 며칠간 일정을 통째로 비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콕 시전. 과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국 오늘도 잠을 설쳤다. 허전해서, 후덥지근한 공기에도 이상하게 추워서. 나른하게 늘어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희는 테라스로 나갔다. 조금 더운 바람이 불어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힘없는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올린 세희는 의자에 앉았다. 멍 때리려고 앉은 거지만 또다시 생각은 자연스럽게 서강준으로 흘렀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연락한다는 말을 하지 말든지.”
사람 마음은 있는 대로 휘저어놓고선. 주차장에서의 선전포고 후 일주일이 흘렀지만 강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아니, 이젠 잘 모르겠다. 연락이 오지 않길 바라는지, 오길 바라는 건지. 서강준으로 인해 정확히 구분 지었던 것들이 또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강준이 저를 내버려 뒀으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부족한 잠 때문일까. 곤두선 신경 때문일까. 요즘 계속 이랬다.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기분이 들쑥날쑥거린다.
“뭘 선전포고한다는 건데. 뭘 다 알아서 하겠다는 건데.”
잃을 것도 많고 책임질 것도 많은 남자가. 그 모든 걸 잃고서라도 자신을 선택한다고 하면, 감동이라도 받을까 봐? 그렇다면 강준은 자신에 대해 알려면 아직 멀었다. 지독하게 이성적인 세희가 원하는 건 각자 잘 사는 거였다. 그게 최선이었고 맞는 거니까. 그때 진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세희, 너 또 밥 안 먹었지? 전주비빔밥에 구수한 된장찌개, 콜? 아니면, 너 단골인 곤드레밥 집에서 도시락 포장해 가?]
힘없이 눈을 감으며 세희는 생각했다. 음식은 됐으니까 텅 빈 위처럼 머릿속도 좀 텅 비었으면.
“그냥 와, 밥 생각 없으니까. 요즘 냄새에도 예민해서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
[주세희, 너 뭐 입덧하니? 누가 보면 임신한 줄 알겠네.]
별 의미 없는 진경의 투덜거림에 세희의 머릿속이 번쩍했다. ……입덧, 그리고 임신. 설마, 아니겠지. 두 번째 밤 이후 두 달이 흘렀고 한 달은 생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생리가 불규칙적이었고 어떤 달은 그냥 넘어간 적도 있었다. 배란일도 가임기도 계산할 수 없는 불규칙한 생리. 독일에서 돌아온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진경아, 혹시 약국이나 편의점 들를 수 있어?”
[당연하지, 뭐 사다 줄까. 두통약? 아니면 생리통약?]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세희는 차분하게 말했다.
“임신 테스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