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선전포고하는 겁니다.2021.11.25.
독일에서 귀국 후 예상대로 바빴지만 잠을 못 잘 만큼은 아니었다. 주세희는 김진우 때문에 쉽게 찾아냈고 사설탐정에게 미리 의뢰한 덕분에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돌아온 후부터 강준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친 듯이 몸을 혹사해도 몸만 피곤할 뿐. 습관이란 참으로 지독하다는 걸 깨달을 뿐이었다. 늘 혼자가 익숙했던 내게 둘이란 걸 알게 해준 주세희 때문에.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 해도 한 달이 넘어가니 강준도 지쳐갔다. 특히 오늘은 부족한 잠 때문에 몇 초 정도 정신을 놓는 것 같았다. 주세희를 만나는 날인데. 멀쩡한 정신으로 맞고 싶은 마음에 강준은 10분 정도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잠시 소파에 누운 사이 깜빡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싫어, 내가 그냥 건널래.’
강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가 나오자 아내는 혼자서 건너겠다고 고집했다.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얼른 잡아줄 생각에 강준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푸르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 아래, 하얀 드레스를 입고 폴짝폴짝 뛰는 주세희는 아름다웠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린 탐스러운 머리칼이 강준의 얼굴을 간질였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감촉과 머리칼에 배인 향기로움에 취해 강준은 아내를 불렀다.
‘주세희.’
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는 활짝 웃고 있었다. 햇살 같은 미소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진 강준은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당장이라도 품에 안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아서. 품에 안고 나니 살 것만 같아 강준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주세희.”
홀린 듯 손을 뻗었고 작은 뒤통수를 감싸 끌어당겼다. 키스하고 싶었다. 늘 함께 있는데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너 때문에, 난 늘 미칠 것 같아. 가느다란 숨결이 입술에 닿자 부드러운 몸을 안은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다디단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고막을 뒤흔드는 요란한 벨 소리. 그리고 서서히 돌아오는 현실 감각.
“…….”
“…….”
푸르른 하늘이 사라지고 반짝거리던 강물이 사라지고. 소파에 누운 강준의 몸 위에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주세희와 눈이 마주쳤다. 배경은 꿈이었지만, 품 안의 감각은 현실이었던 거다. 하지만 세희를 놓아주긴커녕 더 꼭 끌어안으며 강준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 자세, 조금 당혹스럽긴 한데 나쁘진 않네요.”
기가 막힌 듯 깜빡거리는 커다란 눈동자에 머금은 감정이 다채롭다. 벗어나려는 듯 몸 위에서 꿈틀거리는 부드러운 몸을 담뿍 끌어안으며 강준은 자조적으로 속삭였다.
“알아요, 또 내가 시작했겠지.”
늘 다가서고 애가 타서 못 참는 건 나고. 늘 도망가고 지독히도 잘 참아내는 건 너니까.
“뺨이라도 기꺼이 맞아 줄 테니, 딱 10초만 안고 있게 해줄래요.”
이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주세희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게 맞는 거니까. 하지만 그 계획은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무너졌다. 또 주세희 너 때문에. 30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획적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어긋남이나 일탈도 없이, 기계적이고 건조하게 반복적으로. 앞으로도 반복될 삶에 딱히 불만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주세희를 만나고 나서 강준의 삶은 엉클어졌다. 주세희는 차근차근 계획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뇌와 심장을 공략해왔다. 처음엔 분노와 경멸감으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그리고 관심으로. 그러다 보니 사랑이 되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알 듯 하면서 모르겠고.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주세희로 인해 31년의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좋았다. 널 사랑하는 내가, 이 감정이, 그리고 네가.
“……10초 됐는데요.”
목덜미에서 웅얼거리는 한숨 같은 속삭임에 놓아주긴커녕 손끝에 더 힘이 들어갔다. 놔줘야 하는 걸 아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스프링처럼 튕기듯 폴짝 일어난 주세희의 새하얀 얼굴이 잘 익은 사과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모습을 가슴에 새기며 강준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비서가 건넨 한정식 도시락을 들어 올리며 세희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점심 먹읍시다, 주세희 씨.”
*** 집무실에 딸린 소회의실이었다. 단 한 번 와보았던 강준의 집무실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세희는 빌딩 숲으로 빼곡한 통창을 바라보던 시선을 강준에게 다시 돌렸다. 강준은 세희가 사 온 삼단 도시락을 이단째 깨끗이 비우는 중이다. 육·해·공을 모두 담아 안심 스테이크와 바닷가재, 전복구이와 구운 닭 가슴살로 구성된 육식주의자를 위한 맞춤형 도시락이었다. 자신과 달리 음식을 깨작거리는 세희가 신경 쓰였는지 강준이 물었다.
“입에 안 맞을 리가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세희의 도시락은 강준이 미리 주문해놓은 거였다. 자신이 단백질 위주의 도시락을 사올 걸 미리 내다본 강준의 준비성에 솔직히 감동했다. 강준이 준비한 도시락은 자신이 즐겨 먹었던 소박한 나물 반찬과 갈비찜이었으니까. 하지만 입맛이 없는데 어떡하라고.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은 세희는 차분히 물었다.
“속이 좋지 않아요. 혹시 음식을 잘 먹는 것도 대표님에게 할 보답에 포함인 건가요?”
그제야 강준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는 순식간에 도시락을 정리해서 쇼핑백에 담아서 나갔다. 혼자 남은 세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까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만약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면, 정말 키스했을지도 몰랐다. 알람이 울리고 비서가 노크해서 다행이었다.
“주세희, 정신 바짝 차려.”
이럴수록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트레이를 손에 든 강준이 세희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민트 차예요. 속이 안 좋을 땐 이 허브 차가 좋다고 하네요.”
그냥 보내주면 더 좋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린 세희는 찻잔을 들었다. 몇 모금 마시자 거북한 속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차를 핑계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 분 후, 먼저 입을 연 건 강준이었다.
“불순한 관계라는 영화.”
제목만 말했을 뿐인데도 단정하고 흔들림 없던 주세희의 눈빛이 변했다. 그럴 만도 했다. 유일하게 같이 보았던 영화, 그날 차 안에서 주세희가 했던 말들. 그건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주세희의 부모님 이야기였고 숨겨진 과거였다. 뜯어볼 일이 없길 바랐던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내용이기도 했고.
“후속작이 나온다는군요.”
생애 처음 해본 차박. 그날 자신의 품에 안겨 주세희가 물었다.
‘만약 쌍둥이 동생이랑 그 남자가 정말 사랑한 거라면. 두 사람의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끝나도 됐을 것 같아요. 강준 씬 어떻게 생각해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조심스럽게 드러낸 너의 마음이고 용기였을 거라는. 그 마음과 용기를 냉정하게 짓밟은 건 자신이었다. 그런 제게서 조금의 희망도 못 느꼈을 주세희가 떠나는 건 당연한 거였다. 그날을 떠올리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대답을 잘했다면, 넌 날 떠나지 않았을까.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강준은 담담히 물었다.
“내용, 궁금하지 않아요?”
침묵하던 세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가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이미 지난 일이고 그 시간은 흘러가 버렸다고.
“난 궁금해요. 주세희 씨가 어떻게 생각할지.”
“…….”
“후속작은 해피엔딩이거든.”
세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들고 있던 찻잔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차분히 내리깐 긴 속눈썹이 얄미울 만큼 단정하고 예뻤다.
“해피엔딩이라면, 다시 돌아온 남자도 참 별 볼 일 없고, 그런 남잘 받아주는 여자도 별 볼 일 없네요. 정말.”
“…….”
“사랑이 면죄부는 아니잖아요. 잘못한 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관계가 깨끗해질 수도 없는데.”
세희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담담했다. 하지만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리는 그 마음이 강준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만큼 아팠던 거겠지, 못처럼 깊이 박혔던 거겠지.
“그리고 내가 여주라면 거절할 거예요. 조금만 참으면 무뎌질 감정인데, 굳이 힘든 길을 걸을 필요가 있을까요? 함께하면 죄 없는 아이까지 손가락질당할 게 뻔하지만 헤어지면 둘 다 평범하게 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고개를 든 세희가 고요한 호수 같은 눈으로 강준을 깊숙이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끝맺었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요.”
강준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침묵하는 강준을 보며 세희는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 연락은…… 대표님께서 주세요.”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세희는 화장실로 향했다. 먹은 게 없는 빈속인데도 울렁거려 헛구역질이 나왔다. 겨우 속이 가라앉자 힘없이 세면대 앞에 선 세희는 중얼거렸다.
“빈속에 영양제를 먹는 게 아니었어.”
돈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건강이었다. 건강해야 복수도 하고 돈도 벌고 그 돈도 쓸 수 있으니까. 요즘 신경 쓸 것도 많았지만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서강준의 품에서 따뜻하게 잠들던 지독한 습관이 지금은 세희를 좀먹고 있었다. 최소한의 잠을 자지 못하니 컨디션도 나빠지고 입맛도 없고. 그나마 영양제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 같았다.
“주주총회만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
과반수의 찬성을 얻으려면 강준의 지지가 절실했다. 그러니 조금만 참자. 조금만 더 독하게 버티면 되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 세희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젠 정말 연락 안 하겠지. 잘했어, 주세희.”
가슴은 아플지언정 곪아 있던 부분을 도려낸 것처럼 후련하다. 구질구질하게 남아 있던 미련이 정리된 것도 같았다.
“일에만 집중하는 거야. 돈도 지금보다 더 많이 버는 거야.”
사랑 대신 일을 선택한 게 얼마나 옳은 일이었는지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랑은 날 먹여 살려주지도 않고 책임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돈은 나를 먹여 살려주고 당당하게 해주고 비굴하지 않게 만들어 주니까. 그럼 된 거야. 그때 문이 열리면서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거기가 한신 자동차였나 보다.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다가온 건 조 여사였다. 눈을 굴리는 걸 보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불여시 같은 것! 너구나? 서 사장 뒤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게!”
“…….”
“내 딸 어디다 숨겨놨어? 네년은 알 거 아니야! 어디다 감금시켜놓고 둘이 무슨……?”
“아줌마.”
세희는 태연히 조 여사의 말을 잘랐다.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조 여사는 넋이 나간 표정이다.
“절 아줌마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은데, 시력 검사 한번 해보시길 권해요. 노안이 참 무섭다는데 관리 잘하셔야죠.”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을 벙긋거리는 조 여사를 보니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참았던가. 하지만 어떡해요, 이모.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세희는 모멸감에 몸을 부르르 떠는 조 여사를 지나쳐 화장실을 나왔다. 뒤늦게 화장실에서 나온 조 여사가 세희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채 돌려세웠다.
“건방진……?”
그런데 갑자기 말을 멈춘 조 여사가 잡고 있던 팔을 놓고 표정을 가다듬는다. 뒤를 돌아보자 복도 끝에서 막 나타난 강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강준은 커다란 몸으로 조 여사의 시야에서 세희를 가려버렸다.
“일찍 오셨네요.”
나직한 음성은 싸늘하면서도 담담했다.
“아, 시간 여유가 생겨서 좀 일찍 왔네.”
“그럼 먼저 올라가 계시죠. 곧 따라가겠습니다.”
단호한 눈빛과 음성에 조 여사는 얌전하게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그제야 세희에게 돌아선 강준이 입을 열었다.
“갑시다, 차까지 데려다줄 테니.”
“혹시 저 때문에 내려온 건 아니죠?”
“그럼 안 됩니까?”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쉰 세희는 강준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매너 있게 차 문까지 열어준 강준에게 고개를 숙인 세희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강준은 잡고 있는 문을 닫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 좀 닫아줄래요?”
조심스러운 세희의 요청에 강준이 허리를 기울여 눈을 맞추었다.
“할 말 있어서 따라온 건데, 안 궁금해요?”
“……네.”
“그래도 들어요.”
그럴 거면 왜 물어봐. 발끈하듯 눈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 강준이 말을 이었다.
“일주일 후에 나 이혼합니다.”
이혼한다고? 도대체 왜? 아니, 이렇게 급하게? 세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강준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돌싱은 매력 없으려나.”
“……!”
“그래도 나같이 괜찮은 남자 찾기 힘들 텐데.”
이 상황에도 뻔뻔할 만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말문이 막힌 세희에게 강준이 상체를 더 기울이며 다가왔다.
아슬한 간극, 짙어지는 체향, 닿을 듯 말듯한 입술, 아찔한 자극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순간, 나직하고 확고한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나 지금 선전포고하는 겁니다.”
방어할 테면 얼마든지 방어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