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다신 널 놓지 않아.2021.11.21.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괜찮습니다. 10분 후에 다시 전화하죠.”
잠결에 들리는 저음의 음색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참 듣기 좋은 음성이란 생각을 하는 순간, 세희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눈을 뜰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도 모자라 몹쓸 제 손이 단단한 허리를 안고 있으니까. 그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자는 척을 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유연하게 벗어날지. 하지만 잠에서 깬 걸 눈치 챈 강준이 태연히 말을 걸어왔다.
“일어났어요?”
모든 게 완벽한 남자에게도 없는 게 있었다. 먼저 눈을 뜰 때까지 모른 척해주는 센스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눈을 뜨자 차 안이었다. 정확히는 차의 뒷좌석.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제 손만 아니었다면 정색이라도 할 텐데. 이 몹쓸 손 때문에 따질 자격조차 없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세희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며 강준의 품에서 벗어났다. 어색함에 흠흠, 목을 가다듬는 세희에게 강준이 생수병을 내밀었다.
“우선 좀 마셔요.”
“……감사합니다.”
물을 마시고 나니 버석하게 마른 몸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옆에 앉은 강준을 똑바로 볼 자신은 없다. 생수병만 만지작거리는 세희에게 다시 강준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대표님 덕분에요.”
이건 진심이었다. 강준이 품으로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졌을 테니까.
“5분 좀 안 되게 기절했어요. 안자마자 품을 파고들길래, 생각보다 상태가 나쁜 것 같진 않아서. 우선 상태를 지켜보고 병원에 데려갈까 싶어 차로 데려왔어요.”
“…….”
“옆에 앉은 나한테 몸을 기대면서 파고든 건 주세희 씨고.”
“…….”
“못 믿겠으면 차 블랙박스 영상 보여줄…….”
“믿어요!”
소스라치게 놀라 빠르게 한 대답에 강준이 옆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왜 웃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아…… 쥐구멍. 도대체 뭐 한 거니, 주세희. 밀려드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작은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혹시 몰라서 잘 아는 박사님에게 전화로 자문 구했고 10분 후에도 안 일어나면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어요.”
“대표님 고생하지 마시고 병원에 데려가지 그랬어요. 아니면 구급차라도.”
그럼 이런 못 볼 꼴도 안 보였을 테고 창피도 안 당했을 텐데.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무심코 고개를 튼 세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뜨거웠다. 노골적인 감정이었고 온도였다. 그걸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강준이 태연히 말을 했다.
“병원, 싫어하지 않았나.”
유태령이었을 때 병원 가는 걸 극도로 꺼려 했던 걸 강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틀며 세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엔 가야겠죠.”
알 것도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만들어서 날 보러 온 당신의 마음, 그리고 의도를. 당신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겠지. 하지만 나 때문에 잃을 것도 많고 손해 볼 것도 많겠지. 날 선택은 못 하니 이렇게라도 보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싫어. 그건 내게 희망 고문이니까.
“오늘 일에 대한 고마움은 어떻게 보답할지 제가 생각해볼게요. 그럼 전 이만…….”
차 문에 손을 대는 세희에게 강준이 말했다.
“주세희 씨가 쓰러져서 놀랐어요.”
천천히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세희를 보며 강준은 생각했다. 놀랐다는 표현으론 부족하다고. 심장이 내려앉고 세상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병원을 고집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물론 상태가 나빠 보이지 않아서도 맞지만, 주세희와 좀 더 있고 싶어서였다. 품에 안아버리니 도저히 다시 놔줄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선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 했지만, 정말 주세희는 제 품을 먼저 파고들었다. 아기새가 둥지를 찾아오듯 그렇게. 품에 안으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자신도 결국은 인간이고 남자였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마음은 사심이고 욕심이었다. 강준을 보며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주저하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요즘 일하느라 무리를 좀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다신 이런 모습 보일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그만 내려도 될까요?”
품에 먼저 안길 땐 언제고. 어느새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는 세희를 보니 강준은 입안이 썼다. 유태령이었을 때도, 그리고 주세희였을 때도. 왜 넌 항상 도망치지 못해 안달인지. 내가 그렇게 널 불안하게 하는 건지.
“좀 더 쉬었다 가요. 아직도 안색이 창백한데.”
강준은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주세희는 냉정했다.
“대표님도 바쁘시겠지만, 저도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식사 두 끼 어떻습니까?”
“무슨…….”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식사 두 번 사는 거 말입니다.”
말간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쳤다. 또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이리라.
“식사 때 본인의 능력을 입증할 자료도 챙겨오면 좋고.”
“……그러겠습니다. 전화는 제가 드리면 될까요?”
“주세희 씨, 편할 대로 해요.”
강준이 차에서 먼저 내리자 세희도 따라 내렸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표님.”
강준이 따라올까 봐 걱정됐는지 세희는 얼른 작별을 고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살짝 고개를 틀어 강준의 눈치를 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을 냉큼 주워서 차에 올랐다. 주세희는 알까. 본인의 방금 그 행동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차에 다시 올라탄 강준은 시동을 걸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찾아냈으니, 다신 널 놓지 않아.
*** 월요일 아침, 강준은 일찍 본가를 찾았다. 이혼을 앞에 두고 있고 주세희를 찾아냈고 만났다. 이제 다음은 가족에게 알려야 할 차례, 정확히는 선전포고였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끝낸 강준은 서 회장과 연숙에게 담담히 털어놓았다. 경수의 자살, 그리고 자살로 몰아붙였던 알리샤 바튼, 마음먹었던 복수 그리고 결혼. 위암 수술을 받아야 하는 딸 대신 이노에서 내세운 가짜 신부. 주세희가 이노 유 부회장의 사생아란 것도. 그 외의 과거는 철저히 함구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건 주세희가 결정할 일이었으니까. 의외로 차분히 받아들이는 서 회장과 달리 연숙은 펄펄 뛰었다.
“어쩐지 뭐가 이상하다 했어! 그렇게 예쁜 딸을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인가 했더니. 사생아가 싫으면 대타로 내세우질 말았어야지! 왜 자기가 끌어들이고 괴롭혀? 상식이라곤 밥 말아먹은 고약하고 무식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이번엔 서 회장의 팔에 매달렸다.
“아버님, 이노가 우리 한신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사기극을 벌였겠어요? 저 억울하고 자존심 상해서 못 살겠어요. 이대로 두고 보실 거예요?”
그런 연숙을 가만히 다독인 서 회장이 강준에게 물었다.
“강준이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우선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두세요.”
강준의 대답에 연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강준!”
“사기극을 벌인 건 괘씸하지만 덕분에 제가 제대로 임자 만났잖아요.”
이노그룹을 어떻게 할지는 주세희가 결정할 일. 그리고 강준은 주세희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넌 뭘 어떻게 할 작정인 게냐.”
“유태령과 이혼하고 주세희랑 결혼해야죠.”
드디어 서 회장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서 회장도 그 아이가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건 쉽게 수습할 수준이 아니었다. 사정이 뭐든, 자신의 손자는 아내의 이복동생과 눈이 맞아 바람 난 꼴이니까. 막장도 이런 막장일 수가 없다.
“그 아이도, 너랑 다시 결혼하고 싶다든?”
“하고 싶도록 만들어야죠.”
참 뭣 같은 대답에 서 회장은 이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니면, 내가 이노를 압박해서 그 아일 정식으로 호적에 올리게 하는 건 어떠냐. 그럼 수습하기가 한결 수월할 텐데.”
“그건 세희가 바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강준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주세희는 날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나 더 미리 말씀드리면, 제가 프러포즈에 성공하면 세희의 과거는 문제 삼지 않았으면 합니다. 스스로 말하면 모를까, 세희 뒤도 캐지 않았으면 하고요.”
두 사람은 이제 자포자기한 눈으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충격받을 진실이 또 있냐고 묻는 것도 같았다.
“두 분이 예뻐했던 주세희로만 기억해주세요. 과거야 어찌 되었든, 그게 진짜 주세희 모습이니까요.”
지금 자신이 오로지 주세희만을 보는 것처럼. 주세희의 과거를 들여다보니 알 것 같았다. 왜 세희가 제게 예쁘냐고 물었는지,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해주라고 했던 건지도.
“하나뿐인 손주이자 자식이 평생 독수공방하며 늙어 죽는 걸 바라진 않으실 테고. 주세희 반대하시면, 제가 그냥 한신 그룹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면 됩니다.”
정중한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 서 회장이 하얀 눈썹을 씰룩거리자, 강준이 다시 말했다.
“할아버지 손주와 어머니 아들이 그 정도로 사랑합니다, 주세희를.”
낯선 강준의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하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 서 회장이 말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서 회장에게 인사하고 일어난 강준의 뒤를 연숙이 쪼르르 따라 나왔다.
“아들, 엄마는 뭐 하면 될까?”
“제가 세희 설득해서 데려오면 예전처럼 따스하게만 대해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넌 데려오기만 해. 그럼 엄마가 내 딸처럼 잘해줄게. 아니면, 내가 세희를 만나볼까?”
강준은 연숙을 잘 따랐던 세희를 떠올렸다. 여차하면 나중에 지원군으로 연숙을 투입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혼이 급선무예요. 그 후에 제가 말씀드릴게요.”
본가를 나서는 강준의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 강준과 헤어진 후 세희는 다음 날 바로 전화했다. 저녁보다는 점심이 편하다는 말에 금요일 어떠냐고 묻자 강준은 괜찮다고 했다. 장소는 그날 정하자고 했고 수요일 날 전화했더니 집무실로 도시락배달을 요청했다. 한신 자동차 본사로 차를 몰면서 세희는 중얼거렸다.
“바쁘면 그냥 나중에 먹자고 하면 되잖아.”
오늘만 날이 아닌데. 웬일로 차가 막히지 않아서 한신 본사에 20분이나 빨리 도착했다. 시간을 딱 맞추어 올라갈까 고민하던 세희는 그냥 올라가기로 했다. 20분 빨리 시작하면 그만큼 빨리 끝날 테고 일하는 중이면 기다리면 되는 거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1층 로비에서 연락받은 비서가 집무실 복도까지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집무실로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렇게 바로? 세희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비서가 싱긋 웃는다.
“한 시 반에 손님 오시면 바로 집무실로 안내해달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세희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예의상 노크를 두 번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넓은 집무실 안, 통창을 등진 집무 책상에 강준은 없었다. 그럼 대체…….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강준은 소파에서 길게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내린 약간의 흐트러짐마저 매력적인 모습으로. 늘 완벽하던 남자가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잠이 든 걸까.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세희는 조심히 소파로 다가갔다.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통창을 투시해 들어온 햇살이 강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부시면 편히 자기 힘들 텐데.”
소파 앞에 선 세희의 그림자가 강준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곤히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느슨해졌다. 유태령이었을 땐 날마다 봤지만, 이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반듯한 눈썹, 남자치고 긴 속눈썹과 결점 하나 없는 피부, 고집스럽게 다물린 부드러운 입술. 변함없이 근사한 외모지만 예전보다 날렵해진 얼굴선과 턱선은 신경이 쓰인다.
“본인이나 밥 좀 챙겨 먹고 다니지.”
그때 세희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고요히 감긴 왼쪽 눈가 밑에 붙어 있는 속눈썹 하나. 간지러울 텐데. 잠시 망설이던 세희는 허리를 기울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이 닿기도 전에 흘러내린 머리칼이 강준의 얼굴에 닿아버렸다. 화들짝 놀란 세희가 허리를 세우려는 순간, 손목이 잡히고 끌어 당겨졌다.
“……!”
세희는 그만 강준의 몸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속눈썹이든 뭐든 그냥 둘걸.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서서히 올라가는 얇은 눈꺼풀을 그저 숨죽이고 바라볼 뿐. 그 아래 반쯤 잠긴 몽롱하게 풀린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세희는 멍해졌다. 그 눈이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눈.
“……주세희.”
속삭이듯 흘러나온, 눈물 날만큼 다정한 음성. 독하게 세워놨던 경계벽이 무너져내리는 순간, 커다란 손이 작은 뒤통수를 감싸 끌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