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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항상 미치는 건 나지. (66/110)

66. 항상 미치는 건 나지.2021.11.18.

오늘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 강준은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꼬박 한 달 만에 만나는 주세희에게 건넬 첫마디는 뭐가 좋을지.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첫마디는 허무할 만큼 심플하고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16564551561151.jpg“반가워요, 주세희 씨.”

강준은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세희를 으스러지듯 품에 끌어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지금 자신은 세희에게 손끝 하나 대선 안 되는 존재이고 관계였다. 재킷 안에서 명함을 꺼낸 강준은 세희에게 내밀었다.

16564551561151.jpg“이런 사람입니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는 작은 손에 시선이 갔다. 가늘고 길게 뻗은 매끈한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문득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반지는 주지 말았어야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준 건데. 그것만큼은 유태령이 아닌 주세희에게 준 건데. 결국 강준은 시선을 틀어버렸다. 끝까지 못 믿고 떠나버린 게 괘씸해서라도 더 태연한 척 굴고 싶은데. 이렇게 막상 보니 새삼스러운 사실을 쓰라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주세희에 대해서만큼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걸. 그럼에도 희미한 쾌감이 강준의 꼿꼿한 등줄기를 훑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이, 질끈 깨물어 피가 몰린 도톰한 입술이, 자신으로 인해 동요하는 주세희의 모습이 미치도록 좋아서. 살이 좀 내려앉긴 했지만 여전히 곱고 여린 모습에 심장이 선득거린다. 이렇게라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스치는 우연조차 피했을 참 지독한 이 여자 때문에. 쓴웃음을 삼키며 강준은 담담히 물었다.

16564551561151.jpg“혹시, 날 알려나.”

그 물음에 세희는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긴 속눈썹 아래 꼭 숨기고 끝끝내 보여주지 않았던 맑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그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강준은 태연히 말했다.

16564551561151.jpg“날 알면 다행이고.”

날 향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면 다행이고.

16564551561151.jpg“몰랐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차차 알아가면 되니.”

잊었다 해도 사실 상관은 없다. 그 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하면 되니까.

16564551561175.jpg“…….”

대답 대신 강준을 빤히 올려다보는 맑은 눈동자가 싸늘하다. 지금 뭐 하는 수작이냐고 묻는 것도 같았다. 그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날 이렇게 만든 건 주세희 넌데. 한 달은 버텼건만, 남은 이주는 못 버티겠는데. 이런 만남이 아니면 당당히 너를 볼 방법이 없는데. 그러니 참을성 많은 네가 참아야지. 인내심이 바닥을 친 난 이렇게라도 널 봐야겠으니.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니 흐트러졌던 마음이 빠르게 추슬러진다.

16564551561151.jpg“룸은 답답해서 선호하지 않는 편입니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으로 옮길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비즈니스적인 이 만남을 찍어줄 CCTV가 있는 장소로 옮겨야 했다. 그래야만 훗날 오르내릴 구설수를 피할 수 있으니까.

16564551561175.jpg“전 괜찮으니 대표님이 원하는 장소로 옮기세요.”

어느새 차분해진 눈동자, 여전히 매끄럽고 단정한 음성. 주세희다운 반응에 강준은 속으로 다시 한번 입안이 써졌다. 항상 미치는 건 나지. 물론 알고는 있다. 먼저 모른 척하고 선을 그은 건 자신이라는 걸.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유부남이란 타이틀을 떼기 전까진, 조심해야 했다. 자신이 아닌 주세희를 위해서. 네가 못 하면 내가 해. 그게 뭐든. 늘 가슴 안에서 수도 없이 곱씹던 말을 떠올리며 강준은 태연하게 세희를 에스코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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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준을 처음에 봤을 땐 그랬다. 차마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바라볼 수 없었다. 목이 메 말이 나오지 않았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까 봐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장소를 옮겨 이렇게 마주 앉으니 이젠 화가 났다. 그럼에도 세희는 단정한 자태로 흔들림 없이 강준 앞에 앉아 있었다. 마주 앉아서 식사하고, 고요한 물길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눈을 감당해내고.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타인인 척. 당신이 하는데 나라고 못 할까. 세희로선 일종의 반항이었다.

16564551561151.jpg“음식이 입에 안 맞습니까?”

고요히 파고드는 낮은 음성에 세희는 그제야 눈을 들었다. 또다시 태연히 주시하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이 집요할 만큼 심장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날 보고도 심장이 안 뛰냐고 묻는 것도 같았다. 가슴이 아플 만큼 그리웠지만 지금은 원망스러울 만큼 얄미운 눈이었다.

16564551561175.jpg“입에 맞습니다. 다만,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먹을 만큼 낯이 두꺼운 편은 아니라서요.”

그래서 이번엔 먼저 선을 긋고 타인처럼 대했다. 그러자 강준은 재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16564551561151.jpg“그렇게 낯을 가리면, 나는 어떻게 설득하려고.”

순간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다시 삼켰다. 눈을 똑바로 맞추고 보란 듯이 단정하게 웃으며 세희는 차분히 대답했다.

16564551561175.jpg“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사는 사적인 영역이고, 대표님을 설득하는 건 공적인 영역이니까요.”

16564551561151.jpg“그렇다면 기대하죠, 주세희 씨.”

태연한 척 굴려고 겨우겨우 몇 젓가락 음식을 먹었지만, 이젠 못 하겠다. 어차피 강준도 음식엔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상태였다. 자타공인 육식주의자께서 풀때기를 좋아할 린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나만 억지로 먹어야 해. 요즘 속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먹으면 체할 게 뻔했다. 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64551561175.jpg“사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와서요. 식사는 그만 물렸으면 합니다.”

16564551561151.jpg“그렇게 안 먹으니 살이 빠지지.”

겨우 들은 강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세희는 하마터면 뭐라고요,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이미 강준은 호출 벨을 누르고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직원에게 식사를 치우고 차를 부탁했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행동하는 강준을 이번엔 세희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와의 재회를 상상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인 건지. 분명 우연은 아니었다. 도도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복수의 방향을 알리샤에서 내게로 돌린 걸까. 아니면, 네깟 게 감히 뭔데 나를 버리고 떠나냐는 일종의 항의? 나한테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은 협박을 하기 위해서? 테이블 위를 치운 직원이 향긋한 차를 세팅하는 동안 둘 사이엔 침묵이 가라앉았다. 향긋한 차로 목을 축인 세희는 브리프 케이스에서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던 자료를 꺼냈다.

16564551561175.jpg“제가 이노패션을 이끌어 갈 전문 경영인으로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건 이 자료를 보시면 아실 거예요.”

빨리 이 만남을 끝내고 싶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와 더 있다간 몸 안의 피가 바짝 말라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건넨 자료를 받은 강준은 그걸 보지 않고 의자에 올려놓았다.

16564551561151.jpg“설명은 직접 듣도록 하죠.”

세희는 질끈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유태령이란 이름으로, 서강준의 아내로 지내면서 해왔던 물밑 작업. 그걸 제 입으로 털어놓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강준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타났다는 건 자신이 모르는 것까지 낱낱이 파헤쳤다는 의미였다. 그러고도 남을 남자였다. 매사에 무관심하지만 한 번 타깃을 정하면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는 남자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이 남자 앞에선 어차피 밑바닥까지 내보였잖아. 더 보일 밑바닥도 없잖아.

16564551561175.jpg“당연히 브리핑은 할 겁니다. 하지만 시간 되실 때 자료도 한 번 꼭 봐주세요.”

태연하게 말하는 입술과 달리 심장은 아릿했다. 지금 우린 정말 타인이 되어버려서. 당신의 눈빛은 차갑고 목소리는 다정하지 않아서. 이런 당신을 볼 자신이 없어서 떠나왔던 건데. 나에 대해 당신이 모르길 바랐던 건데. 그래서 서글프고 화가 났다. 그럴수록 세희는 더더욱 차분한 눈빛으로 매끄럽게 말했다.

16564551561175.jpg“제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증거 자료는 그 안에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절 믿기 힘드실 테니까요.”

세희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밤바다처럼 새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손끝은 차가워질망정 싱긋, 웃어 보였다. 단정하고 매끄러운 미소였다. *** 브리핑은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준은 어떤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차분하고 집요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세희에게 강준이 태연히 말했다.

16564551561151.jpg“주세희 씬 명함 안 줍니까?”

세희가 내민 명함을 받자마자 강준은 이만 일어나자는 말로 만남을 종료했다. 그런 강준을 세희는 붙잡는 대신 조용히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데스크 앞에서 서로 계산하겠다고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16564551561151.jpg“한 끼에 99,000원입니다. 나한테 본인의 능력이 아닌 식사로 로비하고 싶으면 세희 씨가 계산해도 되고.”

결국 강준이 계산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 뒤쪽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이 순간이 세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 어색했다. 무심하면서도 당당하게 성큼 걸음을 내딛는 강준과 달리 예민할 만큼 신경이 쓰였다. 걸을 때마다 닿을 듯 말 듯 한 팔과 손끝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체취가. 시야를 자꾸만 끌어당기는 완벽할 만큼 정교한 얼굴도. 그래서 일부러 조금 뒤처져서 걸으려고 하면 기가 막히게 걸음을 멈춘다. 그 긴장감이, 미묘한 침묵이, 세희의 숨통을 조였다. 얼른 이 순간이 끝났으면. 몇 젓가락 먹지 않은 음식들이 명치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서 넘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독하게 참으며 걸었다.

16564551561175.jpg“조심히 들어가세요.”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세희를 강준이 다시 불렀다.

16564551561151.jpg“주세희 씨.”

또 왜요. 돌아선 세희가 마지못해 바라보자 강준이 부드럽게 웃는다.

16564551561151.jpg“잠깐만 기다려봐요.”

거절해야 하는데, 그 부드러운 미소에 순간 멍해졌다. 그 사이 강준은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갔다.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16564551561175.jpg“대체 나랑 뭐 하자는 건데.”

지금 세희는 어디든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일할 때만큼은 서강준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한 달 후에 있을 주주총회 때문에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무리한 결과, 이번 주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강준과의 만남을 견뎌냈다. 30분 동안 극도로 긴장하고 신경이 곤두섰던 게 지금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갈 수가 없다. 지금 내겐 당신이 다른 이유로 절실하니까. 당신이 내 편이 되지 않으면, 사랑까지 버리고 택한 복수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버티자. 차에 도착한 강준이 뒷좌석 문을 여는 게 보였다.

16564551561175.jpg“차를 또 샀나.”

못 보던 차였다. 뭘 꺼내려는 듯 뒷좌석으로 몸을 숙이는 강준이 세희가 지켜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울렁거림에 두통까지 겹치자 눈을 감으며 세희는 쓰러지듯 벽에 등을 기댔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6564551561151.jpg“주세희 씨.”

나직한 부름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올망졸망하게 핀 연분홍빛의 자나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강준이 보였다.

16564551561151.jpg“받아요.”

16564551561175.jpg“…….”

16564551561151.jpg“안 받고 뭐 합니까.”

세희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하다못해 시야마저 흐려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차로 갈 때까지만. 딱 5분만 버티자, 제발. 세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16564551561175.jpg“이걸 왜 절 주세요?”

무심히 시선을 비튼 강준이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꽂았다.

16564551561151.jpg“오는 길에 봤는데 참 예쁘더라고.”

16564551561175.jpg“…….”

16564551561151.jpg“충동적으로 샀는데 줄 사람은 없고, 해서.”

16564551561175.jpg“…….”

16564551561151.jpg“별 의미 없으니 부담은 갖지 말아요.”

세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토록 아름다웠던 플라워 가든도 칙칙하고 예쁜지 모르겠다던 남자였다. 끝내 꽃다발을 받지 않는 세희의 품에 강준이 꽃다발을 안겼다.

16564551561151.jpg“버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얼떨결에 받아든 꽃다발에서 퍼진 농밀한 꽃향기가 콧속으로 훅 파고들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일까. 향기로워야 할 꽃내음이 비릿하게 느껴졌다. 울렁거림과 두통이 심해지면서 삐이 하고 귀에서 이명까지 들려왔다. 시야까지 핑그르르 돌자 얼굴의 핏기가 가셨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강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64551561151.jpg“주세희 씨, 괜찮아요?”

16564551561175.jpg“괜찮아요.”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은 세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방어하듯 손을 내밀었다. 강준이 다가올 것만 같아서. 또다시 못 볼 꼴을 보일 것만 같아서. 그래서 제발 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16564551561175.jpg“그러니까 제발 좀…….”

가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세희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던 몸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놀란 얼굴로 빠르게 손을 뻗는 강준이 보였다.

16564551561151.jpg“주세희!”

그게 세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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