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당신이 나를 보러 와주기를.2021.11.14.
메종 바는 예전부터 세희가 종종 이용하는 고급 바였다. 규모는 작지만 홀 없이 전부 룸으로 되어 있는 프라이빗함이 마음에 들었다.
“미안, 세희야. 갑자기 시간 된다고 오빠가 들이닥치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 장소 안 알려줬는데.”
주세희란 이름을 찾고 진경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진경은 혹을 달고 온 게 미안한 눈치였다. 괜찮다고 웃어주자 그제야 진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희야, 오빠랑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진경의 화장실행으로 널찍한 룸에 세희는 진우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예전이라면 편했을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했다. 진우는 살며시 눈치를 보듯 세희를 보았다.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는 모습이 마지막 봤을 때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그럼에도 좋았다. 정말 돌아와 줘서. 한다면 하고야 마는 세희의 성격을 알면서도 내심 불안했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그 남자는 매혹적이고 강렬한 수컷이었으니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세희도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치자 진우는 흠칫했지만 세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빤히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 아직 나에 대한 마음 정리 안 했나 봐.”
냉정해도 이렇게 냉정할 수가 없다. 난 대체 이런 애 어디가 좋다고 10년을 넘게……. 진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내 마음이 뭐 서랍장이냐? 정리해서 닫으면 되게? 좀 기다려 봐. 천천히 정리 중이니까.”
“오빠가 너무 드러내잖아. 마음 정리될 때까지 보지 않는 게 좋겠어. 진경이가 눈치라도 채면 우리 사이 불편해져.”
“10년 동안 모른 둔탱이가 퍽이나 눈치채겠다. 그리고 오늘은 그냥 오빠로서 너 얼굴 보러 온 거야.”
그런데도 세희가 표정을 풀지 않자, 진우는 발끈했다.
“야! 나도 너 정리하고 싶거든? 지독한 꼬맹이 뭐 어디가 예쁘다고, 이제 안 예뻐해 줄 거거든?”
“…….”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 좋다는 여자들이 서울 한 바퀴 돌 정도로 줄을 서. 나중에 꼬맹이 너 나 찬 거 땅을 치고……?”
차가웠던 세희의 표정이 이젠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기분 나쁘게. 오빠 진짜 인기 많다니까? 못 믿어?”
“그냥. 드디어 내가 아는 진우 오빠로 돌아온 것 같아서.”
그때 문이 열리고 진경이 들어왔다.
“뭐야, 댕댕이 아직도 안 갔어?”
“어쭈, 오빠한테 댕댕이라니.”
그때 진우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이 매니저임을 확인하자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난 진우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오늘 술값 이 카드로 계산해라, 동생아.”
“오라버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카드로 쇼핑하면 남매 연 끊을 각오도 하여라.”
“걱정 붙들어 매시죠, 전하!”
콧방귀를 낀 진우는 세희에게 살며시 귓속말을 했다.
“꼬맹아, 진경이가 내 카드 남발하지 않게 부탁 좀 하자.”
세희가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룸을 나오자마자 진우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아, 연기 배운 보람이 있네.”
다행스럽게도 주세희가 넘어와 주었다.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믿고, 예전의 김진우로 대해주고,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승자는 나라고, 아무개 씨.”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린 진우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세희의 사랑을 차지한 건 그 남자였다. 하지만 앞으로 주세희의 곁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진우는 만족스러웠다.
*** 방금 얘가 뭐라 그랬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는 진경에게 세희는 다시 담담히 말했다.
“내 남편, 진짜 사랑한다구.”
이복언니의 남편을? 이라는 말은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한마디가 세희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알기에. 침을 꿀꺽 삼킨 진경은 조심히 물었다.
“그 남자도 널 사랑해?”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면 진경은 더더욱 이해가 안 됐다. 둘 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는 건지. 그건 영화나 소설에서만 나오는 이별의 핑계 아닌가?
“그 남자한테 비밀을 털어놓고 해결책을 함께 찾아볼 생각은 안 했어?”
진경의 질문에 세희가 차분히 눈을 맞춰왔다.
“사람의 감정은 변동성이 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해?”
그야 서로 사랑하니까. 하지만 진경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다.
“강준 씨가 날 받아들이면 다행이겠지. 방법을 모색해서 함께할 수 있겠지. 근데 아니면 난 모든 걸 잃게 돼. 내 복수도, 나를 향한 그 남자의 사랑까지도.”
세희도 강준에게 수도 없이 털어놓고 싶었다. 나의 비밀을, 내가 어떤 여자인지를. 그 모든 걸 알고도 강준은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는 그 상황을 난 감당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물었고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 난 감당 못 해.
“이번에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으니까. 강준 씨가 날 경멸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생 기억했으면 하니까.”
그만큼 강준을 너무 사랑했기에 세희는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진경과 눈을 맞추며 세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차라리 내가 흉내 낸 게 이복언니가 아닌 타인이었다면 욕심냈을지도 몰라. 근데 내 이복언니잖아. 언니 남편 뺏으면 더러운 거잖아.”
진경은 다시 한번 세희가 대단해 보였다. 사랑에 푹 빠진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때문에 강준 씨 이미지까지 더러워지면. 내가 뭐라고 그 사람한테 피해를 줘야 하는데. 나만 마음 접으면 아무도 아파하지 않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건데.”
“세희야.”
“잘난 척 다해도 나도 그냥 겁쟁이였던 거야.”
세희의 말간 얼굴에 번지는 자조적인 미소가 씁쓸했다. 주세희 네가 아프잖아. 지금도 아파하고 있잖아. 그 남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잖아. 진경은 세희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용기를 내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진경아, 나 잘한 거 맞지?”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세희가 묻는 순간, 목이 멨다. 저 작은 몸으로 모든 걸 감당하고, 원하는 건 차분히 이루어내는 친구를 존경했다. 하지만 진짜 너의 모습은 이랬구나. 이렇게 마음이 여리고 겁도 많았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늘 너에게 기대기만 하고 응석만 부렸구나. 그런 친구가 안쓰러웠고, 또 친구에게 미안했다.
“잘했어! 나였으면 울고불고 찌질하게 굴었을 텐데. 역시 나의 쭈야!”
그런 진경이 지금 세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잘했다고, 넌 여전히 최고라고.
“나도 찌질하고 이기주의적이야, 진경아.”
그럼에도 세희는 감히 바라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건 두려워했으면서. 당신이 나를 보러 와주기를. 예상대로라면 알리샤와 강준은 독일에서 만났을 것이다. 모든 걸 알게 된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날 경멸할까, 원망할까.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입안과 목구멍이 벌써 화했다. 심장이 아프도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가는 삼 주 동안 세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강준이 생각하는 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알리샤를 아내로서 평생 옆에 두고 원래 계획대로 복수하거나. 알리샤와 이혼 후 새로운 혼처를 찾거나 돌싱을 고수하거나. 전자든 후자든, 변함없는 진실은 남편은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 서강준이라 해도 별수 없겠지. 아니, 서강준이라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였다. 한신 그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고 강준은 한신 그룹의 간판이었다. 아직은 언론에서 공개되지 않고 신비주의를 고수하지만, 한신 후계자로 공식 발표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강준의 이미지가 곧 한신 그룹의 주가가 될 것이다. 그 모든 걸 알기에 세희는 강준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가짜 아내란 걸 알면서도 감싸주고 사랑해준 강준에게 고마웠다. 이런 나라도 사랑해줘서. 그럼 된 거다. 그런 남자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아름다운 추억을 가득 만들었으니까. 강 관장을 만나기로 한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널찍한 룸에 강 관장이 먼저 와 있었다.
“식사는 내가 시켜놨는데 괜찮지?”
네라고 대답한 세희는 강 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머스크 제안 거절했다면서? 사실이야?”
“네.”
“이유는?”
“세계적인 기업인 머스크를 상대하고 설득하는 것보다 유태령을 설득하는 게 더 쉬워서요. 어차피 전 대표직에 제 이름만 걸면 되니까.”
“그 애 고집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설득했어?”
어린 시절의 알리샤를 떠올리며 강 관장이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자 세희는 싱긋 웃었다.
“알리샤를 궁지까지 몰아준 이모 덕분이죠. 돈줄 끊어버리고 자유를 뺏으려고 하는 엄마 대신 돈을 주고 자유를 주겠다고 했거든요.”
“이노패션도 모자라서 모녀 사이도 갈라놓으려고? 세희 씨, 생각보다 지독하네.”
말과 달리 강 관장은 쌤통이라는 표정이었다. 세희는 잔잔히 웃으며 단정하게 말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어차피 둘 사이엔 모녀간의 정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뭐가 문제인지 말해 봐.”
“알리샤는 제 뜻대로 움직여줄 거예요. 하지만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완벽하게 방어하려면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세희는 자신 있었다. 알리샤는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고 자신을 이노패션을 이끌 새로운 전문 경영인으로 추천했다. 이미 주주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만한 서류를 발송한 상태였다. 도라 쇼핑몰의 대표라는 것, 그간 이노패션의 업적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 그걸 증명해준 건 알리샤였다. 이노패션을 살린 대담하고 획기적이었던 프로젝트는 도라 대표의 조언을 적극 수렴했다고 인정했고, 주고받은 메일까지 첨부했다. 그간 유태령으로서 조용히 물밑 작업을 해놓은 결과였다.
“이노패션 최대주주인 이모의 지분율이 35.68%예요. 그리고 강 관장님이 10.7%. 제가 5%. 강 관장님이 설득해주신 주주들 지분이 11%. 이모 지분보다 부족한 8.98%가 마음에 걸려요.”
경영 능력은 입증해 보였고. 주주총회에서 특별 배당금을 거론하면 다른 주주들도 세희를 지지할 것이다. 사장이 누가 되든, 어차피 주주들이 원하는 건 한가지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조 여사가 조용한 게 불안했다. 그게 뭘지, 일주일 내내 생각했다. 혹시 부족한 8.98%에서 예측 못 한 변수가 일어날 가능성까지.
“확인해보니 뒤늦게 이노패션 지분을 사들여서 14%를 보유한 주주가 있어요. 근데 신원 파악이 안 돼요. 혹시 그 사람이 이모의 사람이라면 전 이노패션 대표 이사가 될 수 없어요.”
걱정하는 세희와 달리 강 관장은 느긋했다. 복수 반 재미 반으로 세희의 손을 잡은 강 관장이니 그럴 만도 했다. 주추총회 날 복불복처럼 운에 맡겨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 주주 내가 아는 사람이야. 만나게 해주면 설득할 자신은 있어?”
역시 강 관장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세희는 물었다.
“그래 주실 수 있어요?”
“그럼, 나야 늘 세희 씨 편이고 망할 조 여사만 한 방 먹일 수만 있다면 뭘 못 하겠어. 안 그래도 세희 씨가 뭘 고민하는지 알 것 같아서 여기로 불렀는데.”
반가우면서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세희는 잠시 멍해졌다.
“지금요?”
“왜, 너무 갑작스러워서 자신 없어?”
“아니요! 할 수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나저나 올 때가 되었는데.”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강 관장이 느긋하게 일었다.
“1시까지 도착하기로 했으니까 잘 설득해 봐. 세희 씨 믿어도 되지?”
“네. 정말 감사해요, 관장님.”
강 관장이 어깨를 두드려 주고 나간 후, 세희는 고즈넉한 창밖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긴장한 걸 숨긴 채 태연히 의자에서 일어난 세희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직원의 뒤로 머리 하나는 더 솟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직원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제야 남자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좁혀왔다. 미묘한 긴장감이 도는 공간을 순식간에 압도한 남자는 세희의 앞에 섰다.
빛조차 함몰시킬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집요하게 세희를 응시했다. 그 짙은 눈빛에 몸 안에서 열이 오르고 심장이 뜨거워졌다. 회로가 끊긴 듯 머리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
“…….”
그런 세희와 달리 남자는 지독히도 여유로웠다. 바지 포켓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내려다보는 남자에게서 훅 끼치는 강렬한 체향. 공기를 가르며 무심히 날아드는 낮은 음성. 세희는 아득하면서도 저릿한 마음에 눈을 감아버렸다.
“반가워요, 주세희 씨.”
익숙한 그 음성이 정중하지만 다정하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