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워낙 야무지셔야지.2021.11.11.
강준은 인정하기로 했다. 주세희가 알리샤를 꽤 잘 가르쳐놓았다는 걸. 속눈썹을 내리뜨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은 어설프게나마 닮긴 했으니까. 하지만 아내만의 단정한 분위기, 고요함이 느껴지는 정적인 행동. 그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섬뜩할 만큼 차가운 강준의 눈빛에 달달 떨리는 입술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무슨 소리를…….”
“거짓말할 거면 차라리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겁니다.”
차가워진 눈을 가늘게 뜨며 강준은 천천히 그 이름을 불렀다.
“알리샤 바튼.”
이름에 반응하듯 여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묻죠. 주세희, 어디 있어요?”
얄팍한 몸을 가늘게 떨며 알리샤가 절박한 눈으로 말했다.
“난…… 말할 수 없어요.”
하긴, 주세희라면 철저히 대비해놓고 갔을 것이다. 워낙 야무지셔야지. 자신도 손안에 넣고 흔든 여자인데 알리샤는 너무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그런 독한 부분도 사랑스러워서 짜증이 날 정도지만. 옅은 한숨을 내쉰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한국으로 돌아갈 거니 짐 싸요.”
“……?”
“당신이 한국에서 해줄 일이 있으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객실을 나온 강준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강하는 숫자를 보던 강준은 픽, 웃어 버렸다.
“……보기 좋게 걸려들었군.”
완벽하게 걸려들었고 속아 넘어갔다.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사람 미치게 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예쁘게 웃어주는 주세희에게. 아내에겐 이별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일 뿐이었는데. 아내가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아기를 선물해줘요.’
그랬다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 말을 했던 아내의 진짜 저의가 궁금해졌다. 넌 우리의 아이가 갖고 싶긴 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날 안심시키려는 계획의 일부였던 건지. 그 한마디에 행복해하며 안심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하지만 호되게 뒤통수를 맞고도 아내의 사랑을 의심하진 않았다.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만큼 멍청하진 않으니까. 원망을 안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밉지는 않았다. 네가 내게 사랑이듯, 너에게 나도 사랑인 걸 아니까. 우리 둘 다 사랑이니까. 그걸 알기에 더더욱 느껴지는 절망감과 패배감이 컸다. 사랑하는데 왜 날 끝까지 못 믿어. 도대체 뭐가 두렵고 무서워서.
*** 가양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미자는 화순 시골집으로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세희는 귀국하자마자 화순으로 내려왔다. 손녀와 4년 만의 만남인데도 미자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하지만 밥상 위엔 상다리가 부러지게 손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 터질 것 같아.”
세 그릇을 비운 후 더는 못 먹겠다는 세희가 수저를 놓자 그제야 미자는 밥상을 치웠다. 그리고 또다시 마당으로 나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 미자의 뒤를 진돗개 믹스견인 백구가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마루 위에 무릎을 접고 앉은 세희는 미자에게 투덜거렸다.
“할머닌 왜 좋은 집 놔두고 여기 산다고 고집부려. 할머니 손녀 부자인 거 언제쯤 알아줄 건데.”
“네가 부자지, 내가 부자여?”
무뚝뚝한 미자의 서운한 소리에 세희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내 돈이 할머니 돈이고 할머니 돈이 내 돈이지! 그리고 나한테 할머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래?”
“그러니까 하나 만들어 데려오랬잖아. 덩치 크고 조용하고 일 잘하는 곰같이 묵직한 사내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기생오라비 같은 놈은 절대 안 되고.”
미자가 말하는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누군지 세희는 알 것 같았다. 최초의 원인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 된 존재. 바로 유영국.
“결혼 안 한다고 몇 번 말해. 그리고 나 곰 같은 남자 안 좋아하거든?”
“시끄러워! 어디 할 말이 없어서 할미 앞에서 노처녀로 늙어 죽겠단 소릴 해!”
예전처럼 대화는 하지만 미자는 손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가슴에 한이 맺힐 만큼 미안해서였다. 손녀딸이 저 때문에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모를 찾아가 비굴하게 굴었다는 걸 알기에. 얼마 안 남은 늙은 목숨 뭐 중하다고. 지난날 자신의 과오가 손녀딸에게 고스란히 간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해준 거라곤 밥 세 끼 주는 것과 늦은 밤, 옆에 같이 자준 게 전부인데. 하지만 손녀딸은 너무도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그래서 더 미안한 미자였다. 마루에서 내려온 세희가 뒤에서 미자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나랑 서울집에서 같이 살면 안 돼? 혼자 있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나 사지 멀쩡해. 약도 이만큼 받아왔는데 뭔 걱정이야. 네가 옆집에다 돈 주고 스파이까지 심어놨드만.”
“만호 할아버지가 먼저 나한테 할머니 돌봐주신다고 한 거야. 고마워서 달마다 용돈 좀 드리는 게 뭐 어때서.”
옆집 만호 할아버지는 8살 연상의 미자를 좋아했다. 내가 날마다 확인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만호 할아버지에게 고마웠다. 그래서 달마다 용돈을 부쳐주기로 한 것이다. 거절하는 걸 두 분이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요긴하게 쓰시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백구한테 핸드폰을 쥐여주고 통화할 순 없잖아. 얘는 말도 못 하는데.”
제 이름이 나오자 백구가 귀를 쫑긋 세우고 세희를 보았다.
“두 달에 한 번은 서울 올라와요. 내가 좋은 거 잔뜩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줄게.”
“네가 내려와. 나이 든 할미 오라 가라 하지 말고.”
내 속도 몰라주고. 괜히 서운해서 입을 삐죽거리는 세희를 등지며 미자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내려와야 너 좋아하는 반찬들로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줄 거 아냐. 담에 내려오면 꽤 자랐을 테니 키운 상추랑 고추랑 깻잎 뜯어서 솥에다 돼지고기 구워주마.”
만호 할아버지 말이, 미자는 내려오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밭에 씨부터 심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세희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지 않았는데. 다 서강준 당신 때문이야. 눈을 감고, 어디에 있고, 뭘 보고 있어도. 온통 그 남자로 가득했고 그 남자가 있었다.
“나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게요.”
집을 나서는 세희의 눈가가 붉었다. ***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고급 승용차에 올라탄 알리샤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자신은 뒷좌석에 편히 앉고 알리샤에겐 볼품없이 조수석에 앉으라고 한 것이다.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화를 낼 수 없었다. 동시에 이 남잘 포기한 게 백 번 천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긴 건 끝내주는데 그 속엔 악마가 수십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바라보는 눈빛도, 표정도, 말투도. 한기가 들 만큼 섬뜩하게 차가워서 어깨가 절로 곱아들었다. 문득 호텔에서의 만남이 떠올랐다. 주세희가 언질을 준 덕에 강준이 찾아올 건 알고 있었다. 한 달이란 시간은 짧으면서도 길었고 여자의 변신은 무죄니까. 잘하면 속일 수 있다 생각했고 강준의 비서실장이 알아채지 못해서 안심했다. 그런데 악마 같은 남자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주세희, 어딨냐고.’
차분하고 나직한 음성과 달리 그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칼날처럼 휘둘렀다. 시치미를 뗄 때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였다. 강준이 나간 후 확 도망가버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도망갈 곳도 없고 생활할 돈도 없었다. 지금 알리샤에게 선택지는 두 개였다. 평생 엄마의 꼭두각시로 숨 막히게 사느냐. 잠깐 참고 20억 가지고 알뜰살뜰 자유로운 삶을 사느냐. 알리샤에게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 할 게 있었고 그러려면 돈과 자유가 필요했다. 악마 같은 이 남자가 돈을 줄 리는 없고, 돈을 마련하려면 세희의 요구조건을 들어줘야 했다.
‘스스로 이노패션 대표직에서 물러나. 그리고 전문 경영인을 두겠다 선언하고 날 추천해. 대표자 될 자격을 증빙할 자료는 내가 준비해놨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영악한 계집애였다. 주세희란 이름으로 이노패션 사장이 될 생각을 하다니. 엄마가 최대주주인데 어떡할 거냐고 묻자 주주들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강준 씨가 찾아올 거야.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강준 씨가 원하는 대로 해줘.’
두 번째 요구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정말 서강준이 복수를 마음먹고 날 옆에 평생 두면 어쩌지. 하지만 알리샤의 걱정은 호텔에 도착한 순간 사라졌다.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고 문 입구에 선 채 강준이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두 달 정도 지내요. 이노 쪽엔 알아서 대처 잘 하고.”
알리샤는 사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날 왜 여기 데려왔는지, 원하는 게 뭔지. 왜 두 달인지,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뻔뻔하게 위자료를 바라진 않을 테고.”
가늘게 뜬 눈매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칼날처럼 날을 세운다.
“협의이혼보다 조정 이혼이 처리가 빠르다니 그렇게 진행하려고 하는데. 이의 있습니까?”
정중하게 묻는 건데도 협박처럼 들려왔다. 알리샤는 우아하고 정중한 매너를 두른 이 남자가 송곳니를 곤두세운 수컷처럼 느껴졌다. 여차하면 갈기갈기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것처럼. 갑자기 경수가 미치게 보고 싶어졌다. 늘 다정하고 부드럽고 배려해주고 자신밖에 모르던 남자가. 하지만 풍기는 위압감이 살벌해서 절로 대답이 나왔다.
“……아니요.”
결혼이란 올가미로 복수를 안 한다는 것에 우선 안심이었다. 알리샤의 속을 꿰뚫듯, 강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동생 경수에 대한 복수심을 접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복수를 접겠다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알리샤의 머리 위로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니까 알리샤.”
고저 없는 나직한 음성이 예리한 칼날처럼 고막과 심장에 푹, 박혔다.
“주세희에게 고마워하세요.”
그대로 얼어붙은 일리샤를 두고 강준은 몸을 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 집에 들어간 순간, 강준은 알았다. 어떤 것에도 미련 없다는 것처럼 주세희는 모든 걸 두고 떠났다는 걸. 아, 챙겨간 게 있긴 했다. 자신이 선물로 주었던 브리프케이스, 그리고 김 비서. 며칠 후 김 비서에게 전화를 한 강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탁이란 걸 했다. 만나려는 건 아니고 멀리서 얼굴 한 번만 보고 싶은데 언제가 적당하겠냐고. 처음에 안 된다고 했지만 사람을 붙여서 알아내겠다는 말에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정말 딱 한 번만이에요, 사장님. 이것도 배신인데, 저희 보스가 사랑하시는 사장님이니까. 제 맘 아시죠?’
그렇게 알아낸 주세희의 스케줄이었다. 청담동 어느 건물의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시동을 끈 강준은 그대로 차에 있었다. 김 비서에게 약속한 대로 주세희의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냥 궁금했다. 그렇게 혼자 이별 준비를 하고 떠나서 잘 지내고 있는지. 충격은 컸지만, 삶의 질서가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스케줄을 소화했고 주세희가 없는 삶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단지 눈을 감고 뜰 때마다 사방이 온통 주세희인 것뿐. 또다시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일상이 고요해진 것뿐. 환히 빛나던 세상이 그저 색을 조금 잃었을 뿐. 주세희에게 미쳐 있었던 정도를 생각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그때 주차장으로 강렬한 레드컬러의 페라리 로마가 들어왔다. 한 번에 주차에 성공한 차의 운전석에서 젊은 여자가 내렸다. 간편한 티셔츠에 청스키니를 입은 여자는 뒷모습만으로도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선이 고운 가녀린 뒷모습, 쭉 뻗은 각선미, 허리선에서 찰랑거리는 새까만 머리칼. 집요한 시선을 느낀 걸까. 여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선팅이 짙어서 여자는 운전석에 앉은 강준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준은 주세희를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원래 저런 스타일이었나.”
낮게 중얼거리며 강준은 가늘게 시야를 좁혔다. 화장기 없는 작고 새하얀 얼굴이 앳되면서도 여전히 단정했다. 분명 단아하고 반듯한 인상인데 서늘함이 감돌면서 새초롬한 느낌도 강하다. 기껏 열심히 먹여서 살찌워놨더니, 살이 다시 내려앉은 모습에 미간이 구겨졌다. 원해서 떠났으면서 살이 빠지긴 왜 빠져. 그때 주차장 입구에서 모자를 쓴 키가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세희야.”
아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남자가 김진우란 걸 안 순간, 강준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둘이 만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진경이랑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오빤 왜 따라 나왔어?”
다행스럽게도 차가운 세희의 음성에 강준은 정신을 차렸다. 곧이어 진우의 뒤에서 화려한 외향의 여자가 나타났다.
“꺄악, 주세희! 내가 사랑하는 나의 쭈!”
여자는 진우를 확 밀쳐내고선 세희를 와락 껴안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내려서 주세희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다시 주세희 앞에 당당히 서려면 이혼이 먼저였다. 주세희가 잘 지내고 있는 걸 봤으니. 셋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난 내가 할 일을 해야겠지.”
드디어 강준은 윤 실장이 주었던 서류봉투를 열었다. 너에 대해 샅샅이 알아야 다신 널 놓치지 않을 테니까. 지금껏 가지고 다니면서 보지 않았던 것. 주세희의 과거, 악착같이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이자 두려워했던 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