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주세희, 어딨냐고.2021.11.07.
강준과 통화를 끝낸 태령은 소파에 앉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정교하게 세공된 5캐럿 핑크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편이 유태령이 아닌 주세희에게 준 반지. 그런데도 가져갈 수 없는 것. 태령은 조용히 웃었다.
“딱히 챙길 게 없네.”
모두 제 것이 아닌 것들뿐이었다. 태령이 챙겨갈 건 강준에게 선물 받은 브리프 케이스가 전부였다. 이틀간 잠을 거의 안 자서 그런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기분이다. 안 잔 게 아니라 못 잔 거였다. 머릿속도 복잡했지만 늘 포근히 감싸주던 품과 온기가 없어서. 그 남자의 모든 게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어버려서. 태령은 시큰한 눈가를 손으로 누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축하해요, 내 아내가 된걸.’
‘남자로서 나, 감당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이혼할 일은 절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내 여자야.’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줄래요?’
‘주세희, 사랑이야.’
‘참 이상해. 왜 이렇게 두고 가기가 싫지.’
결혼식장에서 강준을 처음 본 순간부터 떠나기 전까지. 남편과 있었던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다가온 엔딩. 모든 걸 정리하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할 시간. 소파에서 일어난 태령은 브리프 케이스만 들고 평온한 표정으로 집안을 활보했다. 이 집에서 있었던 추억들을 하나씩 되살리고 기억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다다른 현관문 앞. 신발을 신고 나가면 이젠 끝인데. 왜 발이 떨어지지 않을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태령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돌아보았다. 아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별을 고했다.
“안녕, 3년간의 유태령.”
다시 돌아선 태령은 미련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이제 주세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독일에 도착한 세희와 알리샤는 베를린 샬로텐부르그 지역에 위치한 힐튼 호텔에서 지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예전의 자유를 누리려는 알리샤를 저지한 건 세희였다. 알리샤로선 네깟 게 뭔데 간섭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조 여사가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은 세희에게 경제권을 넘긴 것이다. 세희가 건넨 5캐럿 핑크색 다이아몬드 반지에 미약한 의지도 생겼다.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엄마. 여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완벽한 남편감에 최상위 1%인 시댁의 배경. 차라리 서강준을 꼬셔서 한신가의 작은 사모님이 되는 게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단순한 알리샤는 몰랐다. 세희가 자신의 그런 생각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것을. 독일에 도착한 후, 세희는 일부러 알리샤를 쉴 틈도 주지 않고 독하게 몰아붙였다. 한 달 동안 조 여사가 알리샤를 제대로 교육시켜 놓으라고 했다는 명목으로.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닫고 궁지에 내몰려야 제대로 된 대화가 될 테니까. 따라오는 흉내를 내던 알리샤가 폭발한 건 이 주째였다.
“더는 못 해! 내가 이딴 걸 왜 외워! 내조한다고 했다며, 근데 경영까지 왜 배워야 해!”
알리샤가 던져버린 프린트물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그걸 말없이 지켜보던 세희는 종이들이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워.”
“싫어! 안 주워! 네깟 게 뭐라고 감히 날 가르쳐!”
죽일 듯이 노려보는 커다란 눈동자는 앙칼졌지만 그럼에도 세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배우면 뭘 어쩔 건데. 이모한테서 벗어날 담도 없고 능력도 없고 뭐든 쥐뿔도 없으면서.”
일부러 독한 말을 골라서 했다. 불같은 알리샤가 폭발하도록.
“이혼당해서 이모한테 버림받으면 혼자 살아갈 생활력은, 모아놓은 돈은. 있긴 해?”
“그딴 거 안 배워도 서강준은 내 방식대로 알아서 꼬실 거야. 비밀도 다 아는데 독종 같은 너한테 넘어갈 정도면 얼마나 쉬울지 코웃음이 나오려 하네.”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거만하게 대답하는 알리샤를 태령은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비밀을 알고 나서 나한테 잘해주고 다정하게 군 거야. 그전까진 나도 계약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말한 거, 언니도 기억할 텐데.”
강준과 있었던 일을 알리샤에게 대략 말해주었지만 사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강준이 또 다른 복수를 위해 자신을 설득하려고 다정하게 굴고 잘해준 거라 설명했으니까.
“언니 말대로 그 사람은 독종인 나도 버티기 힘들었거든.”
알리샤는 다이아몬드 반지에 홀려 잊고 있던 게 드디어 떠올랐나 보다. 서강준이 어떤 남자인지.
“내 생각엔. 진짜 알리샤가 돌아온 걸 알면 그 성격에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눈에 띄게 파리해진 알리샤를 보며 세희는 얄미울 만큼 태연하게 물었다.
“다시 물을게. 서강준 씨 넘어오게 할 자신 정말 있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알리샤가 세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그러니까 너한테 서강준 양보했잖아! 애까지 임신해서 쭉 유태령으로 살라고! 너만 성공했으면 난 내 몫 받고 자유롭게 살고 있을 건데! 다 네 탓이라고!”
“…….”
“이젠 내가 왜 널 흉내 내야 하는데! 내 돈 돌려 줘, 돌려주라구! 아악!”
알리샤의 발악을 세희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 여사는 영악했다. 두 장의 서류를 건네기 전 유태령으로서 마지막 사인을 요구했다. 바로 이노 패션 주식을 처분하는 서류였다.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유일한 돈줄을 막아버려야 제 딸을 입맛대로 굴릴 수 있으니까. 그건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벼랑 끝까지 몰려야 알리샤를 제 편으로 끌어오기 쉬웠다. 조 여사에게 제대로 복수하려면 알리샤가 꼭 필요했으니까. 주변 물건들을 던지고 부수다 제풀에 지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알리샤는 주저앉아버렸다.
“흐윽, 난 그냥 알리샤로 살고 싶은 것뿐이라구. 이제 좀 자유롭게 내 맘대로 살고 싶다는데…… 흐윽! 왜 날 안 놔주는 거야.”
세희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알리샤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다 싫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도! 할아버지도! 엄마도! 아빠도! 그 남자도! 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세희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눈앞의 알리샤는 또 다른 조 여사의 피해자라는 걸. 자신은 조 여사 때문에 잡초처럼 살아남았고 독해졌고 강해졌다. 하지만 알리샤는 반대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조 여사의 손안에서 숨 쉬는 것까지 허락받으며 컸다. 어른이 된 지금도,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무능력하게.
“독한 년, 내 꼴 보니까 이제 속이 좀 시원하니? 엄마한테 못 한 복수, 나한테 하니까 좋냐고!”
알리샤는 한참 잘못 짚었다. 복수란 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렸을 땐 자신을 향한 조 여사의 증오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핏줄인데, 먹고사는 것조차도 힘든 할머니와 어린 내게 왜 이러는 건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될수록 깨달았다. 이해 따윈 필요 없다는 걸, 둘 중 하나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려야 끝날 악연이라는 걸. 사실 세희는 조 여사에게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내가 편하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한 발악이 점점 치밀해지고 계획적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가진 것들을 모두 산산조각내야 조 여사가 날 가만둘 테니까. 그게 복수의 이유였다. 흐느끼는 알리샤에게 다가간 태령은 무릎을 접고 눈을 맞추었다.
“언니 눈엔 아직도 내가 이모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
알리샤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져내린 지금이었다. 빈틈을 파고들어 설득할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
“복수할 타이밍을 노리려고 바짝 엎드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하나부터 열까지, 뭐든 스스로 혼자 해결하고 뭐든 감당해내는 독종. 알리샤에게 세희는 그런 이미지였고 그래서 겁을 먹었다. 그러고도 남을 애라는 생각이 들어서.
“20억이면 돼?”
세희의 물음에 알리샤는 멍한 표정이었다.
“이모 배신하고 내 편이 되어주는 대가. 하나 더 추가하면 이모한테서 벗어나 언니가 누릴 수 있는 자유까지.”
“장난해? 네가 그만한 돈이 어디 있다고.”
“나 돈 많아. 돈이야 계속 벌면 되는 거고. 그 정도 능력은 차고 넘치거든, 내가.”
눈물을 멈춘 알리샤의 눈이 도르르 굴러갔다. 네일숍에서 세희가 했던 말을 그제야 떠올리는 눈치였다. 도라몰의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
“왜 날 도와주려는 거야? 세희 넌 내가 밉지 않아?”
조심히 묻는 알리샤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지금껏 누구도 세희가 쓰고 있는 단정한 가면을 벗기지 못했다. 예측하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꽁꽁 숨긴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서강준만이 유일했다.
“언닐 돕는 게 아니라 날 도우려는 거야. 언니가 미울 땐 있었지만, 항상 밉진 않았고. 언니도 그랬을 것 같은데 아니야? 딱히 날 미워하지 않았잖아. 타고난 성격이 지랄 맞은 거지.”
“야! 너는 뭐 얼마나 성격 좋다고 그래? 너도 나 못지…….”
옅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세희는 알리샤의 말을 잘랐다.
“복수가 꼬리를 물면 피곤해져. 이모랑 나, 둘이서 끝낼 문제고 또 거기서 끊어져야 해.”
조 여사가 아니었다면 알리샤와는 마주칠 일 없이 영원히 남남처럼 지냈을 사이였다. 그렇게 세희는 알리샤와의 관계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알리샤에게 복수한다면, 그 후 얄리샤가 증오와 복수를 품고 혹시 아기를 낳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배 속에 혹시 강준이 준 선물이, 나의 아기가 있다면.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이 복수심과 증오심과 삭막한 감정을. 나 하나로 끝내고 싶어. 조 여사와 영국은 용서 못 해도, 알리샤는 용서해야 했다.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세희는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알리샤에게 물었다.
“지금 결정해. 내 편에 서서 돈 받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지, 이모 꼭두각시 노릇 평생 할지.”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것처럼. *** 미국에서 2주간의 일정을 마쳤다. 그 후 멕시코, 프랑스에서 스페인. 마지막 행선지인 독일에 오기까지 2주가 더 걸렸다. 그것도 서 회장이 전용기를 빌려준 덕에 비행기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건 아내를 만나러 가는 일뿐. 하루 일정을 아침에 즉흥적으로 짠다는 아내와 엇갈리는 일이 없도록 윤 실장을 먼저 호텔로 보냈다. 오늘 만나러 가겠다고 메일로 말해 줄 수 있었지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다. 늘 단정한 얼굴에 감정이 번지는 걸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마지막 일정을 끝내고 호텔로 직접 차를 몰며 강준은 윤 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20분이면 도착해요.”
아내의 위치를 파악하고 혹시 외출하려고 하면 잡아놓으라는 뜻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선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우선 아내와 느긋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겠지. 밤이 되면 술을 마시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생각이다. 가장 먼저 아내가 일을 관두려는 게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아내야 했다. 자의라면 아내의 뜻을 꺾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타의라면 일을 관두지 말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 후 설득할 생각이다. 남은 업무는 직원들에게 맡기고 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힐튼 호텔에 도착하자 로비 입구에 윤 실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직원에게 팁과 발레파킹 카드를 내민 후 강준을 따라온 윤 실장이 보고했다.
“사모님은 객실에 계십니다. 외출하시려는 거 사장님 오신다고 말씀드리고 잡아놨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도 윤 실장의 보고는 이어졌다.
“사모님이 살이 좀 많이 빠지시고 스타일까지 확 변하셔서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신 건 변함없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걸으며 강준은 아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깜짝 놀랄 만큼 변신해서 강준 씨 놀라게 해줄 수도 있구요. 그러니까 서운해도 한 달만 참아줘요.’
도대체 무슨 변신을 해서 놀라게 해주려는 건지. 문 앞에 다다르자 노크를 한 번 한 후, 윤 실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장담하는데 사장님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럼 사모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방 안으로 들어선 강준은 너른 거실을 눈으로 무심히 훑으며 걸음을 옮겼다. 눈부신 햇살이 투시되는 통창 앞에 아내가 단정한 자태로 서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선 강준은 가늘게 좁힌 눈매로 아내를 주시했다. 윤 실장의 말대로 살이 내려앉은 모습이 뒷모습에서도 느껴졌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은 건 헤어 스타일이었다. 푸른 기가 돌만큼 새까맸던 머리칼은 부드러운 갈색이었다. 탐스럽게 길었던 머리가 목선에서 찰랑거리는 걸 본 강준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머리 색은 그렇다 쳐도 머리는 물어보고 자르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긴 머리칼이 좋았다.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침대에서 제 얼굴과 머리칼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서. 단발머리도 예쁘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인기척에도 다가오는 기색이 없자 그제야 아내가 돌아섰다. 넓은 거실의 끝과 끝에 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
“…….”
밑으로 흘러내린 검은 눈동자가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에 닿았다. 다시 천천히 올라온 눈동자를 여자의 얼굴에 박고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앞에 멈추어 선 후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말도 안 되는 눈앞의 현실이 꿈이었으면 해서.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아내는 어디 있지.”
이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주세희, 어딨냐고.
아내가 사라졌다는 걸. 나의 주세희가…… 선녀의 날개옷을 입고 떠났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