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다가온 끝, 그리고 이별.2021.11.04.
펑펑 울 줄 알았는데.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서 숨조차 쉬기 힘들 줄 알았는데. 하지만 공항을 벗어난 태령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드디어 다가온 끝, 그리고 이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젯밤 김 기사가 미리 주차해 놓은 차에 오르며 태령은 조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강준 씨 공항에서 방금 마중해주고 왔어요. 아무 의심하지 않고 갔구요.”
태령의 말투는 여전히 공손하고 순종적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계약에서 벗어나기 전까진 완벽하게 엎드려줄 생각이니까.
“서류 두 장 준비해주시는 거 잊지 않으셨죠? 그거 안 받으면 저 독일 안 가요.”
가양 병원 임상센터에서 할머니의 약을 받을 수 있는 조영희 이사장의 날인이 된 서류. 그리고 이노패션 지분 5%를 양도한다는 서류. 그렇게 두 장. 조 여사의 입에서 독한 년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걸 태연히 듣고 침묵을 유지하자 드디어 알겠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태령은 차분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은 제 역할 알려주세요.”
조 여사와 통화를 끝낸 태령은 여전히 무감한 표정이었다. 시동만 걸었을 뿐, 앞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밝게 비추는 햇살에 눈이 아프다고 생각하며 태령은 중얼거렸다.
“해가 이렇게 눈부신데.”
내 시야는 왜 이렇게 어둡지. 칠흑 같은 어둠에 몸이 잠긴 것 같지. 기묘한 괴리감이 찾아와 태령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된 망막에 선명히 맺히는 환영은 남편이었다. 감은 눈꼬리 끝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 순간 태령은 깨달았다. 서강준이 나의 태양이었다는 걸. 그 태양이 오늘 떠났다는 걸.
*** 저녁 5시부터 연숙은 대문 앞을 찍는 CC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갑자기 태령에게서 저녁을 먹으러 와도 되냐는 연락을 받고 약속까지 취소한 터였다. 고급 승용차가 집 앞에 멈춘 순간, 연숙은 쏜살같이 뛰쳐나가 대문을 열었다. 막 벨을 누르려던 태령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태령은 생긋 웃으면서 연숙에게 살갑게 팔짱을 껴왔다.
“텔레파시 통했나 봐요. 어머니 보고 싶어서 최대한 일찍 끝내고 온 건데.”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연숙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세상에, 이래서 딸을 낳아야 하나 봐.”
힘들게 얻은 자식 하나가 하필 잘나도 너무 잘난 아들이었다. 틀에 박힌 자식 도리는 하지만 살가운 말 한마디 할지 모르는 감정 없는 인공지능. 세상에서 저 혼자 잘난 천상천하 유아독존. 재수 없을 만큼 잘난 아들을 둔 덕에 연숙은 이런 살가움에 약했다.
“얼른 들어가자, 아버님도 눈 빠지게 너 기다리고 계시니.”
연숙의 말과 달리 서 회장은 예리한 눈으로 태령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왜 그런가 싶어 시선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자 서 회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살이 더 빠졌으면 내가 그 녀석 혼쭐 내주려고 했는데. 아주 보기 좋구나. 그래도 강준이가 또 속 썩이면 할아비한테 당장 일러야 한다. 알았지?”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태령은 이 상황이 낯설면서 이해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생활고 때문에 늘 무뚝뚝했고 아버지에겐 외면당했다. 조 여사는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났고 이복언니인 알리샤는 무관심이었다. 그게 태령이 아는 가족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에게 이렇게 잘해줄까.
“어휴, 아버님. 태령이 배고프겠어요. 우리 밥부터 먹여요, 네?”
저녁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신기하게도 강준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 없이 정말 일상적인 대화였다. 자신이 며느리가 아닌 이 집 딸이라는 착각이 들 만큼. 저녁 식사를 한 후 서 회장은 급한 일 때문에 서재로 향했다. 연숙과 태령은 사이좋게 정원의 정자에 앉아 향긋한 차를 마셨다.
“갑자기 네가 밥 먹으러 온대서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아니?”
“죄송해요. 근데 시간이 오늘밖에 안 나서. 이틀 후에 독일로 한 달 정도 출장 가거든요.”
“그렇게나 길게?”
연숙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말대로 그 출장을 마지막으로 경영에서 물러나려구요. 20살부터 독일에 오래 머물러서 출장 겸 추억도 더듬으면서 여행처럼 다녀올까 해요. 갔다 와선 강준 씨 내조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구요.”
“혹시 조 여사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너 대신 만나볼까?”
“아니에요, 어머니. 저도 원해서 결정한 일이에요.”
잔잔히 웃는 태령의 얼굴이 진심 같아 연숙은 그제야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다시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해도 돼. 조 여사는 내가 막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 아니어도 아버님이나 강준이에게 말해도 되고. 다 네 편이니까.”
차를 마시느라 연숙은 미처 몰랐다. 단정히 내리깐 긴 속눈썹 아래 태령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주마다 네가 보내온 술 선물을 아버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아니? 약주는 세잔 이상 하지 말라는 예쁜 손편지 때문에 아버님이 딱 네가 보내온 술만 그 주에 마시고 더는 안 드신다니까?”
제주도에서의 만남 후, 태령은 서 회장에게 주마다 지역 특산물인 소주나 막걸리를 선물로 보내고 있었다.
“술을 줄이셨다니 다행이에요.”
그제야 태령은 계속 손에 들고 다니던 쇼핑백을 연숙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어머니 선물이에요. 직접 만나서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이제야 드려서 죄송해요.”
“세상에, 내 것도 준비했어?”
“별거 아니에요. 허브 오일 배합해서 만든 스프레이인데 효과가 괜찮아요.”
연숙이 쇼핑백 안에서 꺼낸 작은 케이스를 열었다. 두통, 불면증, 근육통, 코막힘, 스트레스. 예쁜 손글씨가 적힌 스티커가 붙은 스프레이 중 하나를 살며시 손목에 뿌려 본다.
“향이 너무 좋아! 정말 네가 다 만든 거니?”
정말 좋아하는 연숙을 보니 태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용기 내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예뻐해 준 연숙에게 기억에 남을 작별 선물을 주고 싶었으니까.
“난 너에게 뭐 해줄까, 말만 하렴!”
“강준 씨 어린 시절 이야기해주세요, 어머니.”
“이 귀한 선물을 고작 그런 걸로 때우자구?”
“저한텐 고작이 아닌 걸요.”
수줍게 말하는 태령의 얼굴을 연숙은 빤히 바라보았다. 이노 부회장 부부와의 식사 자리를 부탁하면서 강준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할 때까지 모른 척, 잘해주라고 당부했을 뿐. 연숙 또한 묻지 않았지만 내심 궁금하긴 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부회장 부부가 물건 취급하는 이유를.
“걔가 얼마나 재미없는 앤데. 듣기 지루할걸?”
“전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해주세요, 네?”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지만 연숙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살며시 붙어 앉아 연숙을 조르는 눈앞의 며느리가 연숙은 그저 예쁘다는 것. 모두가 완벽한 아들을 두었다고 연숙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연숙은 경이로울 만큼 완벽한 아들 때문에 엄마 노릇 한 번 못 해 봤다. 어른이 되어선 비혼주의까지 선언하는 아들을 연숙과 서 회장은 설득할 생각도 못 했다. 그 정도로 고집이 셌고 한번 마음먹은 건 기어이 해내는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결혼한 것도 모자라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 눈앞의 아이가 어떻게 예쁘지 않을까. 막돼먹은 며느리라도 눈물을 머금고 반겨야 할 판이었는데.
“우리 강준인 태어날 때 응애하고 울고 거의 운 적이 없어. 갓난아기일 때 진즉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사람이 아니라 뭐든 척척 잘하는 로봇을 낳았구나 하고 말이야.”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태령이 왠지 알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사실 연숙은 아들의 결혼을 공식 발표하는 날을 눈 빠지게 기다리며 벼르고 있었다. 쓸데가 없어서 갈수록 쌓여가는 돈을 며느리에게 어떻게 쏟아부을지. ***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강준의 일정은 아침부터 빡빡했다. 대통령의 방미 마지막 일정이 조지아주에 있는 한신의 전기자동차 공장 건설 현장 답사였다. 차질 없는 대통령의 방문을 위해 강준은 아침부터 조지아주로 향했다. 완공된 1공장과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2공장을 먼저 시찰한 후 전기차 사업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 후 조지아주 주지사를 만나 식사를 했다. 미국 유명 자동차 회사와 합작법인으로 조지아주에 설립한 이 공장에 주지사의 관심도 컸다. 3년 이내 4조 원의 투자를 약속한 후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가볍게 샤워를 한 강준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한국은 오후 3시 정도. 한참 일하고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준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들린 후,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준 씨?]
여전히 단정한 음성엔 놀란 기색도, 반가운 기색도 없었다. 전화한 사람 서운하게. 고작 떨어진 시간은 하루지만, 나만 그리워했던 것처럼.
“일하는 중?”
[아니요, 집에서 출장 갈 짐 싸고 있었어요.]
“해외 출장은 이틀 뒤 아니었나.”
[일정이 좀 당겨졌어요. 강준 씨 없을 때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빨리 돌아오죠.]
오늘 아침 받아본 아내의 일정표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
“혹시 내가 더 알아야 할 변동 사항 있어요?”
[아, 출장 일정이 일주일에서 한 달로 바뀌었어요.]
“……갑자기?”
강준의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만한 변동 사항을 아내는 태연히도 말했다.
[이노 브랜드가 독일 대형 쇼핑몰에만 입점하기로 했는데 사업이 좀 더 확장될 것 같아요. 독일 번화가 곳곳에 쇼룸도 내는 게 어떠냐는 안건이 전략팀에서 나와서. 독일 가는 김에 제가 직접 물망에 오른 장소도 둘러볼까 해요. 독일 여행 겸 업무 겸, 즐거운 마음으로요.]
강준은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치떴다. 자신은 스케줄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려고 안달 났는데. 정작 아내는 여행 겸 업무 겸 떠나는 독일 출장을 한 달로 늘렸다는 것에 대해. 미묘하게 가라앉는 침묵을 느꼈는지 아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출장이 제가 맡는 마지막 프로젝트예요. 독일 출장 끝내고 돌아오면 경영에서 물러나서 강준 씨 내조에 집중하려구요.]
“난 내 부인의 사랑을 원했지, 내조를 바란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강준 씨 마음 알아요. 근데 내가 일과 사랑을 동시에 못 할 것 같아서 스스로 선택한 것뿐이에요.]
아내의 말은 일 대신 강준을 선택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난 그 말이 기쁘지 않을까.
[깨끗하게 마음 정리하고 돌아와서 강준 씨만 바라보는 아내가 될게요. 깜짝 놀랄 만큼 변신해서 강준 씨 놀라게 해줄 수도 있구요. 그러니까 서운해도 한 달만 참아줘요.]
차분히 설득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기이할 만큼 침착했다. 눈앞에 있다면 아내의 눈빛과 표정을 읽어냈을 텐데.
“연락만 잘 받아줘요.”
태연히 말하지만 강준의 머릿속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연락 잘 못 받을 것 같아요. 시차도 있고 여럿이서 바쁘게 움직일 거라. 대신 메일은 확인할게요.]
주세희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듣고. 그럼 나보고 어떻게 버티라고. 하지만 알겠다고 통화를 끝낸 강준은 바로 윤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으음…… 네, 사장님.]
자다 깼는지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이왕 한국 뜬 거, 해외 일정 이참에 다 소화합시다. 단 삼 주는 넘지 않도록.”
차라리 아내가 없을 때 몰아서 가능한 해외 일정을 소화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장님이 갑자기 방문하면 지사나 공장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강준의 지시에 윤 실장은 잠이 확 깬 목소리였다.
“잘하고 있으면 오히려 내 방문을 고대하고 있을 겁니다.”
[사장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란 말은 강준의 낮은 음성에 차분히 묻혔다.
“내 개인 카드 한 번 더 주죠. 돌아가는 대로 윤 실장 업무 덜어줄 직속 비서 한 명 충원도 하고.”
확 구미 당기는 제안에 윤 실장은 잽싸게 목소리를 바꾸어 대답했다.
[내일 오후 중으로 조율해서 일정 보고드리겠습니다.]
“하나 더. 마지막 일정은 독일로 잡아요.”
[방문할 지사들 중 독일이 중간 위치입니다. 그럼 동선이 엉켜서 꼬박 하루를 비행기 이동 시간으로 날려야 하는데요?]
이봐, 벌써 머릿속으로 계산 끝났네. 죽는소리해도 시킨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윤 실장이었으니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강준은 말했다.
“마지막 일정은 아내와 함께 독일에서 마무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전화를 끊은 강준은 욕조 위에 팔을 걸친 채 정면을 응시했다. 통창 밑으로 깔린 워싱턴의 화려한 야경을 무감하게 눈에 담았다. 자꾸만 주세희가 제 품에서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쓸데없는 기우도, 의심도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미처 몰랐다. 뭔가 애매한, 가는 실 같은 불안함이 남아 있을 거라곤. 하지만 삼 주 후 말끔하게 사라질 불안함이라고 치부했다. 아내를 만나서 예쁜 눈을 바라보며 품에 안는 순간, 깨끗하게 사라져버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