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네가 못하면 내가 해.2021.10.31.
어디선가 흘러드는 달콤한 꽃향기에 홀리듯 눈을 뜬 강준은 피식, 웃어버렸다. 품에 안긴 아내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이젠 익숙하면서도 취할 것처럼 늘 향기로운 내 여자의 체취. 고개를 트니 살짝 벌어진 블라인드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푸르스름했다. 아내를 침대에 조심히 눕히고 강준은 상체를 반 정도 일으켰다. 새벽인데도 봄의 끝자락에 다다른 날씨는 꽤 따뜻했다. 하지만 강준은 이불을 아내의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나의 부인은 추위를 잘 타니까. 부드러운 눈빛이 잠이 든 아내의 얼굴에 닿았다. 평소엔 빈틈없이 단정하지만 밤엔 대담하게 굴어서 강준을 놀라게 한 여자였다. 그래놓고선 자는 모습은 세상 순수해 보이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이러니 내가 미치지.
“요마녀 같으니라고.”
작게 중얼거린 강준은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별장 밖으로 나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만큼 빠른 속도로 호수를 세 바퀴 돈 후 벤치에 털썩 앉았다. 물안개가 낀 호수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아름다운진 모르겠지만 아내는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여기 또 오고 싶어요.’
품에 안겨 아내가 달콤하게 속삭였던 말을 떠올리며 강준은 피식 웃었다.
“못 들어줄 것도 없지.”
국내외에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많지만 모두가 번화가에 위치한 빌딩이었다. 그러니 이참에 하나 사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로지 아내를 위해. 호수 근방 땅까지 사들여서 휴양지처럼 꾸며줘야겠다. 별장의 노후한 곳은 리모델링으로 갈아엎은 후 아내 명의로…….
“……이런.”
좁아진 미간에 희미한 짜증이 어렸다. 아내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해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였다. 유태령은 아내의 진짜 이름이 아니니까. 아내는 주세희란 이름을 되찾는 걸 두려워할 만한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해결할 능력이 남편에게 충분히 있는 걸 알면서도 털어놓지 않았다. 말 한마디면 난 널 위해 뭐든지 할 텐데.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강준도 더는 눈감아줄 수가 없다. 주세희란 이름을 되찾아야만 온전하게 내 여자가 될 테니까. 널 위해 내가 뭐든 해줄 테니까. 강준은 내일 당장 떠날 미국 출장을 마지막 기다림으로 정했다. 돌아온 후에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만약 그때도 아내가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면, 계획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강준의 느긋한 기다림을 깨버린 건 자신이 아닌 아내였다.
‘나에게 아기를 선물해줘요.’
어젯밤 아내가 던진 한마디의 파장은 굉장했다. 지금껏 느꼈던 불안함이, 쓸데없는 기우가, 깨끗하게 휘발되듯 사라졌다. 느긋하게 기다려주려 했던 마음까지도. 주세희란 이름은 이제 강준에게 선녀의 날개옷이 아니었다. 2세까지 생각하는 아내가 떠날 리 없으니까. 우리가 아닌 ‘나에게’라는 아내의 표현이 미미하게 거슬리긴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쓸데없는 기우고 의심이겠지. 강준은 천천히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주세희 네가 못하면 내가 해.”
네가 스스로 못 찾겠다면, 내가 그 이름을 찾아주는 수밖에. 별장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 여전히 아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강준은 아내의 옆에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고선 모로 누웠다.
“깨우고 싶은데.”
호수 세 바퀴를 돈 걸로는 어림도 없는 몸 안의 기운은 여전히 짐승이었다. 풀어주기만 하면 당장 날뛸 것처럼. 그래서 못 깨우겠다. 기절하듯 잠이 든 아내에게 달려들면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다를 게 없으니까. 하지만 살짝 만지는 건 괜찮겠지. 긴 속눈썹을 어루만지고 손등으로 매끄러운 뺨을 조심히 쓸어 본다. 그러다 홀리듯이 시선이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반듯하게 누운 덕에 가느다란 몸매가 얇은 시트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납작하기만 한 이 배가 부풀어 오르는 걸 지켜보는 건. 저 가느다란 몸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르는 걸 감상하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너무 좋아서 돌아버릴지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강준은 피식, 웃어버렸다.
“너무 앞섰지.”
임신이 쉬운 게 아닌데. 그걸 아는데도 강준의 실없는 웃음은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앙큼한 아내의 한마디가 강준의 가슴에 던진 작은 조약돌. 그 조약돌의 파장은 아무래도 꽤 오래갈 것 같았다. 허무한 상상이 현실이 될 때까지. *** 태령은 정오가 넘어서야 눈을 떴고 과일로 아침 겸 점심을 가볍게 해결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이 마지막이란 걸 알기에 입맛이 없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강준이 웃으면서 묻자 태령은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남은 시간에 뭘 해야 후회가 없을까, 미련이 없을까.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강준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보는 척도 안 하는 강준에게 태령이 보다 못해 말했다.
“받아봐요.”
“왠지 받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안 받아도 후회할 것 같은데요?”
태령의 차분한 대답에 강준은 피식 웃으면서 결국 전화를 받았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답만 몇 번 한 후 전화를 끊고 태령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함이 어린 눈빛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천천히 일어난 태령이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되는 거죠?”
너무 쿨한 반응에 강준이 살며시 눈썹을 구겼다.
“내가 미안한 상황인데 묘하게 서운해지려 하네.”
“사실 저도 같은 상황이거든요.”
“…….”
“업무용 핸드폰은 두고 왔지만, 못 참고 눈 뜨자마자 핸드폰으로 메일함 살짝 열어봤어요.”
“…….”
“기어이 업무용 핸드폰을 들고 온 당신이나, 못 참고 메일함을 열어본 나나. 참 닮았죠?”
“…….”
“우리 그냥 일하러 가요. 내일 폭탄 맞을 거 조금이라도 덜어보게요.”
태령이 생긋 웃으며 한 말에 결국 강준도 못 말리겠다는 듯 웃어버렸다.
“짐 챙겨올게요.”
천천히 돌아선 남편의 너른 등이 시야를 채우는 순간, 태령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랐다.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 난 메일 따위 확인하지 않았어. 당신과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3박 4일을 온전히 비웠어. 그걸 당신은 모르겠지만. 딱히 챙길 짐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바로 차에 올랐다. 멀어져가는 별장을 차 안에서 바라보는 태령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젠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 걸, 특히 남편과 올 일이 없을 걸 알기에. ***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달린 덕에 저녁이 되기 전 서울집에 도착했다. 집까지 같이 들어오긴 했지만 강준은 바로 나가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태령은 현관 로비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강준에게 말했다.
“잘 다녀와요.”
평소라면 미련 없이 돌아서서 나갈 남자다. 그런데 오늘은 돌아서는 대신 태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말 하면 집착남 같아서 별로인 거 아는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강준이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참 떨어지기 싫네. 부인 두고 전쟁 나가는 남자들이 이런 기분일까.”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태령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야말로 당신을 보내기 싫다고 말할 것 같아서. 이 순간을 견뎌내야 해. 그래야만 해. 호흡을 고른 태령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천천히 눈을 들었다.
“강준 씨 올 때까지, 집에서 안 자고 기다릴게요.”
“…….”
“그러니까 안심하고 다녀와요.”
한숨 같은 웃음을 낮게 흘린 강준이 다가와 태령을 품에 안았다. 입술을 뺀 태령의 얼굴 곳곳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장난 같은 그 입맞춤에도 몸 안에서 미지근한 열감이 번진다. ……어떡해, 당신이 너무 좋아. 주먹을 꼭 쥐며 태령은 버티고 버텼다. 발뒤꿈치를 들고 단단한 목을 끌어안고 키스하지 않으려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위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후 강준이 허리를 세웠다. 그러고선 마지막엔 눈을 깊숙이 맞췄다. 부드럽고 다정한 눈이었다.
“키스하면 나갈 자신이 없어서.”
태령은 대답 대신 손으로 단단한 가슴을 살며시 밀어냈다.
“이젠 정말 가요.”
“냉정하네. 그냥 재껴 버릴까 고민 중이었는데.”
서운함이 진득한 중얼거림에 태령은 웃으면서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 정신 차리고 있어야죠.”
넓은 어깨를 으쓱한 후에야 강준은 마지못해 돌아서서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점점 좁아지는 문 너머로 우뚝 서 있는 강준이 보였다. 먼저 돌아서 주길 바랐건만. 응시해오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태령을 칭칭 옭아맸다. 작은 틈 사이로 점점 사라지는 강준을 보며 태령은 문을 닫았다. 한참 후에야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태령은 문에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 강준은 새벽 2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거실에서 자지 않고 기다리던 태령을 보고 놀란 눈이다. 그럼에도 먼저 들어가서 자지 그랬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녀왔다고 인사를 건넸고 부드럽게 입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강준은 얌전하게 태령을 품에 안고 잠만 잤다.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는 강준을 따라 태령도 같이 일어났다. 계속 괜찮다고 하면서도 강준은 태령의 손을 잡고 주차장을 내려왔다. 잘 때 얌전하다 했더니, 뒷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야한 어흥이의 손은 가만있질 못했다. 가끔 너무 과하게 손을 움직여서 태령에게 손등도 몇 번 맞았다. 앞 좌석에 앉은 운전기사와 윤 실장의 눈치가 보여 태령은 눈을 흘겼다. 그럴 때면 매혹적인 눈웃음을 살살 흘리니 화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공항. 공항에 손을 꼭 잡고 나란히 들어서며 강준이 태령에게 말했다.
“마중 안 해줘도 된다니까.”
말과 달리 강준은 웃고 있었다. 태령이 공항까지 따라와 줘서 좋아죽겠다는 듯. 드넓었던 공항이 오늘은 왜 이렇게 좁은 건지, 전용 게이트 앞에 금방 도착했다. 드디어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대통령과 기업인으로서 동행하는 거였다. 강준의 어깨를 짓누르는 정치적인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 남잔 잘하겠지. 뭐든 못 하는 게 없는 남자니까. 날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날 잊는 것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애틋했지만, 작별 인사는 담백했다.
“잘 다녀올게요, 부인.”
“좋은 성과 내고 돌아오길 바랄게요.”
천천히 돌아서는 강준에게서 태령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강준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 당신과의 마지막인 걸 알기에. 그때였다. 게이트 입구에서 사라졌던 강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태령의 앞에 섰다.
“한 번만 안아봅시다.”
태령을 와락 껴안고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참 이상해. 왜 이렇게 두고 가기가 싫지.”
“…….”
“발이 안 떨어져.”
이번만큼은 강준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얌전하게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그러니 잘 다녀오라고. 대답 대신 팔로 다 감싸지지 않는 너른 등을 꼭 끌어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장님, 들어가셔야 합니다.”
뒤에서 은근히 재촉하는 윤 실장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강준은 긴 한숨을 흘리며 마지못해 태령을 품에서 놔주었다. 입술 대신 긴 손가락이 다가와 태령의 도톰한 입술을 어루만졌다.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다정하면서도 애틋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이 남자의 마지막 눈빛을 태령은 길게 각인했다.
“윤 실장님이 나 미워하겠어요, 이만 가요. 네?”
“이번엔 먼저 돌아서요. 내가 뒷모습 봐줄 테니.”
“…….”
“부인이 뒤에 있으니 도저히 발이 안 떨어져서 그래요.”
가슴 안에서 뜨거운 물이 왈칵 치솟았다. 그 물이 기어이 솟아올라 눈에 다다랐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며 독하게 참아냈다. 당신을 떠나기 전까지 난 울지 않아. 마지막까지 웃어 줄 거야. 예쁘게, 그리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도록. 강준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태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 먼저 갈게요.”
천천히 돌아서며 가슴 안에서 속삭였다. 괜찮아, 잘했어. 이 순간조차,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걸 태령은 독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 전용기에 오르자마자 강준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헤어진 지 십 분도 안 되었는데 아내가 보고 싶었다. 사람이 이 정도로 미칠 수 있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번 출장이 끝나면 일 다 때려치우고 백수한다고 선언할까. 하지만 이내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피식 웃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워커홀릭에 능력까지 있는 아내에게 백수 남편이 어떻게 비칠지 뻔히 보여서. 그때 윤 실장이 봉인된 서류 봉투를 조심히 건넸다.
“주세희란 이름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히지 않은 봉투 안에 뭐가 들었을지 안다. 김진우의 과거. 정확히는 주세희의 모든 것. 하지만 아내에게 마지막 기회를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남자로서. 강준은 다시 윤 실장에게 봉투를 건넸다.
“보관해두세요.”
“확인 안 해보십니까?”
강준은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보고 싶지 않네요.”
내심 바랐다. 이 서류 봉투를 제 손으로 뜯어볼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