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나에게 아기를 선물해줘요.2021.10.28.
“조립하는 거 내가 해볼게요.”
태령의 말에 강준이 정색했다.
“부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마요.”
손 하나 까딱한 것도 모자라 움직이게 만든 게 누군데.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으며 태령은 남편의 옆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음…… 내 남편 자존심은 부인인 내가 지켜야 하니까?”
어르듯 달래듯 부드러운 말투에 결국 강준이 졌다는 듯 웃으며 화로대를 넘겨주었다. 문득 기분이 묘해진 태령은 강준을 빤히 보았다. 바늘의 첨단도 뚫지 못할 만큼 완벽하던 이 남자가 자신에게 보이는 유순함이.
“왜 그렇게 봐요?”
“고마워서요.”
“뭐가?”
그냥, 날 사랑해줘서요. 차마 할 수 없는 말 대신 태령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남편 자존심 지켜주는 착한 부인 되게 해줘서.”
“고마우면 스킨십 허락해주든지.”
“……이러니까 스킨십 금지라구요.”
눈을 흘기며 태령이 작게 중얼거리자 강준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태령도 결국 같이 웃었다. 그냥 다 좋았다. 이 순간이, 이 분위기가, 이 감정이, 이 남자가.
“나 이런 거 잘해요. 어렸을 때 취미였거든요.”
웃음을 멈춘 태령은 핸드폰으로 화로대 모델 먼저 검색했다. 설치방법부터 검색한 후 머릿속에 방법과 순서를 입력했다. 사실 태령은 조립이나 설치에 능숙한 편이었다. 본의 아니게 어렸을 적부터 늘 혼자였고 뭐든 혼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불이 꺼지면 덜덜 떨면서 버텼고, 무언가 고장이 나도 며칠 또는 몇 달을 그대로 뒀다.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할머니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어떻게든 알아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혹독한 환경에서 강하게 큰 게 커서는 유용할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짠.”
능숙하게 화로대를 조립하고 그릴을 올리고 숯불까지 피우자 강준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감탄이라기보단 새삼 반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시 한번 반한 순간이기도 했다. 태령은 잘생긴 허당인 귀여운 남편에게. 강준은 장비를 능숙하게 다루는 멋진 아내에게. 가만히 있기 멋쩍었는지 강준이 다시 분주해졌다.
“맛있는 점심 해줄게요.”
“메뉴가 뭐예요?”
“캠핑엔 삼겹살이랑 된장찌개가 최고라던데.”
이것저것 뒤지고 들쑤시고 다니는 강준의 모습이 또 헤매는 듯했다. 너무 당당해서 티가 안 날 뿐. 그럼에도 태령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이 남자의 허당미가 귀엽고 엉뚱해서. 생수를 채운 냄비에 강준이 야채를 통째로 투하했다. 당연히 물이 튀었고 결벽증인 강준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강준 대신 준비해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는 제 할 일을 충실히 했다. 도마와 칼도 있었으니까. 된장 한 통이 통째로 냄비에 투하되기 직전, 태령은 다시 일어났다. 생매장당한 야채를 얼른 집게로 회수해서 접시에 올렸다. 꽤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강준에게 태령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요리까지만 내가 할게요.”
“이러면 내가 너무 한량 같잖아요. 세희 씨 부려먹으려고 데려온 것도 같고.”
“누구 일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상황에 따라 서로가 잘하는 걸 최선을 다하면 되지.”
“상황에 맞게, 서로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겁니까?”
느긋하게 되묻는 강준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네. 난 내가 잘하는 걸, 강준 씬 강준 씨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돼요.”
하지만 야채를 자르느라 미처 보지 못한 태령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무심코 고개를 튼 태령은 흠칫, 했다. 강준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귀염성이 넘치던 허당 어흥이는 어딜 가고. 농밀한 페로몬을 풍기는 야한 어흥이가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그럼 주세희의 야한 어흥이는, 밤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건가?”
“아니요! 절대 안 돼요!”
반사적으로 나온 태령의 빠른 거절에 강준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태령은 말끝을 흐렸다. 정말 싫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라고 할 수도 없잖아. 입술을 깨물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태령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적당히요.”
훌륭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하며 태령은 다시 야채를 썰었다. 그 이후는 평화로웠다. 태령이 요리를 주도했고 강준은 보조로 쿨하게 물러났다. 뭐든 태령이 시작하면 당연히 뒤처리는 강준의 몫이었다. 태령이 도우려고 하자 이번엔 강준이 만류했다. 서로가 잘하는 걸 하자고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그래서 태령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깔끔한 성격 탓에 치우는 건 강준이 더 잘했으니까.
*** 숲을 거닐었고 음악을 들었다. 계곡 밑으로 내려가 보기도 했고, 작은 산짐승을 찾아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 선선한 바람이, 서늘한 공기가, 풋풋한 풀과 나무 냄새가 좋았다. 태령이 테이블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동안 강준은 차 뒤쪽에 공간을 마련했다. 담요를 깔고 벽에 조명을 두르고 랜턴으로 빛을 밝혔다. 여기로 오라고 손짓하는 강준에게 다가가며 태령이 물었다.
“이런 것도 준비했어요?”
“어두워지면 이렇게 하는 게 분위기 있다고 적혀 있어서.”
“어디에요?”
“캠핑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차박 캠핑 보고서에. 좋은 예시들이 많더라고.”
번쩍 안아 차 뒤에 앉혀주는 강준의 목에 팔을 두르며 태령은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요, 평생 잊지 못할 멋진 여행을 준비해줘서.”
이렇게 갑자기? 가늘게 뜨는 강준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강준 씨 많이 바빴잖아요. 그런데 약속 지켜줘서 솔직히 놀랐어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전문가한테 맡겼고 난 그냥 선택한 것뿐인데.”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신경 써 준 건 강준 씨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텐 다 강준 씨가 한 거예요.”
태령의 진지한 표정에 강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강준이 이 여행을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준비하고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근사한 호텔에서 시작하지 않은, 태령에겐 완벽한 취향 저격인 이 여행이 그 증거였다. 좁은 공간이지만 두 사람은 꼭 붙어서 어둠이 내려앉은 숲을 눈에 담았다.
“왜 사람들이 캠핑에 빠지는지 알 것 같아요.”
작게 중얼거리며 태령은 강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 몸을 포옥 감싸는 강인한 팔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남자를 놓고 싶지 않아. 계속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욕심이 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가진 게 너무 많아 잃을 게 많은 남자였다. 모든 진실을 알고도 끝까지 당신은 날 선택해줄까. 더럽게 생각하지 않고 변함없이 날 사랑해줄까. 차라리 연애라면 이렇게 어렵진 않을 텐데. 천천히 눈을 뜨며 태령은 강준에게 물었다.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이요.”
“그 막장 영화?”
태령은 쓰게 웃었다. 강준의 입에서 막장이란 소리가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우리도 막장인 관계인데.
“만약 쌍둥이 동생이랑 그 남자가 정말 사랑한 거라면. 두 사람의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끝나도 됐을 것 같아요. 강준 씬 어떻게 생각해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왜요? 너무 더러운 막장이라서요?”
“영화에 굳이 감정 이입할 필요 없으니까. 내 부인도 그랬으면 하고.”
내려다보는 강준의 눈동자가 깊었다. 왜 그렇게 그 영화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원래 여자들이 감성적이고 감정 이입하는 거 좋아해요. 그래서 로맨스물 좋아하는 거구요.”
“…….”
“그래서 강준 씨 생각이 궁금해요.”
사실 태령은 로맨스물을 가장 싫어했다.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강준의 생각은 꼭 알고 싶었다. 그 상황을 이 남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1%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사랑이 면죄부는 아니지 않나.”
느리게 흘러나온 나직한 음성이 천천히 태령의 귀로 내려앉았다.
“사랑은 사랑이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
감정이입은 조금도 안 된 지극히 객관적인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태령은 심장을 세차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랑이라서. 지금껏 남편을 욕심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킨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강준의 말대로 사랑은 모든 것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걸. 더러운 건 더러운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당신과 나처럼.
“감당 못 할 거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고.”
강준의 말이 맞다. 감당 못 할 거면 애초에 시작도 말았어야 했는데. 들이닥친 현실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홀가분했다. 진득한 미련이 이제야 정리가 된 기분이었다. 태령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랑은 면죄부가 아니니까.”
자신이 떠난 후 강준은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태령의 바람대로 이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겠지. 이혼에 얽힌 추악한 진실은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임이 분명하지만 남편이 자신을 찾을 확률도 희박할 것이다. 당신이 차라리 평범한 남자였더라면 희망을 걸어볼 텐데. 하지만 서강준은 한신의 미래이자 대한민국 기업의 미래였다. 그 미래를 지키려면 태령 자신은 조용히 묻혀야 할 존재였다. 강준 또한 사랑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태령은 강준의 품으로 더더욱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이번 여행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이게 정말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란 걸 당신은 모르겠지. 그래서 태령에겐 서글픈 만큼 완벽한 여행이었다. *** 여행의 마지막 날. 두 사람은 하루종일 별장에 머물렀다. 영화를 한 편 보았고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고, 손을 잡고 호수를 거닐었다. 강준에게 태령은 많이 웃어주었고 표현해주었고 적극적인 애정 표현도 서슴없이 했다. 아내의 미묘하고 사소한 변화가 이번 여행에선 최대치로 올라갔다. 돌아가면 윤 실장과 그 동생에게 다시 한번 성의 표시를 하고 싶을 만큼.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이라고 할 만큼 아내가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이 여행이 끝나면 미국 출장을 시작으로 강준은 정신없이 바빠진다. 다행인 건 비슷한 시기에 해외 출장을 떠나는 아내의 스케줄도 만만치 않았다. 결론은 둘 다 바빴고 한동안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 해가 저물고 달이 차오르고 밤이 다가오자 정원의 흔들의자에 두 사람은 앉았다. 강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태령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그만 보고 나 좀 봐줬으면. 기다림을 이기지 못한 강준이 태령에게 몸을 기울였다.
“이제 그만 나 좀 봐주지 그래요.”
“…….”
“다시 소심한 어흥이 되기 전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태령이 강준의 얼굴을 감싸며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웃음이 어린 말간 눈을 보고 있으니 알 것 같았다. 지금 키스해야 한다는 걸. 작은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가는 신음을 흘리며 태령의 손가락이 강준의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키스가 깊어지자 강준은 태령을 안고 일어났다. 정원을 지나 거실을 가로지르고, 태령이 눈을 떴을 땐 침대였다. 상체를 세우고 앉아 윗옷을 벗는 강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강준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적당히. 잊지 않고 있으니……!”
상체를 일으킨 태령이 먼저 입을 맞춰왔다. 놀란 듯 굳어버린 강준에게 입술을 맞댄 채 태령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 야한 어흥이.”
달콤한 애칭과도 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준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겼다.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었다. 강준이 으스러질 듯 태령을 품에 껴안으며 긴 밤이 시작되었다. 뜨겁고도 격정적인 감각의 파도가 태령의 온몸을 깊게 잠식했다. 열감에 달아오른 눈가도 서서히 젖어들었다. 눈물 날만큼 좋은데 또 서글퍼서. 한계에 다다랐는지 강준의 손이 다급하게 협탁으로 향했다. 무얼 찾는지 알 것 같아 태령은 그 손에 깍지를 껴서 다시 제게로 끌어왔다. 아슬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뜨겁게 타는 눈과 서글픔에 젖은 눈이.
“…….”
“…….”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눈을 바라보며 태령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도 강준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남편이 뭘 걱정하는지 안다. 그래서 태령은 가느다란 팔로 남편의 목을 끌어내렸다. 이 남자의 머뭇거림을 날려버리고 싶어서. 귓가에 부드러운 숨결과 함께 수줍게 속삭여주었다.
“나에게 아기를 선물해줘요.”
대담한 베갯머리 송사에 강준은 놀란 듯 온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빌어먹을.”
거친 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온 강준을 태령은 꽉 끌어안았다. 감은 눈꼬리에서 뜨거운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이 남잘 너무 사랑하기에 지금 떠나야 했다. 우리의 사랑이 가장 뜨겁고 아름다울 때. 주세희란 여자가 당신에게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해서. 그래서 원해. 당신을 감히 욕심내지 못하는 내게,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당신을 꼭 닮은…… 우리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