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두 번째 밤.2021.10.24.
많이 참고 오래 기다렸지. 첫날밤 이후부터 지금까지, 강준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었다. 하지만 몸 안에서 폭발할 것 같은 욕망을 용케도 다스렸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질수록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끌린 적도, 강렬한 감정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사춘기 소년 때도 경험해본 적 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렇게 힘차게 뛰는 심장이 가슴 안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널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 손끝만 스쳐도 온몸에서 전율이 일어. 나한테 넌 그런 존재라고, 주세희. 그런 널 손에 쥐려 할수록 왜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기분인지. 아내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강준의 불안함도 같이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가녀린 등골을 어루만지자 작은 어깨가 움찔, 했다.
“강준 씨, 잠깐…….”
수줍은 듯 가녀린 그 음성마저도 강준은 부드럽게 집어삼켰다. 매끄러운 피부를 타고 사르륵 흘러내리는 소리에 목울대가 거칠게 울렁거렸다. 이 드레스가 아내에겐 불편하겠지만, 강준에겐 더없이 간편한 옷이었다. 앞으론 단추 대신 지퍼로 된 옷만 사줘야겠네. 피식, 웃음이 나오던 강준의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태령이 목을 꽉 끌어안으며 수줍게 속삭여왔다.
“침실로 가요.”
이성이 끊어질 듯 말 듯 아슬해졌다. 태령을 안은 채로 강준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허리를 휘감는 매끈한 다리의 감촉이 아찔했다. 침실에 도착했다.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놓은 태령을 강준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줍어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올려다보는 말간 눈동자가 도발적이었다. 시야가 끓는 것 같아 강준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움츠리는 매끄러운 어깨에 입을 맞추는 마음은 경건함에 가까웠다. 첫날밤은 짐승처럼 굴었다면, 두 번째 밤은 정중해지고 싶었다. 온통 새빨갛고 격렬하게 집어삼켰다면, 지금은 천천히 교감하고 싶었다. 다시 허리를 세운 강준의 눈이 침실을 태연히 훑었다. 밤이 찾아오지 않은 저녁의 침실은 적당히 밝았다. 자신이야 괜찮지만 아내가 부끄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준은 조심히 물었다.
“불 끌까요?”
태령은 떨리는 눈동자로 남편을 보았다. 침대에 눕자마자 집어 삼켜질 줄 알았는데.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편의 눈동자는 뜨겁지만 잔잔했다.
“강준 씨는요?”
태령이 오히려 되묻자, 강준이 피식 웃었다.
“나야 괜찮지. 근데 세희 씨 부끄러울까 봐.”
부끄럽기만 할까, 민망하고 수줍고 창피하기도 했다. 온통 흐트러진 자신과 달리 강준은 너무도 멀끔하고 단정했다. 이마에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이 흐트러짐의 전부였으니까. 그럼에도 태령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 남자의 모든 걸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려면 빛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어둡게 해줄래요.”
나의 수줍음을 가려주면서, 당신의 모든 걸 볼 수 있는 적당한 빛. 통창 블라인드를 닫은 강준이 조명의 조도를 적당히 조절했다. 그러고선 침대에서 조금 물러나 태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재킷을 벗은 후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우아한 손놀림을 따라 태령의 시선이 움직였다. ……불을 끄지 않길 잘했다. 타고난 피지컬에 꾸준한 관리로 만들어진 남편의 몸은 벗으니 더 근사했다. 밤마다 보았던 몸인데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면서 시야가 달아올랐다. 저 몸이 뭘 할지 알기에. 천천히 다가온 강준이 태령에게 몸을 기울여왔다. 침대에 반쯤 누운 태령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묵직한 무게감이 실렸다.
“뭐든지 아니면 참지 말고 말해줘요.”
귓가에 속삭여오는 낮은 음성이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내가 다 맞출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령에게 강준이 깊게 입을 맞춰왔다. 격렬하고 거칠었던 첫날밤과 전혀 다른 남편이었다. 느리고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그게 더 애가 탔고 그래서 태령은 대담해졌다. 강준과 빈틈없이 맞닿고 싶고 느끼고 싶은 마음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훅, 거친 숨을 토해낸 강준이 얼굴을 들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곤란한데.”
적당한 불빛에 너울진 조각 같은 얼굴이 숨이 막힐 만큼 매혹적이었다. 강렬한 매혹에 사로잡힌 태령은 달뜬 숨을 토해내며 강준을 보았다. 이 남자의 눈이 좋다. 짙고 깊고 새까만 눈동자가, 뜨겁게 타면서도 동시에 차가움을 풍기는 이지적인 눈빛이. 태령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핸드폰에 저장된 당신 이름 궁금하다고 했죠?”
그날 이후 핸드폰에 뭐라고 저장했냐고 강준은 몇 번씩 물어봤었다. 늘 시치미를 뗐지만 이젠 알려줘도 될 것 같았다. 강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태령은 조그맣게 입을 뻥긋거렸다.
“내 야한 어흥이.”
강준은 잠시 멍한 눈을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가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강준의 얼굴을 감싸 끌어내린 태령은 가까이서 눈을 맞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나한테 맞추지 말고 참지도 말아요.”
잔잔하던 남편의 눈동자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일었다. 그 눈을 보니 두렵다기보다는 간절해졌다. 차라리 그 불길에 온몸이 활활 타버렸으면.
“내 야한 어흥이가 그래 줬으면 좋겠어.”
아프고 힘들어도 좋아. 내가 그러길 원해. 그러니까 나를 안아요.
“……사랑하니까.”
떨리는 음성으로 고백하며 태령은 강준의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미치겠네. 작게 중얼거린 강준이 몸을 겹쳐왔다. 거대한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붙이며 보이지 않는 정상으로 태령을 한없이 끌어올렸다. 흐릿해진 시야가 흔들리고, 감은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주세희, 나를 봐.”
귓가로 스며드는 다정한 음성에 태령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을 봐. 처음부터 속였고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고, 이젠 떠나려는 내가.
“주세희.”
“…….”
“세희야.”
달래듯이 끊임없이 부르는 그 음성이 기어이 태령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땀에 녹아내린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뜨거운 눈동자가 집요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아니면 안 되고 나 없으면 못 살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은 눈동자로 이번엔 강준이 사랑을 속삭여왔다.
“사랑해, 주세희.”
태령은 대답 대신 강준의 입술을 찾았다. 지금은 사랑이겠지, 뜨겁고 깊겠지. 하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시간의 흐름 앞에 천천히 퇴색할 감정이었다. 한순간 뜨겁게 타올랐다가 사그라들고, 그리고 잊고. 모든 남자들의 사랑이 그랬고 재벌가 남자들은 더더욱 그러겠지. 지금껏 자신이 지켜봐 온 사랑은 그랬으니까. 너무 빠르게 타올랐고 지금도 무섭게 타고 있는 남편처럼. 강준의 얼굴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태령의 입술에 톡, 떨어졌다. 그 순간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면서 태령은 본능적으로 손톱을 세웠다. 너른 등에 붉고 깊은 흔적이 길게 새겨졌다. 시트로 맥없이 무너져내리는 몸을 강준이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감은 눈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다정한 입술이 느껴졌다. 얼굴에 쏟아지던 자잘한 입맞춤이 다시 깊어진다. 밀물처럼 천천히 밀려든 강준은 또다시 태령을 서서히 집어삼켰다. 누군가에겐 무아지경이고 누군가에겐 서글픈 두 번째 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아침 일찍 강준은 산뜻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하지만 품에 안겨 기절한 듯 잠든 아내를 바라보니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안을 때마다 얌전히 안겨 오길래 끊임없이 안았다. 같이 좋았고 같이 원하는 줄 알고. 한 가닥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진즉 눈치챘을 것이다. 아내의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걸. 기절하듯 정신을 놓기 전에 멈추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것들을 눈치채기엔 강준은 어젯밤 무아지경 상태였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깊은 잠에 빠져들기 전 아내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강준 씬 운동을 적당히 할 필요가 있어요. 내일 하루…… 스킨십 금지예요.’
느닷없이 떨어진 스킨십 금지령에 눈을 뜬 아침부터 강준은 시무룩했다. 억울한 부분도 있었다. 무아지경으로 빠지게 만든 게 누군데. 그리고…….
“내 야한 어흥이라니.”
작은 머리가 생각해낸 별명이 앙큼했다. 근데 또 마음에 든단 말이지. 강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얌전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대담했던 아내가 떠올라서. 단정하고 서늘한 가면 아래 숨겨 놓은 주세희는 불같은 여자였다.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품은 그녀가 놀라웠다. 이러니 내가 미치지. 그래서 불안한 거고. 아직까지도 강준의 마음속에 혓바늘처럼 돋아난 불안함은 존재했다. 물론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문제라는 걸. 잠이 드리워진 아내의 긴 속눈썹을 손끝으로 쓸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주세희 널 너무 사랑해서, 그게 문제라고.”
*** 정오가 넘어서야 태령은 겨우 눈을 떴다. 강준은 영혼이 반쯤 나간 태령을 씻기고 옷 입는 걸 돕고 곱게 안아 차에 태우기까지 했다. 오늘 일정은 차박이라고 했다. 요즘 감성 캠핑이 유행이라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했다. 평범한 연인처럼, 부부처럼. 발밑으론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위로는 울창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숲에 도착했다. 차 뒤에 가득 실린 장비를 보며 태령은 물었다.
“이거 설마 다 산 건 아니죠?”
“캠핑은 장비 빨이죠.”
자신감 넘치는 강준의 말에 태령은 웃어버렸다. 언제 이런 걸 해봤다고.
“바쁘다면서 언제 다 장만한 거예요?”
“내가 직접 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아니요, 태령이 작게 대답하자 피식 웃은 강준이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가볍게 먹을 음식을 세팅한 후 태령을 의자에 앉혔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부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말아요.”
태령은 왜 자꾸 내 이름을 안 불러주냐고 따지려다 말았다. 강준이 불러주는 부인이란 그 말이 왠지 다정한 애칭 같아서. 길었던 어젯밤의 후유증으로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긴 했다. 우선 먹어서 에너지를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에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으며 강준을 지켜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과 달리 강준은 어제보다 더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다. 눈이 부시고 활력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어젯밤 내 에너지를 저 남자가 몽땅 빨아들인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왜 맨날 나만……. 조금 억울한 느낌에 눈을 흘기는 순간, 강준과 눈이 마주쳤다. 태령의 속도 모르고, 산뜻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강준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령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움직이는 동선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우아한데 눈에 보이는 실적이 없다. 화려한 장비들만 바닥에 늘어져 있을 뿐. 보다 못한 태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준 씨, 지금 하려는 게 뭐예요?”
“그늘막 설치하려고.”
“근데요?”
“뭐가 안 맞아.”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그럼 설명서를 봐요.”
“버렸지.”
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태령은 조금 기가 막혔다.
“그걸 왜 버려요?”
“그딴 거 난 필요 없으니까.”
“…….”
“근데 생각해보니 그늘막 설치할 필요가 없네요. 이건 패스.”
해답을 찾았다는 듯 강준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소를 잘 고른 덕에 강렬한 오후의 햇살은 촘촘한 나무들을 뚫지 못했다. 너른 공간이 모두 그늘이었고 시원했으니까.
“맛있는 점심 해줄게요.”
이번에 강준이 손댄 건 접이식 화로대였다.
“할 줄 알아요?”
“해보면 알겠지.”
여전히 거침없지만 헤매는 게 분명한 손놀림. 태령은 또다시 조심히 물었다.
“설명서는요?”
고개를 든 강준이 태령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버렸는데.”
“도대체 왜 설명서를 버려요?”
초보들의 길라잡이인 설명서를 왜.
“설명서를 보는 건 남자의 자존심을 저버리는 일이니까.”
태령은 지금 눈앞에 잘생긴 허당이 있는 것 같았다. 벌레를 잡을 때도 남자는 주먹이라고 말할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런 남편이 싫지 않다. 오히려 완벽한 남자가 풍기는 인간미가 귀엽게 느껴졌다. 천천히 일어나며 태령은 작게 중얼거렸다.
“여행을 오는 게 아니었나 봐.”
마음을 정리하려고 떠나온 여행인데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어제 그리고 오늘, 새로운 환경과 장소. 그 덕에 남편에 대해 몰랐던 모습을 참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게 싫었다. 알게 될수록 더더욱 떠나기 싫어져서, 욕심이 나서. 완벽한 데다 귀엽기까지 한 온통 매력덩어리인 남편을, 내가 과연 떠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