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많이 참고 오래 기다렸지.2021.10.21.
턱시도로 갈아입고 나온 강준은 별장 거실의 큰 창 앞에 섰다. 자연미가 물씬 느껴지는 정원 너머로 보이는 아담한 호수는 아름다웠다. 정오의 햇살을 머금은 물결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마치 자신을 바라볼 때 주세희의 눈처럼. 그 아름다움 앞에서도 미묘하게 날 선 감각은 여전했다. 무감각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강준은 작게 중얼거렸다.
“뭘까.”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날 불안하게 하는 것. 최근 너무도 평온하게 흘렀던 아내와의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말만 뭐든 좋다고 하고, 늘 예쁘게 웃어주고, 놀랄 만큼 솔직하게 굴고. 드디어 자신을 믿고 사랑하기 시작한 거라고 믿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때론 무언가에 안달 나 있었고, 초조하게 굴었고,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내는 자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문득 드러내는 미약한 감정의 결까지 강준이 모조리 읽어낸다는 것을. 그래서 거슬리고 신경 쓰였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행복감 속에 혓바늘처럼 툭 돋아난 위화감이. 사소하면서도 미묘한 아내의 변화가. 그때였다.
“……강준 씨?”
뒤에서 속삭이듯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무심히 돌아선 강준은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평소와 같은데도 또 다른, 눈앞의 아내를 더 선명히 보고 싶어서. 태령은 머리 장식은커녕 귀걸이나 목걸이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희고 가는 몸매를 드러낸 심플한 디자인의 드레스만 입고 있을 뿐. 그런데도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정제되지 않은 원석의 아름다움이 이런 걸지도. 그래서 강준은 시선을 뗄 수도,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 잠시의 침묵 후, 태령은 차분한 눈빛으로 강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젠 내 이름 불러줄래요?”
눈빛과 달리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주세희라고.”
그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지금 아내가 용기를 내서 유태령이 아닌 주세희로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걸.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신부, 사랑하는 여자가 낸 용기. 깨끗하게 머릿속이 점멸된 강준은 중얼거리듯 태령에게 말했다.
“이러는 건 반칙이지, 주세희.”
불안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령에게 강준은 싱긋, 웃어주었다.
“이렇게 예쁘면 어쩌라고. 나가기 싫어지잖아요.”
그제야 태령의 부드러운 입술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불어와 강준의 불안함을 어루만져주었다.
“차 타고 20분 정도 갈 거예요. 내려서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강준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이번엔 내가 틀렸고, 쓸데없는 의심이고 기우일 뿐이라고.
***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민박집 입구였다. 그런데 검은 정장을 입은 가드 몇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신이 한 일이냐고 바라보는 눈빛에 강준은 태연히 대답했다.
“방해받기 싫어서.”
“그러긴 하지만, 남의 사유지에 이래도 되는 걸까요?”
“허락받았고 그만한 비용도 충분히 치렀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제야 태령은 수긍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 보닛을 돌아온 강준이 매너 있게 차 문을 열고 태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도 없이 잡았던 손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왔다. 입구를 지나 조금 걷자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걷자, 강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가 나왔다. 신발을 벗어야 하나. 태령이 고민하는 그때, 강준이 몸을 숙이며 등을 내주었다.
“업혀요.”
그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령은 이내 웃으면서 거절했다.
“싫어, 내가 그냥 건널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거절에 강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태령은 이미 힐을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손만 잡아줘요. 그래 줄 거죠?”
웃음을 머금은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며 강준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발 디디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조심해요.”
“자꾸 애 취급할 거예요?”
태령이 눈을 흘기자 그제야 강준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조심조심 건넜다. 강준이 먼저 건넌 후, 태령이 그 뒤를 따랐다. 고지를 눈앞에 두고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이 태령을 멈추게 만들었다. 물끄러미 물을 내려다보는 태령을 강준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발끝을 살며시 담근 태령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차가워요!”
그 소리에 놀란 강준이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근데 너무 기분 좋아요.”
언제 그랬냐는 듯 태령은 활짝 웃고 있었다. 괜히 머쓱해진 강준이 천천히 손을 거두는 동안, 태령은 물에서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살짝 담글 때는 배시시 웃다가, 발목까지 담글 때는 입술을 꾹 다물고. 동그란 눈이 곱게 접히며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단정한 눈빛과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처럼 신나서 들떠 있는 아내에게서 더더욱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때 살랑살랑 불어온 바람이 태령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흩날렸다. 눈부신 정오의 햇살이 부서지듯 내려앉은 태령은 온통 반짝거리고 있었다. 현실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손을 뻗어 만지면 아내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한 강준은 훌쩍 건너가 태령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칼이 반짝거리고 웃음이 번진 얼굴이 눈이 부셔서. 이렇게 안아서 존재를 확인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깊게 응시해오는 눈빛에 태령의 얼굴에 번져 있던 웃음도 사라졌다.
“…….”
“…….”
시선이 부딪치고 엉키는 순간, 가느다란 팔이 강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품에 폭 안겨 오는 이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가슴 안에서 범람하는 이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서 강준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주세희.”
고막이 녹아내릴 것 같은 다정한 부름에도 태령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처럼 다정한 눈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 같아서. 그저 강준의 목을 더 꼭 끌어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 같아서.
“사랑해.”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도, 귓가에 속삭여오는 남편의 고백은 눈물이 날 만큼 달콤했다. *** 돌다리를 건너온 후 태령은 강준의 등에 줄곧 업혀 있었다. 길이 꽤 험하다고 해서 업혔는데. 막상 너른 등에 업혀 편히 구경한 길은 험하지 않았다. 중간에 돌계단이 한 번 있고 높은 굽으로 걷기 불편한 흙바닥이라는 것 정도. 태령이 내려달라고 졸라대자 강준은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야 서프라이즈 할 맛이 난다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마지막엔 눈을 감았다.
“도착했어요.”
눈을 감고 있던 태령은 강준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절로 벌어진 입술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강준의 말대로 사방이 산과 계곡과 절벽인 밀밭은 폐쇄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푸르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소박한데 아름다웠고 평화로운데 근엄했다. 이 여행을 태령은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강준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호텔이나 풀빌라를 빌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긴 너무. 가슴이 벅차오른 태령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 그 침묵을 잘못 받아들인 강준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뒤에서 들려왔다.
“너무 허허벌판인가.”
태령은 강준에게 천천히 돌아섰다. 세상에서 무서울 것 없는 대단한 남자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게 우스우면서도 서글펐다. 내가 뭐라고. 가슴 안에서 왈칵 넘쳐흐른 뜨거운 무언가가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 했다. 그럴수록 태령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울지 마. 활짝 웃어. 그리고 정말 태령은 활짝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제야 강준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번진다.
“그럼 합격?”
“합격. 그것도 백 점 만점으로요.”
갑자기 강준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흐드러지게 핀 이름 모를 들꽃 앞에 멈추어 선 후 꽃들을 조금 꺾었다. 부케를 준비하지 말라고 했던 건 태령이었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걸까. 부케만 한 크기로 소복하게 모아온 들꽃을 태령에게 건네며 강준이 피식, 웃었다.
“주면서도 좀 그러네요. 장소도 그렇고 부케도 그렇고. 너무 돈을 아낀 것 같아서.”
태령은 잔잔히 웃으며 소중히 받아든 들꽃에서 몇 줄기를 뽑았다. 행거치프 대신 턱시도의 포켓에 하얀 들꽃을 꽂아준 후 눈을 맞추고 잔잔히 웃었다. 이보다 더한 대답은 없을 테니까.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강준이 허리를 곧게 세운 후 태령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나 서강준은 평생 주세희만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훅? 웃음기가 번진 표정으로 태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짙은 눈빛에 태령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들꽃 부케를 든 작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오로지 둘뿐인 지금, 주세희로서 당신의 앞에 선 지금. 나도 당신에게 고백하고 싶어. 강준의 허리를 끌어안은 태령은 눈을 맞추고 미소를 머금었다. 수도 없이 맹세할 수 있는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이 행복한데도 서글펐다.
“나 주세희는 평생 서강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래서 태령은 몰랐다. 입가에 번진 미소가 눈물이 날 만큼 서글프다는 걸. 강준이 태령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꼭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맞닿은 심장 소리만이 쿵쿵 울릴 뿐, 사위는 고요했다. 강준의 편안한 품 안에서 태령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흐르는 시간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한참 후 두 사람은 눈을 떴다. 눈을 맞추고 지금 서로의 모습을 눈동자에 가득 담았다. 강준이 다정하게 태령을 불렀다.
“주세희.”
눈부신 햇살이 가득 고였는데도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깊고 짙었다.
“평생 내 곁에 있어.”
무슨 말을 할 듯 달싹거리던 태령의 입술이 끝내 다시 다물렸다. 이 남자 곁에 머무를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기어이 떠날 거면서. 그런 나에게 대답할 자격이 있을까. 대답 대신 강준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먼저 입술을 부딪쳤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사랑해요, 강준 씨. 하지만 당신 곁에 머무를 순 없어. 지금 태령은 너무 사랑해서 두렵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주세희에 대해 알게 된 당신의 눈빛이 마음이, 날 향한 사랑이 변할까 봐. 그래서 난 너무 두려워. *** 밀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손잡고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멈추어 서기도 하고. 물소리와 새소리에 귀도 기울이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입을 맞추었다. 고요함 속에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좋았다. 오솔길 끝에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 흐르는 강이 있었다. 태령은 강물에 강준이 꺾어주었던 들꽃 부케를 하나씩 띄워 보냈다. 이 남자를 향한 마음을 조금씩 흘려보내는 것처럼. 흘러가는 모든 게 소박하고 평범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왔고 늦은 점심으로 민박집에서 무료로 주는 잔치국수를 먹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했고 예쁜 곳이 보이면 내려서 손을 잡고 말없이 걸었다. 마음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발길 닿는 데로. 별장에 도착했을 땐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태령은 가장 먼저 씻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살짝 땀이 밴 듯한 피부가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욕실로 향하는 태령의 손목을 잡고 강준이 천천히 돌려세웠다. 타는 듯이 뜨거운 눈과 마주치자 가슴은 두근거리고 심장은 떨려왔다. 그 눈빛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아서.
“씻고 싶어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도, 떠오르는 변명도, 태령에겐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정말 씻고 싶었다. 하지만 손목을 그러쥐고 있는 손은 점점 더 태령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더럽단 말이에요. 땀도 흘렸고, 옷도 불편하고…….”
태령은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남편의 품에 안겼고 초옥, 가볍게 맞춰오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져서.
“나도 더러워요, 땀도 흘렸고.”
귓가를 스치는 웃음기 어린 나직한 중얼거림에 태령은 홀리듯 눈을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붉게 타고 있었다. 칭칭 옭아매오는 시선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길처럼 천천히 어루만지는 그 눈빛에 맥이 탁 풀렸다.
“그러니까 괜찮아, 주세희.”
그 한마디에 정말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태령은 강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다시 가까워지는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많이 참고 오래 기다렸지.”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강준이 입술을 겹쳐왔다. 조금 이른, 두 번째 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