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많이 예뻐보였으면 좋겠어.2021.10.17.
태령은 샤워하는 내내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우리 둘이 있을 땐 주세희라고 불러줄래요?’
충동적인 발언이었다는 걸 인정하지만 후회는 안 했다. 남편이 불러주는 주세희란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남자의 눈빛을, 표정을, 음성을, 잊지 않고 싶어서. 시간의 흐름 앞에서 그것만큼은 퇴색하지 않았으면 해서. 혼자만의 이기적인 욕심일지라도, 그래서. 샤워기 레버를 잠그며 태령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4일 남았구나.”
서강준과 함께할 마지막 시간. 그리고 드디어 내일은 둘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 여행에서 태령이 한 거라곤 그 날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게 전부였다. 목적지는 어디인지, 거기서 뭘 할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강준이 원하는 건 뭐든 해주고 싶었고, 뭐든 좋기도 했다. 그게 자신이 남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별짓을 해도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다면 실컷 웃고 행복해하고 솔직하게 사랑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람에게 많이 예뻐보였으면 좋겠어.
“어려운 건 없어.”
그러니까 할 수 있어. 태령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고 속삭이며 욕실을 나갔다.
*** 늘 자신보다 늦게 씻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먼저 샤워를 끝낸 후 소파에 앉아 태령을 빤히 주시했다. 수도 없이 마주친 눈인데 왜 늘 심장은 이토록 떨리는지, 입안은 바짝 타는지. 갈증이 난 태령이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강준도 어슬렁거리듯 따라왔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신 후 돌아선 태령은 흠칫, 했다. 너무 가까이 뒤에 붙어 있던 강준 때문이었다.
“강준 씨도 물 마실래요?”
태령의 물음에 강준은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남편이 왜 이럴까. 의문이 생겼지만 태령은 다시 주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또다시 느릿느릿 특유의 걸음으로 강준이 뒤를 따라온다. 신경이 쓰이지만, 어쩌나 보려고 태령은 모른 척 걸었다. 이번에 향한 곳은 체중계가 있는 드레스룸이었다. 남편이 자신을 안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후 열심히 먹었던 게 떠올랐다. 과연 목표 몸무게에 도달했을까. 사실 태령에게 더 이상 몸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몸무게와 상관없이 오늘 밤 남편에게 안기고 싶었다. 우리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태령은 원했고 남편도 그래 주길 바랐다. 입구에 서서 비스듬히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집요했다. 그럴수록 태령은 일부러 천천히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내쉰 후, 살그머니 실눈을 뜬 태령의 눈이 점차 커다래졌다. ……88킬로? 체중계가 고장 났나 생각하는 그때, 숫자가 갑자기 더 치솟았다. 등 뒤에서 안아오며 강준이 체중계 위로 같이 올라선 것이다.
“살찌우려고 안달하지 마요.”
“…….”
“몸무게 신경 안 쓰고 편히 먹어주면 난 그걸로 만족하니까.”
강준의 품에서 태령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을까. 물론 지금 자신이 꽤 안달 나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서강준이란 남자를 온몸과 마음에 깊게 각인할 방법. 태령이야말로 강준에게 묻고 싶었다. 몸무게가 뭐라고 날 안지 않느냐고, 당신은 모르잖아.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갑자기 서글퍼진 태령은 품 안에서 몸을 틀어 강준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몸무게 달성 안 하면…….”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음성. 무심히 얼굴을 내린 강준의 귓가에 태령이 속삭여왔다.
“날 안지 않을 거면서.”
수줍어하면서도 서럽다는 듯이.
“근데 난 강준 씨한테 안기고 싶어요. 당신만 괜찮으면.”
태령이 잠시 말을 멈추자 덩달아 강준도 말을 잃었다.
“……오늘 밤이요.”
아내의 마지막 속삭임에 뇌가 멈추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열감이 번진 새까만 눈동자가 태령을 바라보았다. 말간 눈동자와 단정한 얼굴, 내숭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 그런데도 숨이 막힐 만큼 유혹적이라 미치도록 넘어가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밤 안으면 내일 여행은 못 갈지도 몰랐다. 참고 참은 만큼 적당히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도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버텨야 했다. 대답 대신 강준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내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묘하게 안달 난 것도 같았다. 도대체 왜. 이제 하루 남았는데 뭐가 급해서.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하지만 무엇 하나 내색하지 않고 강준은 태연히 웃어 보였다.
“우리 내일 여행 못 갈지도 모르는데.”
“…….”
“그래도 괜찮겠어요?”
대답 대신 태령은 찬바람을 쌩 날리며 강준을 스쳐 지나갔다. 늘 가녀리고 작아 보이던 아내의 뒷모습이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지은 죄가 있어서겠지. 쓸데없는 기우로 인해 아내를 의심하고 있으니까. 강준은 빠르게 다가가서 태령을 뒤에서 안았다.
“혹시 화났어요?”
의처증 있는 남편처럼 겁에 질려 의심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사랑한다고 했는데, 예쁘게 웃어줬는데, 뭐든 그러겠다고 했는데. 주세희란 이름도 허락했는데. 그런 네가 나와의 이별을 준비할 리가 없잖아. 대답 없이 걸어가려는 태령을 안은 채 강준도 같이 걸었다. 그러다 멈추면 같이 멈추어 서고.
“좀 놔줘요. 강준 씨 때문에 걷기 힘들잖아요.”
아내의 핀잔에도 강준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엉거주춤 한 몸처럼 걸을망정. 결국 걷기를 포기한 태령이 품 안에서 한숨처럼 말했다.
“나도 알아요, 충분히 이해하구요. 근데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다구요.”
내 유혹이 어설퍼서 거절당한 것 같아서. 나 혼자 엉큼한 것 같아서. 안 부끄러울 리가 없잖아요. 태령이 중얼거리듯 조그맣게 덧붙인 말들이 사랑스러웠다. 애교나 내숭은 전혀 모르는 이 여자의 솔직함이, 순진함이, 나를 미치게 해. 가슴이 뜨거워진 강준은 빠르게 잘못을 시인했다.
“다 내 잘못인 거 인정. 무릎 꿇고 빌까요.”
내가 의심이 많아서, 내가 짐승 같은 놈이라서.
“화 안 났어요.”
“어떻게 하면 화 풀래요?”
“……화 안 났다니까.”
말 짧아진 거 보니 진짜 화났네, 주세희. 강준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겨우 참으며 태연히 물었다.
“혹시 우리가 지금 하는 게 부부싸움인가?”
“말도 안 돼. 아니거든요!”
발끈하는 아내의 뽀얀 목덜미에 강준은 소리 없이 입을 맞추었다. 가녀린 어깨가 흠칫, 하며 솟아올랐지만 품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더 해달라는 신호 같아 강준은 아내의 목덜미와 어깨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미약한 버둥거림이 점차 새의 지저귐 같은 웃음으로 변했다. 이제 좀 알 것 같다. 화난 아내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큰 잘못은 무릎 꿇고 입으로 잘못을 빌고. 작은 잘못은 지금처럼 몸으로, 애교로 빌고. 현명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이젠 간지럽다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아내 때문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유부남의 스킬 하나를 획득한 기분이랄까.
“화 풀었으니까 좀 놔줘요. 너무 웃어서 힘이 없어요.”
강준은 대답 대신 태령을 번쩍 들어 자신의 발등 위에 서게 했다. 물론 단단한 두 팔로 가느다란 허리를 칭칭 옭아맨 채였다.
“침실까지 고이 모셔다드리죠, 부인.”
강준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태령의 목과 어깨에도 입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태령의 맑은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강준의 가슴까지 같이 울렸다. *** 깊은 밤, 영국은 서재에서 혼자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한신 본가에 초대되었던 점심 식사를 수도 없이 떠올릴 때마다 나오는 결론은 한 가지.
“그 아이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지.”
한신 후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서 회장의 눈에 들고. 놀고 돈 쓸 줄밖에 모르는 자신의 딸은 절대 그 아이처럼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내인 영희는 지금도 자신만만했다.
‘우리 딸은 내가 완벽히 컨트롤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요. 스스로 안 해서 그렇지 시키는 건 백 점 만점인 애라구요.’
29년 전, 영희와 똑 닮은 얼굴에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은 그 여자가 떠올랐다. 무지했지만 천박하진 않았고, 단정하고 깨끗한 섹시함을 품은 여자였다. 시골에 숨어 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면 진즉 남자들 눈에 띄었을 여자다. 그 여자도 그렇고, 그 아이도 그렇고. 남자를 홀리는 무언가가 있다.
“피는 못 속이지.”
그 날 영국의 눈엔 보였다. 한신의 후계자가 차가운 눈동자 안에 교묘히 숨기고 있던, 그 아이에게 반쯤 미쳐 있던 집요한 감정을. 지금 영국은 허울뿐인 이노그룹의 부회장직도 위태로웠다. 그 자리에 전전긍긍하느니 잘 돌아가는 한신 그룹 알짜 계열사 하나 맡는 게 낫다. 한신 자동차는 서강준이 꿰차고 있으니 한신 건설이나 한신 전자도 괜찮을 것 같고. 생각만 해도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문득 제안을 덥석 물지 않았던 그 아이가 떠올랐다. 단정하면서도 고집스러웠던 그 눈빛도. 친모의 섹시함만 물려받은 줄 알았더니, 고집도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 여자도 지독하게 고집스러웠는데. 시골에서 자라지만 않았다면 속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난처럼 만든 이혼 서류를 보여주고 나서야 품에 안겨왔으니까. 영국은 피식, 웃었다.
“쥐뿔도 없는 게 튕기기는. 한 번 더 권하면 못 이긴 척 넘어올 거면서.”
이미 이 결혼에 마음이 떠난 철없는 딸을 설득하는 건 쉬웠다. 이제 그 아이만 설득하면 되지만 영국은 선택해야 했다. 그 아이인지, 조강지처인지. 물과 기름처럼 둘은 절대 섞일 수도 없고 공존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지금 영국의 선택은 이용가치가 배로 높은 그 아이였다. 아내야 잠시 이혼했다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다시 합치자고 설득하면 된다. 나중에 다시 합칠지는 의문이지만. ***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도로는 정체가 심했다. 외곽 순환도로를 빠진 차가 고속도로를 한참 달렸다. 그때까지도 태령은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 없는 태령을 운전하면서 간간이 바라보던 강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지 안 궁금해요? 아니, 오늘 일정에 대해 궁금한 건 없고?”
“어디 가도 좋고, 뭘 해도 전 다 좋아요.”
너무 유순하게 대답했나. 강준이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빤히 바라보자 태령은 싱긋 웃었다.
“강준 씨랑 함께 가고 함께 하는 거잖아요.”
날 위해 당신이 직접 준비한 3박 4일 여행. 당연히 싫을 리가 없잖아. 그게 태령의 진심이었다. 태령을 빤히 바라보던 강준이 가만히 손을 잡았다. 손깍지를 끼고는 손장난을 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강원도에 괜찮은 장소가 있더라고. 조용하고 편하고 사방이 막혀서 프라이빗한 곳.”
“좋네요.”
“화장실도 없고 앉아서 쉴 의자도 없는데.”
“그것도 좋네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뻘뻘 땀 흘릴지도 모르고.”
“그래도 좋아요.”
한결같은 대답에 강준이 눈썹을 찡긋하며 중얼거렸다.
“지옥에 가자고 해도 좋다고 하겠네.”
“어떻게 알았어요? 이번 여행에선 나 강준 씨한테 무조건 다 좋다고 할 건데.”
눈을 동그랗게 뜬 태령이 천진난만하게 웃자, 결국 강준도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이 태령은 마냥 좋았다. 이 남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별장이었다. 지은 지 꽤 오래되어 보이지만 호수를 끼고 있는 운치 있는 곳이었다.
“옷 갈아입고 나와요. 아, 오래 걸리려나.”
강준이 말하는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신부, 웨딩드레스, 결혼식. 당연히 준비가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겠지.
“씻고 옷만 갈아입으면 되니까 30분이면 돼요.”
“그렇게 빨리?”
“나한테 맨얼굴이 예쁘다면서요. 아니면, 화장할까요?”
아니라고 빠르게 대답하는 강준에게 웃어 보인 태령은 방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한 후 머리는 말리기만 하고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화장은 하지 않고 선크림만 가볍게 발랐다. 난 오늘 유태령이 아니니까. 이 여행에서만큼은 주세희의 모습으로 남편과 함께하고 싶었다. 드레스를 입은 태령은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 기교 없이 허리까지 늘어뜨린 새까만 머리칼. 장식 하나 없이 무릎 중간까지 내려오는 뷔스티에 디자인의 새하얀 롱 원피스. 태령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꾸미지 않을 때가 가장 자연스럽고 예쁘다는 걸.
“강준 씨가 예쁘다고 해줄까.”
그 사람에게 많이 예뻐보였으면 좋겠어. 그래서 지금 이 모습이 남편에게 깊게 각인되었으면. 간절한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 태령은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 한가운데, 네이비색의 슈트를 입고 서 있는 훤칠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준 씨?”
이게 뭐라고, 남편을 부르는 것도 이렇게 떨릴까. 태령이 자그맣게 부르자 천천히 돌아서는 강준의 눈빛과 표정은 무심했다. 하지만 완전히 돌아선 후엔 가늘게 뜬 눈으로 태령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도 말없이, 한참 동안, 넋을 잃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