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주세희라고 불러줄래요?2021.10.14.
키스에 대한 허락을 구하듯이 강준은 느릿느릿 다가왔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태령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망망대해를 비추는 유일한 빛 같아서. 그 빛이 스며든 가슴이 먹먹해서, 시선을 뗄 수 없고 몸을 꼼짝할 수 없어서.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감자 그 빛은 사라졌다. 대신 따스한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져 왔다. 감은 눈꺼풀 위로 수많은 빛들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태령이 간간이 내쉬는 여린 숨마저도 깊이 빨려 들어갔다. 더 짙고 깊어질수록 단단한 품 안에 갇힌 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키스만 하고 있을 뿐인데. 이 남자의 두 손은 금욕적일 만큼 작은 얼굴만 어루만지고 있을 뿐인데. 나에게 참 잘한다고 했던가. 심장을 쥐락펴락, 들었다 놨다 한다고. 하지만 당신도 참 잘해. 내 마음을 녹이고 가슴을 멋대로 휘젓고. 떠나고 나면 많이 그리워하고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 서강준 당신을.
어렴풋이 입술이 떨어지는 느낌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나른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감각에 사로잡혀 태령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내밀었다.
“후우.”
떨리는 눈꺼풀 위로 강준이 따스한 숨을 불었다. 눈 좀 떠봐요, 라는 신호 같아서 태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열감이 번진 새까만 눈동자가 태령을 짓궂게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봐야죠.”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엔 웃음기가 다분했다. 조금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하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키스하질 말든지.
“나중에 영화 제대로 못 봤다고 내 탓 할 것도 같고, 그래서.”
흐릿했던 태령의 눈동자가 또렷해지면서 눈빛이 조금 앙칼지게 변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했는지 강준이 다시 넌지시 의견을 물어왔다.
“아쉬우면, 좀 더 할까요?”
그런 걸 물어보는 남자가 어딨어. 더 하자고 대답할 여자는 어딨고. 그래서 태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에서 벗어났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조금 억울하고 부끄럽긴 했다. 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홀린듯이 빠져들고 매달린 게. 하다 말았다고 원망스럽게 바라본 게.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앉은 태령이 앞만 똑바로 바라보는데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감싸 다시 품으로 끌어당겼다. 하지 말라고 작은 손으로 밀어내보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흘기자 강준이 살살 눈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내 품에 안겨서 봐요.”
“안겨서 보면 불편하단 말이에요.”
“날 물건 취급하다니 서운한데요.”
태령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강준이 말했다.
“잘 때는 그렇게 집요하게 내 품에 안기더니, 지금은 필요 없다고 밀어내니까.”
정말 서운해하는 얼굴이라 결국 태령은 웃어버렸다. 그렇게 태령은 강준의 품에 안겨서 영화 관람을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강준은 약속을 어겼다. 아무 짓도 안 하겠다더니, 영화를 보는 내내 다정한 애정 행위는 계속되었으니까. 가볍게 뺨과 머리에 입 맞추고,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고,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고. 가끔 과하게 손이 선을 넘을 때면, 손등을 찰싹 맞기까지 했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한시도 가만히 잊지 못하던 손이 얌전해졌다. 그리고 고막을 울리는 영화 주인공들의 음성 위로 고요히 얹힌 숨소리. 설마 하는 마음에 살며시 고개를 들자 얌전하게 잠이 든 강준이 보였다.
“이렇게 피곤해할 거면서, 영화는 왜 보자고 했어요.”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남편을 바라보는 태령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생각 없이 한 말은 그냥 흘려들어도 되는데.”
영화 광고를 무심코 보았고 결말이 궁금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스토리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해서. 그 후 태령은 깨끗이 잊고 있었다. 그런데 강준이 그걸 기억하고 신경 쓸 줄은 몰랐다. 자신의 작은 것 하나에도 그는 오감을 곤두세운 채 신경 쓰고 있었다. 잘해주지 못해서 안달 난 것처럼. 다시 품을 파고드는 태령을 강준은 잠결에도 품에 꼭 끌어안는다. 사랑하는 남자의 강렬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태령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집중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태령에게 강준이 말을 했다.
“내가 잠들어서 화난 건 아니죠?”
그제야 태령은 강준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화난 것 같아요?”
“계속 말이 없길래.”
“아, 영화 생각하느라구요.”
그러자 강준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내용이었는데.”
“치정에 막장 영화예요. 강준 씨는 잠들길 잘했어요. 남자들이 싫어할 내용이거든요.”
“한번 말해봐요, 들어나 보게.”
“궁금하면 나중에 강준 씨가 영화로 봐요.”
“태령 씨가 또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보면 모를까, 나 혼자 볼 일은 절대 없어요.”
태령도 안다. 서울이었다가 부산이었다가 제주였다가. 때론 한국이었다가 인도네시아였다가 독일이었다가. 서강준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귀하게 쓰는 남자라는 걸. 그렇게 몸이 열 개라도 바쁜 남자가 지금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 귀한 시간을 아내를 중심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런 당신이 나 아니면 이 영화를 볼 일은 정말 없겠구나.
“보육원에 버려진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있었어요. 얼굴은 똑같은데 성격은 너무 다른. 얌전한 동생이 부잣집에 입양 가기로 했었는데 그걸 똑똑한 언니가 새치기했어요. 남은 동생은 자식을 버린 걸 후회한 엄마가 다시 보육원을 찾아와서 데려갔구요.”
담담한 표정과 고저 없는 사무적인 음성으로 태령은 설명을 계속했다. 마치 영화에 대한 총평을 하는 것처럼. 그 후 동생과 엄마 모녀는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 부잣집에 입양된 쌍둥이 언니는 교양 있는 숙녀로 자라 중견 기업의 장남과 사랑에 빠졌고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
“쌍둥이 언니는 몇 번의 중절을 겪고 임신이 힘든 몸이었어요. 남편이 장남인데 애를 못 낳으면 모든 걸 잃을 것 같아서 불안해했구요. 그래서 자신의 남편을 설득해서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웠어요. 궁상맞게 살고 있는 쌍둥이 동생을 생각해낸 거죠.”
잠시 말을 멈춘 태령은 운전하는 남편을 빤히 보았다. 계속할까요, 묻는 것처럼.
“흥미롭네, 계속해요.”
“동생은 언니 말을 거부할 수 없었어요. 찢어지게 가난했고 엄마는 지병을 앓고 있어서 돈이 간절했으니까.”
담담한 표정과 달리 태령의 속은 씁쓸했다. 그깟 돈이 뭐라고, 그렇게 더러운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영화엔 늘 그렇듯 반전이 있어요. 동생은 시골에 짠 하고 나타난 다정하고 잘생긴 재벌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렸거든요. 남자도 아내의 동생인 걸 알면서도 나름 마음을 주었구요.”
“둘 다 양심의 가책이 없네.”
강준이 담담히 말했다.
“그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동생이 못하겠다고 하자 남자가 꼬셔요.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는 그런 흔한 멘트로.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태령은 지금 자신이 딱히 기분 나쁘거나 우울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평온한 얼굴로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둘 사이를 알게 된 쌍둥이 언니가 집안 어른들까지 동원해서 뒤집어엎었어요. 자신이 먼저 하자고 해놓고선 남편이 변심하니까 그걸 약점 잡아 큰소리치고 남편 집에서 한몫 단단히 챙기고. 다음이 더 막장 스토리인데, 맞춰볼래요?”
“혹시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임신했어요?”
“언니가 먼저 임신했고 동생은 나중에 했어요. 당연히 언닌 동생한테 아기를 지우라고 했구요. 지우지 않으면 돈 한 푼 안 줄 거라고.”
그제야 강준이 살며시 눈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진짜 막장이네요.”
“언니의 협박과 괴롭힘에 동생은 몰래 도망갔어요. 미혼모들을 도와준다는 개인 시설을 알아내서 들어갔어요. 하지만 동생은 아기를 출산하다 죽었고 혼자 살아남은 아기는 가난한 외할머니에게 짐처럼 떠맡겨졌어요. 쌍둥이 언니는 딸을 출산하고 한심한 남편 데리고 그럭저럭 살고.”
“…….”
“결말이 너무 흐지부지해서 마음에 안 들어요. 악역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때마침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추었다.
“당신은 누가 악역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직한 음성에 태령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웃음기가 메마른 눈동자로 강준이 빤히 보고 있었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태령은 담담히 대답했다.
“모두 다요. 다 더럽고 불결하니까.”
힘들게 사는 동생을 도와주진 못할망정 대리모처럼 이용하려고 했던 언니도. 아무리 돈 때문이라고 해도 형부를 사랑하고 아이까지 가졌던 순진한 동생도. 두 여자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책임감 없는 그 남자도. 그때 강준이 상체를 살며시 기울여왔다. 온기 어린 손등이 창백한 뺨을 다정하게 쓸며 속삭이듯 물었다.
“나한테 말해봐요. 그럼 내 부인께서 원했던 결말은 뭐였는지.”
내가 원하는 결말.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대답은 쉽게 나왔다.
“……다 죽는 새드엔딩이요.”
그랬다면, 더럽고 불결한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 피곤했던지 태령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강준은 정지 신호가 걸렸을 때 재킷을 벗어서 아내에게 덮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아내의 비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장님이 좀 예민하세요. 아무리 피곤해하셔도 잠든 걸 본 적이 없어요.’
잠은 무조건 집에서만 잔다는 아내가 자신의 차 안에선 편히 잠들었다. 강준은 그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같아서. 하지만 아까 전 아내가 보였던 모습은 강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영화 내용을 보고서 올리듯 건조하게 줄줄 읊었던. 그런데도 아내의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들을 강준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분노하고 서글퍼 하고 원망하다가 마지막은 무감각해지던. 사랑이란 감정이 강준에게 부린 마법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눈이 아닌 심장으로 바라보고, 시야가 아닌 감각으로 느끼는 것. 아내는 영화에 지나친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졌다. 이 작고 여린 몸으로 도대체 뭘 감당하고 있는 건지,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 건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주차장에 도착하자 무겁게 감겨 있던 아내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반쯤 올라선 얇은 눈꺼풀 아래, 강준을 미치게 하는 말랑말랑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강준 씨가 운전을 너무 부드럽게 해서 깜빡 잠들었나 봐요.”
잠든 게 민망했는지 중얼거리듯 변명하며 살포시 짓는 미소가 사랑스럽다.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은 걸 참으며 강준은 태령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기 전, 태령이 갑자기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와 뭔가를 바라듯이 올려다보자 강준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렸다. 그런데 태령의 작은 손이 입술을 막았다. 키스해달라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닌가.
“앞으로 자제한다면서요.”
“집에서는 자제한다고 한 적 없는데.”
작게 웃음을 터뜨린 태령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강준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
“지금부터 우리 둘이 있을 땐 주세희라고 불러줄래요?”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아내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런데 왜 기쁘지가 않지. 부탁이란 단어도 거슬린다. 그게 뭐라고 부탁해. 도대체 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강준의 침묵에 태령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어요.”
“…….”
“참 듣기 좋았거든요.”
강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제야 태령은 미소를 활짝 지었다.
“고마워요, 강준 씨.”
태령이 2층으로 올라간 후 소파에 앉은 강준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이상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내의 미묘한 변화가, 느닷없는 부탁이, 고맙다는 그 말이, 활짝 웃는 미소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자꾸 가리키는 것 같아서. 아내가 달콤하게 귓가에 속삭여놓고선 정작 강준이 입에 담는 걸 거부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주세희.”
입안에서 느리게 혀를 굴려 발음하는 그 이름은 달콤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천천히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아내의 변화를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그 안에 꼭꼭 숨어 있는 비밀을 찾기 위해. 사랑한다고 말하고, 감정에 솔직해지고. 자신이 하는 건 뭐든 좋다 해주고 웃어주고 안겨주고. 이젠 이름까지 부르는 걸 허락해주고. 마치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려는 것처럼 너그럽게 굴고. 빠르게 돌아가던 뇌가 어느 지점에서 탁 멈추었다.
“하아.”
입에서 번진 쓰디쓴 한숨이 폐 깊숙한 곳까지 쓸어내렸다. 날 선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아내는 주세희란 선녀의 날개옷을 입고, 나를 떠나 훨훨 날아가려는 거라고. 강준은 알리샤를 뒷조사했던 사설탐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대세 연예인인 김진우 모델. 그 사람 주변인들 뒤져서 이름 하나 찾읍시다.”
주세희와 김진우. 둘은 분명 아는 사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말씀하십시오.]
강준의 시선이 2층으로 향했다. 물론 쓸데없는 기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비는 해놔야겠지.
“……주세희.”
네가 기어이 날 떠나서 날아가려고 할 때, 내가 널 다시 품에 낚아챌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