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매너의 경계선.2021.10.07.
설마, 아니겠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린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에 꽂힌 남자의 주먹이 얼굴 바로 옆에 아슬하게 있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지금!”
“들었을 텐데, 빗나갔다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뜬 남자는 지독히도 태연했다. 그럼에도 크고 단단한 몸에서 흘리는 분위기는 형체 없이 압도적이다.
“경고도 한 번뿐이고, 빗나간 것도 한 번뿐이고. 그다음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우아한 음성이 화장실에서 들어서인지 음산하게 들려왔다.
“뭘 거 같습니까?”
남자는 여전했다. 반말 같은 존댓말, 정중한 것 같은 오만함. 그래서 감히 대들 수 없게 만드는. 그게 더 열 받아서 진우는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폭행은 엄연히 범죄 행위입니다!”
“손끝 하나 안 댔는데, 내가 뭘 어쨌다고.”
“빗나갔다면서요, 방금 내 얼굴 산산조각내려 한 거잖습니까?”
“다음엔 제대로 산산조각낼 겁니다.”
조소를 머금듯 말려 올라가는 남자의 입술이 차갑다.
“김진우 씨 얼굴을.”
잠시 떨어졌던 차가운 눈동자가 다시 진우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칼날처럼 매끄럽게 파고든 눈빛이 진우의 눈동자를 살벌하게 휘저었다. 눈빛과 반전되는 무심한 음성으로 남자가 다시 물어왔다.
“연예인은 이미지가 곧 얼굴이라던데, 맞습니까?”
남자가 휘두르겠다는 건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다. 연예인 생활을 산산조각내겠다는 그런 의미. 당신이 대체 뭐라고. 하지만 진우는 분한데도 감히 쏘아붙일 수 없었다. 눈앞의 적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서였다. 어느 집 자식이고 뭐 하는 놈인지, 얼마나 대단하고 잘난 집안 자식인지. 무지한 정보력에도 범접할 수 없는 남자의 아우라가 대신 속삭이고 있었다. 너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끗한 이미지 유지하고 싶으면, 이쯤 합시다.”
남자의 협박은 우아하고 정중했다.
“공인이면 공인답게, 결혼한 여자는 깨끗하게 머릿속에서 삭제해야지.”
무심할 만큼 부드럽게 말 속엔 진득한 맹독이 어려 있었다. 부르르 떨며 진우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천천히 한걸음 뒤로 물러나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붉은 피가 물에 씻겨 내려가고 상처만 깨끗하게 남은 손을 확인했다. 그러고선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화장실을 나갔다. 위압적인 남자가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멈추었던 뇌가 서서히 돌아간다. 남자가 사이코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꼬맹이한테 말해줘야 해.”
네가 내 마음을 거절해도 좋아. 어차피 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10년을 넘게 지켜봤는데 더 지켜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스케줄도 바빠서 연애에 집중할 여유도 안 되고. 시간이 흐르면 꼬맹인 저 남자를 잊을 테고 기회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고 기회가 오는 법이니까. 그래도 이건 꼬맹이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저 남자의 진짜 모습이 뭔지. 혹시라도 저 남자에게 푹 빠져서 나중에 마음 바꾸는 일이 없도록. 휙 돌아선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화장실의 황토벽이 움푹 파여 금이 길게 가 있었다. 사이코 괴물 새끼 같으니라고!
*** 어딜 감히, 손을 대려고 해. 화장실을 나오면서 강준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오른쪽 손등에서 번지는 홧홧한 열상에도 무감각해질 만큼. 곱씹어선 안 되는데 뇌에서 자꾸만 곱씹어진다. 아내를 바라보던 애틋한 눈빛, 손끝이라도 스쳐보겠다고 몰래 닿으려 했던 손길까지. 과거에 어떤 사이였는지 모르지만 아내가 김진우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김진우를 피해서 힐을 벗고 도망쳤고 고백을 거절했고, 오늘은 모른 척하려 했으니까. 그런데 네가 뭐라고 자꾸 다가오고 건드려서 주세희를 곤란하게 해. 남편인 나도 모른 척 눈감아주고 들추어내지 않고 있는데, 네가 감히 뭐라고. 말로 한 번, 행동으로 한 번. 이제 남은 건 그 경고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뿐. 가지고 있는 힘을 굳이 이용하지 않아도, 사실 방법은 쉬웠다.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이 결혼한 여자에게 고백하고 졸졸 쫓아다니는 꼴이라니. 언론사들이 침 흘릴 만한 제보가 되겠지. 식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강준은 조용히 식당 지배인을 찾았다. 벽에 대한 보상을 논한 후 자리에 앉자 태령은 미리 세팅된 반찬들을 맛보고 있었다. 강준이 맞은 편에 앉자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강준 씨, 여기 반찬도 너무 맛있어요.”
맛있는 걸 먹었을 때 무장해제되는 아내의 미소였다.
“이게 약초 장아찌라는 건데 맛도 있고 씹으면 씹을수록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한번 먹어봐요.”
아내가 장아찌 하나를 집어 먹어보라는 듯 강준의 입 앞에 대령했다. 먹고 싶지 않지만 아내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사실 지금 고기가 아니라 풀을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어서. 방금 거슬리는 놈한테 포악한 육식 동물처럼 으르렁거리고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 앞이었다. 풀이라도 천천히 씹으면서 유순한 초식 동물처럼 굴어야 했다. 드디어 복숭아에 절인 소불고기가 나왔다. 집게를 든 강준이 고기를 불판에 올리는 걸 바라보던 아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강준 씨, 손 왜 그래요?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왼손을 썼어야 했는데, 무심코 오른손이 나가버렸다.
“아, 화장실에서 살짝 긁혔어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한 강준이 집게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이미 봐버린 태령은 일어나서 강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른손 줘봐요.”
꿈쩍도 안 하는 남편을 태령은 말없이 노려보며 손을 내밀었다. ……손, 안 줄 거예요? 살벌한 눈빛으로 무언의 명령을 내리자 마지못해 태령의 손 위에 남편의 오른손이 놓였다. 마치 주인의 명령에 손을 내미는 대형견처럼. 딱 봐도 손의 상처는 꽤 심각했다.
“이게 어떻게 살짝 긁힌 거예요? 완전 살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태령은 잠시 호흡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피 많이 났을 것 같은데, 어떻게 했어요?”
“위생을 생각해서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었어요.”
상처가 무슨 야채인 줄 아나. 진지하게 대답하는 남편을 태령은 다시 말없이 노려보았다. 이실직고하라고. 하지만 강준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말 안 하겠다 이거죠?”
“…….”
“열심히 살찌우고 있었는데, 다시 다이어트…….”
“벌레 잡다가.”
남편의 변명이 기가 막혀서 태령은 빠르게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강준 씬 벌레를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아니 주먹으로 잡나 봐요?”
벌레가 대체 얼마나 크길래, 그리고 얼마나 세게 쳤길래. 솔직히 말하면 왜 다쳤느냐보다 남편의 상처가 더 신경 쓰였다. 많이 아팠을 것 같아서. 괜히 분하고 속상해서 눈가가 뜨거워질 만큼. 이렇게 감성적인 성격이 아닌데. 눈물 흘린 걸 손에 꼽을 만큼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태령의 침묵에 쩔쩔매던 남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자는 주먹이죠.”
진짜 말이라도 못 하면. 태산처럼 어른스럽고 단단하던 남자가 지금은 철없는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태령은 연숙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남자는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애라고, 잘 어르고 달래면서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태령은 남편의 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좋아서. 그래서 속상해서, 속상해서 죽을 것 같아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면, 이 남자가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눈에 밟힐 것 같아서. 물기 찬 눈으로 올려다보며 태령은 잔소리했다.
“바보예요? 나이가 몇 개인데 다치고 다녀요. 벌레를 주먹으로 잡냐구요.”
“정말 살짝 긁힌 거예요. 뼈도 멀쩡하고…….”
그 속도 모르고 살며시 허리를 기울인 남편이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부인이 좋아하는 손가락도 멀쩡한데.”
그것도 참으로 철딱서니 없는 대답을. 너무 기가 막혀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아 태령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상한 이 순간, 눈치 없이 야한 어흥이를 소환한 남편을. 완벽하고 냉철하던 이 남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능청스럽고 뻔뻔해진 걸까. 태령 자신만 바보가 된 게 아니었다. 서강준도 바보가 되었다. 사랑이란 이름 앞에서, 둘 다 바보처럼. 그래서 태령도 남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모르길 원한다면 모른 척해주는 것. 때론 그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걸 남편에게 배웠으니까.
“그래서, 벌레는 잡았어요?”
졌다는 듯 태령이 한숨처럼 묻자, 그제야 남편이 씨익 웃는다.
“빗나갔어요. 애꿎은 벽만 금이 좀 갔고.”
“……벽에 금이 갔다구요?”
“걱정하지 마요. 식당 지배인과 화장실 전체 벽 갈아주기로 보상 협의 봤으니.”
태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정말……!”
그 벌레가 대체 뭐길래 화장실 벽에 금이 갈 정도였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태령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 입안으로 잘 익은 고기가 쑥, 들어왔다.
“우선 고기부터 먹어요. 다 먹고 집에 가서 상처에 약 발라줘야지.”
기가 막혀서 바라보자 남편이 눈빛으로 사정을 해왔다. 한 번만 봐 달라고. 자신에게 쩔쩔매는 남편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지금 남편의 이 모습이 자신만 볼 수 있는 특권이란 걸 알아서. 복숭아에 절인 불고기가 너무 맛있기도 해서. 넘어가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주먹으로 벌레 잡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요.”
“약속할게요.”
남편이 엄중한 표정으로 맹세를 하는 그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우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잠시 태령을 빤히 바라보고선 고개를 홱 틀고 자리로 돌아갔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고기를 씹으면서 태령은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남편이 말한 그 벌레가 진우 오빤 아니겠지, 라는. *** 병원을 나온 후 알리샤의 일과는 조 여사가 짜놓은 계획표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새 신용카드와 핸드폰이 생겼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목적지와 동선, 누굴 만나고 연락하는지, 뭘 하고 시간을 보내는지도. 정신이 해이해진 딸을 제대로 틀어쥐겠다는 조 여사의 강력한 의지였다. 출국 시일이 다가오니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동생을 만나서 확인해야겠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애가 탔다. 다행스럽게도 조 여사가 동생과의 식사 자리에 자신을 대동했고 그때를 이용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같은 네일숍에서 손님처럼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기로 한 날. 차에서 내리는 알리샤의 뒤통수에 대고 조 여사의 운전기사가 로봇처럼 말했다.
“2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가씨.”
그렇게 차가 떠났다. 정오라서 그런지 피부에 좋지 않은 따가운 햇살이 작열했다. 챙모자를 푹 눌러쓰던 알리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갓길에 멈추어 선 억 소리 나는 고급 SUV. 그 차에서 내린 남자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띌 만큼 외모가 출중했다. 그래서 시선이 간 건데. 보닛을 돌아 온 남자가 조수석의 문을 연 순간, 알리샤의 얼굴이 굳었다. 남자의 손을 잡고 차에서 우아하게 내리는 여자는 동생이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얼굴도 눈에 익었다. 알리샤뿐만이 아니라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 쏠렸다. 그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는 비주얼 부부는 서로를 향한 애정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두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샤만이 질투가 뒤엉킨 시선으로 노려볼 뿐. 우아한 매너도, 너무 잘난 남편도, 남편의 다정한 애정도, 부러움 가득한 시선도. 원래는 다 내 것인데,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알리샤는 배가 아플 만큼 위가 뒤틀렸다.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서강준은 동생을 백화점 앞까지 다정하게 에스코트해주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은 우월한 피지컬로 또다시 시선을 잡아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과감히 접었던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 남자가, 저 남자의 아내 자리가. 저것도 하는데 내가 못할 건 뭔데. 남편이 서강준인데, 그 서강준이 저토록 다정하게 구는데.
“……매너가 끝내주게 좋댔지.”
문득 알리샤는 서강준을 테스트해보고 싶어졌다. 저 매너의 경계선이 궁금하다. 아내 한정일지, 아름다운 여자 한정일지. 남자는 다 그렇고 그런 존재니까. 또한 남자들이 보이는 매너가 곧 썸으로 바뀐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알리샤였다. 동생이 백화점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서강준은 몸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그걸 본 알리샤도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스틸레토 힐 소리가 경쾌하게 시멘트 바닥을 울렸다. 서로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알리샤는 의도적으로 챙모자를 푹 눌러쓰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서강준과 스치는 순간,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단단한 몸이 화강암 같았다. 살짝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11센티 하이힐을 신은 발목이 확 꺾일 만큼.
“……앗!”
서강준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