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이런, 빗나갔군. (53/110)

53. 이런, 빗나갔군.2021.10.03.

어젯밤 조 여사와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온 태령은 남편에게 먼저 말했다. 당신이랑 운동 같이하고 싶다고. 태령의 말에 강준은 전화 한 통화로 백제 호텔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을 구했다.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는 회원권을, 입회 보증금만 3억인 VVIP 회원 자격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태령이 헬스장에 들어서자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남자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여자들은 조금의 질투가 어린 시선을. 그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태령은 차분한 시선으로 헬스장을 훑었다. 드넓은 공간과 최신식 헬스 기구, 운동하기 좋은 탁 트인 전망, 한쪽에 잘 마련된 헬스 푸드 공간까지. 하지만 태령을 가장 놀라게 한 건 회원들 대부분의 연령층이 젊다는 거였다. 이런 곳에서 남편이 날마다 운동을 했다는 게 질투가 날 만큼. 우선 남편 먼저 찾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남편이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났다. 반겨줄 줄 알았는데, 묘한 눈빛으로 태령을 바라보더니 잠바를 벗어서 내밀었다. “이거 먼저 입을래요?” 땀복이 분명한데 왜 나를. 태령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남편이 말했다.

16564549007622.jpg“옷이 좀 야해 보여서.”

이번엔 태령이 조금 기가 막힌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타이트한 나시와 레깅스 차림에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긴 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 회원들의 옷차림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브라탑도 아니고, 가슴 부분이 확 파인 것도 아니니까. 태령의 눈빛에서 무언의 항의가 느껴졌는지 강준이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16564549007622.jpg“나도 압니다, 그냥 운동복인 거.”

근데요? 태령이 발끈하듯 노려보자 강준이 꽤 곤란한 표정으로 사과를 해왔다.

16564549007622.jpg“미안해요, 내가 많이 보수적이고 고지식해서.”

16564549007636.jpg“알긴 알아요?”

16564549007622.jpg“나도 방금 알았어요. 내가 이렇게 속 좁은 남자인지.”

투덜거리듯 대답한 강준이 슬그머니 어깨 위에 재킷을 걸쳐주었다. 허리를 기울인 후 부드럽게 눈을 맞추고선 싱긋 웃었다. 사람 화도 못 내게, 노려보지도 못하게.

16564549007622.jpg“그래도 어떡합니까? 다른 놈들이 내 부인 힐끔거리는 게 싫은데.”

마음 같아선 태령도 말하고 싶었다. 나도 젊고 예쁜 여자들이 많은 여기서 당신이 운동하는 게 싫다고, 질투 난다고. 하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끄럽다기보다는 지금껏 항상 속으로 꾹꾹 누르며 살아온 게 버릇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그때 슬그머니 손깍지를 낀 강준이 손끝으로 살살 손바닥을 문지르며 귓가에 속삭여왔다.

16564549007622.jpg“그러게, 누가 그렇게 예쁘라고 했나.”

다정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속삭임이었다. 차라리 강압적으로 말했다면 반항심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애교와 민망한 칭찬으로 무장해서 공격해오는데 어떻게 버텨. 조금 불편하고 더워도 내가 참아야지. 사실 태령은 남편이 드러내는 질투와 소유욕이 싫지 않았다. 이제 이런 걸 느낄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16564549007636.jpg“다음엔 좀 더 얌전한 옷으로 입을게요.”

태령의 얌전한 대답에 강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16564549007636.jpg“대신 커플 운동복 입어요. 준비는 제가 할게요. 같이 입어줄 거죠?”

16564549007622.jpg“뭐든 말만 해요. 부인이 명령만 내리면, 입는 거 벗는 거 다 해줄 테니까.”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어흥이로 변신하는 남편을 태령은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러자 강준은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16564549007622.jpg“가볍게 트레드밀부터 시작할까요?”

고개를 끄덕인 태령은 트레드밀에 올라가 천천히 속도를 높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2주. 따지고 보면 조 여사와의 거래는 실보단 득이 많았다. 조 여사 가족을 무너뜨릴 약점을 차례대로 손에 넣었다. 또한 이노패션을 통해 도라를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어 사업확장도 할 수 있게 되었고. 홀가분하고 기뻐야 마땅한데 난 왜 그렇지 못한 걸까. 태령의 시선이 바로 옆 트레드밀에서 뛰고 있는 남편에게 닿았다. 서강준 당신 때문에, 당신이라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지금 태령이 해줄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즐겁게 보내고, 마음껏 마음을 표현하고, 예쁜 추억을 만든 후 조용히 떠나주는. *** 가볍게 몸을 푼 후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강준은 훌륭한 트레이너였다. 보기보다 근력과 체력이 좋다고 칭찬받았지만 40분 만에 나가떨어졌다. 그만 나가자는 강준의 말에 태령은 고개를 내저었다.

16564549007636.jpg‘강준 씨가 운동하는 모습 보고 싶어요.’

창 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은 태령은 남편을 지켜보았다. 헬스장에서 운동 대신 트레이너와 수다를 떨던 경진과 재우가 남편에게 질질 끌려왔다. 무시무시한 눈빛 한 번에 두 친구는 죽는시늉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퍽 재밌는 상황에 태령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안 어울릴 듯하면서도 참 잘 어울리는 삼총사다. 형이 쌍둥이 동생을 돌보는 느낌이랄까. 그때 누군가가 태령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1656454903643.jpg“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오신 거 맞죠?”

시선을 틀자 모델처럼 늘씬하고 육감적인 몸매의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태령은 타인과의 교류가 익숙하지 않고 딱히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단답형으로 대답이 나왔다.

16564549007636.jpg“네.”

1656454903643.jpg“여기 회원권 구하기 힘들어서 새로운 회원 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뉴페이스 나타나면 반갑더라구요. 특히 동성.”

16564549007636.jpg“…….”

1656454903643.jpg“서로 알고 지내면 좋잖아요.”

여자는 꽤 친근하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런데도 태령이 반응이 없자, 미간을 살짝 구기더니 다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1656454903643.jpg“근데 운동 알려주신 분이랑은 어떤 관계예요? 친구? 친척? 아니면, 애인?”

여자는 평소 남편을 눈여겨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편은 태령과는 다른 이유로 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경진과 재우도 남편에 대해선 함구했을 테고. 여자 입장에선 정보도 알아낼 수 없고 접근도 못 하던 차에 자신이 나타난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묻는 거겠지. 이주 후 떠날 걸 생각하면, 남편을 위한다면, 태령은 적당히 둘러대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러기 싫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세상은 나에게 늘 못되게 굴었는데 왜 난 착한 척해야 하는데. 태령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16564549007636.jpg“남편이에요.”

애인도 아닌 남편이라는 호칭에 여자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후 태연하게 말했다.

1656454903643.jpg“아아, 혹시 쇼윈도? 하긴, 우리 부모님도 정략 결혼했는데. 이 세계가 원래 그렇잖아요.”

더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태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준에게 다가갔다. 태령을 먼저 발견한 경진과 재우가 구세주 보듯이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제발 이 녀석 좀 데리고 사라져주세요. 그 메시지를 접수한 태령은 남편의 뒤로 다가섰다.

16564549007636.jpg“강준 씨, 우리 그만 나가요. 나 배고파요.”

저승사자처럼 엄한 표정으로 돌아선 남편이 태령을 보고선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태령의 마음이 크게 한 번 일렁였다. 길게 뻗은 남편의 서늘한 눈매로 번지는 게 뭔지 너무도 선명히 느껴져서. 자신을 향한 사랑이고 자신으로 인해 남편이 느끼고 있는 행복이었다. 태령 또한 사랑하는 남자의 미소와 눈빛을 눈에 새기고 가슴에 각인했다. 단단한 허리에 팔을 두른 태령이 싱긋 웃자 남편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내가 먼저 한 애정 표현은 처음이니까. 하지만 강준은 이내 다정하게 물어왔다.

16564549007622.jpg“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지금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인 또는 부부 사이였다. 그래서일까. 태령은 뒤통수가 따가웠다. 경진과 재우, 그리고 접근했던 여자. 아니, 헬스장 안의 모든 이들이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서강준이라면 뭐든 괜찮다고 해줄 것 같아서. 내가 아무리 이기적으로 굴고 못되게 굴어도. 그 대신 나도 당신에게 뭐든 괜찮다고 해줄게요. 내가 떠난 후 당신이 날 찾지 않아도, 날 잊어도, 날 무심하게 바라보아도.

16564549007636.jpg“소고기요.”

그러니까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거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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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했다.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처럼 생긴 식당의 주차장에 들어서며 강준이 입을 열었다.

16564549007622.jpg“소불고기 맛집이라는데, 복숭아로 고기를 재워서 여자들이 좋아한대요.”

16564549007636.jpg“강준 씨가 이런 곳도 알아요?”

솔직히 태령은 조금 놀라서 물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칼질만 할 것 같은 남자가.

16564549007622.jpg“재우가 예약해놨는데 내가 웃돈 얹어주고 샀어요.”

16564549007636.jpg“저 아무거나 잘 먹어서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태령은 끝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벨트를 푼 강준이 다가와 손등으로 뺨을 부드럽게 쓸어서. 너무도 다정한 손길에 절로 눈이 감기자 나직한 음성이 스며든다.

16564549007622.jpg“내가 그러고 싶어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올리자 손길보다 더 다정한 눈빛과 마주쳤다.

16564549007622.jpg“뭐든 다 최선을 다해서 최고로 잘해주고 싶어요.”

이 남잔 알까. 이렇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내 심장이 얼마나 쿵쾅거리는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때문에 가슴까지 아릿하게 저려왔다. 이 손길을 더는 못 느끼고, 이 눈빛조차 더는 못 볼 거라는 두려움에.

16564549007636.jpg“고마워요.”

16564549007622.jpg“고마우면 한번 불러주든지.”

강준이 소리 없이 입술만 뻥긋거렸다. 여보라고. 부끄러움에 태령이 얼굴을 붉히자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남편은 차에서 내렸다.

16564549007622.jpg“내리시죠, 부인.”

차 문을 열어준 후 남편이 잡으라고 내민 커다란 손을 태령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고운데도 크고 남자다운 손이다. 때론 우아하고, 때론 시선을 잡아끌고, 때론 야하기도 한. 길고 단단한 손가락과 바짝 깎인 깨끗한 손톱. 남편의 눈만큼이나 이 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태령은 가만히 손을 잡았다. 이젠 손마저도 강렬하게 각인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크고 단단한 손이 작은 손을 포옥 감싸오는 이 느낌마저도. *** 야외 화보 촬영은 날씨에 좌지우지된다. 오후에 내린 갑작스러운 소나기 때문에 5시간이면 끝날 촬영이 10시간 넘도록 이어졌다. 촬영이 끝나자 모두 기진맥진 지쳤다. 그래서 진우는 하루를 같이 굶은 전우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왔다. 유명한 한우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매니저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1656454903643.jpg“여기 최소 일주일 전엔 예약해야 먹을 수 있는 식당인데 어떻게 한 거야?”

16564549092883.jpg“진댕이(진우 댕댕이) 팬클럽 부회장이 이 식당 첫째 딸이에요. 먹고 싶을 땐 언제든지 메시지 달라고 해서 한 통 날려줬죠.”

1656454903643.jpg“이야, 우리 진우 역시 요즘 대세 연예인!”

16564549092883.jpg“오늘 고생하셨으니 저녁은 제가 쏩니다! 맘껏 드십시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기쁨의 물개박수를 쳤다. 그때 창 너머를 무심코 바라보던 진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꼬맹이?

16564549092883.jpg“알아서 주문해놔요,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무언가에 홀린 듯 후다닥 일어난 진우가 주차장 쪽으로 향한 건 거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꼬맹이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발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빤히 쳐다보는 꼬맹이의 단정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적색 경고를 보내왔다. 아는 척하지 마. 그제야 진우의 눈에 가녀린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꼬맹이의 작은 몸에 밀착하듯 붙어 있는 남자도 진우를 보았다. 넌 내 상대가 안 된다는 듯, 무심히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오만했다. 꼬맹이가 사랑한다는, 다른 여자의 남편.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진우의 마음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여자가 앞에 있는데도, 그 여자가 옳지 못한 길을 걷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두 사람은 너무도 태연한 모습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문득 내리뜬 시야에 꼬맹이의 작은 손이 보였다. 널 모른 척해야 하지만. 이 마음을 드러내선 안 되지만. 그럼에도 진우는 꼬맹이와 손끝이라도 스치듯 닿아보고 싶었다.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하지만 그 작은 욕심마저도 가차 없이 내쳐졌다. 놀란 듯 내려다보자 진우의 손을 아프도록 쳐 낸 커다란 손이 보였다. 스윽 고개를 돌려 응시해오는 남자의 짙은 눈빛은 짐승의 송곳니처럼 날카롭고 포악했다. 당장이라도 진우를 찢어발길 것처럼. 두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 후 진우는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거울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진우는 벽에 기대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16564549092883.jpg“주세희, 어떻게 하냐. 포기가 안 되는데.”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꼬맹이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걸 보니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 마음이 제어가 안 됐다. 그렇다고 돌진하자니, 한다면 하고야 마는 꼬맹이의 성격을 알기에 겁이 난다. 직진도 안 되고 후진도 안 되고.

16564549092883.jpg“하아, 미치겠네.”

화장실에 누군가가 들어왔지만 진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리뜬 시야에 남자의 정교한 구두 굽이 밀려들기 전까진. 천천히 고개를 든 진우는 섬뜩할 만큼 새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이런 상황이 거북하고 불편한 진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얼굴 옆으로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곧이어 퍼억, 바로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16564549007622.jpg“이런, 빗나갔군.”

바닥을 긁듯이 낮게 흘러나온 묵직한 저음이 진우의 고막을 살벌하게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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