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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야한 어흥이. (52/110)

52. 야한 어흥이.2021.09.30.

태령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은 떴지만 몸 안에 잔류하는 열감 때문인지 몽롱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씻으면 현실 감각이 돌아올 것 같은데. 하지만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죽은 듯이 누워 눈만 깜빡거렸다. 그때 욕실 복도 끝에서 남편이 나타났다. 태령이 늘 추위에 웅크렸다면 남편은 항상 뜨거운 체온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침대맡에 걸터앉은 남편에게서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진다. 반쯤 몸을 일으켜 품을 파고드는 태령을 안으며 강준이 다정하게 말했다.

16564548768329.jpg“좀 더 자지 그래요.”

맞닿은 몸이 전하는 서늘함이 좋다고 생각하며 태령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젖은 머리칼, 모공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산뜻한 향기, 막 면도한 듯 푸르스름한 턱선. 이렇게 근사한 피사체가 있는데 어떻게 자. 남편은 기절하듯 잠이 든 자신과 달리 아주 산뜻하게 샤워를 마친 모습이었다. 정작 씻을 사람은 난데.

16564548768335.jpg“나 얼마나 잤어요?”

16564548768329.jpg“25분 정도.”

기다란 손끝이 다가와 살짝 부어 있는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준다. 그 손길에 또다시 떠올라버렸다. 단단한 몸이, 뜨거운 입술이, 부드러운 손놀림이, 지독히도 선연하게. 울었던 것 같고 매달렸던 것도 같다. 정작 남편은 끝까지 인내하고 참고 선을 넘지 않았는데. 왠지 남편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에 태령은 눈을 흘겼다.

16564548768335.jpg“내가 처음이라는 말, 거짓말이죠?”

16564548768329.jpg“나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아요.”

16564548768335.jpg“근데 어쩜 그렇게…….”

차마 말을 잊지 못한 태령은 발그레한 얼굴로 애꿎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깨물지 말라는 듯 입술을 어루만진 강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16564548768329.jpg“부인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공 좀 했지.”

16564548768335.jpg“당신 설마…….”

태령이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강준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16564548768329.jpg“날 뭐로 보고. 공부는 영상이 아닌 책으로 하자는 주의예요.”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강준이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16564548768329.jpg“이제 핸드폰 저장 이름 좀 바꿔주시죠, 부인?”

16564548768335.jpg“어디가 예뻐서요, 이기적이고 못됐는데.”

사람 기운 다 빼놓고, 자기 혼자 씻고, 멈추랬는데 멈추지도 않고, 나 혼자만 부끄럽게 만들고. 그런데 남편이 씨익 웃었다. 사이다의 기포가 터지듯 청량감이 느껴지는 그 미소에 태령은 기가 막혔다. 너무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 무슨 말을 해도 칭찬으로 듣는 것 같아서. 문득 연숙의 말이 절로 입안에서 맴돌았다. 망할 서 씨 남자들이라는.

16564548768329.jpg“이왕 바꾸는 거, 대범한 어흥이나 능숙한 어흥이 어때요?”

나직하게 말하는 남편의 음성에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16564548768335.jpg“꿈 깨시죠, 서강준 씨.”

16564548768329.jpg“그럼 뭐로 바꾸려고.”

뭐로 바꾸긴. 소심한 어흥이에서 야한 내 어흥이로 바꿔야지. 물론 궁금해 죽으라고 절대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지만. 태령은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6564548768335.jpg“괘씸죄로 노코멘트 할래요.”

어제 강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걸 그대로 따라 하자 남편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16564548768329.jpg“괘씸죄라니, 부인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나처럼 잘 참는 남편이 어디 있다고.”

16564548768335.jpg“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아까 멈추라고 할 때 배려 좀 해주지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멈추라고 했는데. 태령은 원망을 담은 눈으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16564548768329.jpg“우는 게 예뻐서.”

16564548768335.jpg“내가 울면 마음 아프다면서요.”

16564548768329.jpg“좋아서 우는 것 같길래, 더 해주라는 건 줄 알았지.”

16564548768335.jpg“서강준 씨!”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노려보는 태령을 남편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16564548768329.jpg“잘못했으니까 화내지 마요. 응?”

능청스럽게 굴 땐 언제고, 이젠 어흥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애교를 부려온다. 화도 못 내게.

16564548768329.jpg“고기 사 왔던데, 내가 맛있게 구워줄게요.”

16564548768335.jpg“……고기는 내가 강준 씨 구워주고 싶어서 산 거예요.”

생각해보면 강준은 아내에게 환영받을 남편이었다. 돈 잘 벌어다 주고, 오첩반상 차릴 필요 없이 고기만 구워주면 끝이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16564548768329.jpg“누가 구우면 어때요, 같이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지.”

속삭여오는 음성은 벨벳처럼 부드럽다.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태령은 종종 현실감을 잃는다. 결혼식 날, 그리고 공항에서 재회하던 날. 차가운 눈동자에 경멸을 한껏 담아 바라보던 남편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연해서.

16564548768329.jpg“그러니까 결혼식 전까지 많이 먹고 몸무게 50킬로 찍어야죠.”

설마 야한 어흥이께서 또 엉큼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16564548768329.jpg“워밍업에도 그렇게 기절하는데 본선에선 어쩌려고.”

맞네, 엉큼한 생각.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엉큼한 바람을 드러내는 야한 어흥이를 응징하기 위해 태령은 남편의 품에서 벗어났다. 작은 손이 베개를 움켜쥐는 걸 본 야한 어흥이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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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익, 타이밍 늦게 날아간 베개가 강준 대신 침실 문에 맞고 떨어졌다. *** 오늘은 태령이 정기적으로 조 여사와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늘 같은 장소, 같은 시간, 변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16564548823623.jpg“뭐 하니, 앉지 않고선.”

조 여사의 말에 태령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평소처럼 차분히 맞은 편에 앉은 태령은 조 여사의 옆에 앉아 있는 알리샤에게 말했다.

16564548768335.jpg“머리 잘랐네요, 언니.”

탐스럽게 긴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자르니 마른 얼굴과 치켜뜬 눈매가 더 강조되어 보인다. 하지만 긴 머리였을 때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도도하고 쌀쌀맞은 게 알리샤니까.

16564548823623.jpg“내가 자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비슷하게 맞추는 게 더 이상하지. 차라리 변화를 주는 게 눈치 못 챌 거야.”

참 빨리도 아셨네요. 태령은 속으로 비소를 흘렸다. 서강준이 돌아온 이상,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게 더 위험한 거였다. 차라리 살을 확 빼고 이미지를 바꾸려고 했다고 둘러대는 게 더 나을지도. 한 달은 충분히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시간이니까. 결론은 몸무게를 맞추라는 건 순전히 태령을 괴롭히기 위한 조 여사의 억지였다. 맘 편히 먹는 것조차 꼴 보기 싫었을 테니.

16564548823623.jpg“그래서, 넌 얼마나 쪘니?”

태령의 위아래를 훑는 조 여사의 눈빛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16564548768335.jpg“3킬로요.”

강준이 삼시 세끼를 고열량으로 챙기는 바람에 살이 안 찔 수가 없었다.

16564548823623.jpg“이젠 아주 대놓고 팔자 좋구나. 얼굴에 윤기가 좔좔 흘러. 너도 똑똑히 보렴. 네가 멍청하게 구는 사이에 저 영악한 것이 남편을 등에 업고 네 자리를 어떻게 꿰찼는지.”

조 여사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알리샤를 보았다.

16564548823623.jpg“서 사장만 홀린 줄 알아? 서 회장님과 네 아빠까지, 남자란 남자는 아주 죄다 홀려놨어! 피는 못 속인다고, 제 엄마처럼 천박하게 남자 홀리는 재주는 아주 제대로 물려받았어.”

그제야 알리샤의 건조한 눈이 태령을 찬찬히 살핀다. 반짝임을 머금은 뽀얀 피부, 붉은 입술, 생기가 도는 뺨, 길고 곧게 뻗은 목선. 태령이 손에 끼고 있는 물방울 모양의 핑크빛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16564548852701.jpg“내 남편이 사랑을 듬뿍 주나 봐, 그치?”

이제 알 것 같았다. 이 자리에 필요 없는 알리샤를 조 여사가 굳이 대동한 이유. 보고 자극받으라는 거였다. 네가 말라가는 동안 네 자리를 차지한 대타가 활짝 핀 꽃처럼 얼마나 싱그러운지.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독하게 마음먹고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16564548823623.jpg“서 사장이 다다음 주에 미국 출장을 떠난다지? 유럽까지 방문하는 일정이라 적어도 10일은 걸린다는데. 갔다 와선 주말도 뺄 수 없을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이고.”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태령은 불안한 눈빛으로 조 여사를 보았다.

16564548823623.jpg“서 사장 출장 가면 너도 알리샤와 함께 독일로 떠나렴. 그때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생각이다.”

출장, 제자리, 독일. 태령은 시야가 아찔해지며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느닷없이 그 끝이 다가올 줄은 몰랐다. 가만히 내리깐 시선 끝에 어젯밤의 남편이 떠올랐다. 다정하고 부드럽고 야했던, 애틋하고 짓궂고 능청스러웠던, 그 남자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태령은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16564548768335.jpg“그 뜻은…… 남은 한 달에서 기한을 더 줄인다는 말씀인가요?”

예리한 눈으로 태령을 보고 있던 조 여사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16564548823623.jpg“남은 기한은 독일에서 채우라는 뜻이야. 네 몫을 제대로 하고 나면 계약서도 새롭게 써주고 이노패션 지분도 넘겨주마.”

조 여사의 시선이 얄리샤에게 향했다.

16564548823623.jpg“일이라도 잘하면 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나 보구나. 저 영악한 것이 독기 바짝 올라서 일에 매달린 걸 보면 말이야.”

덩달아 태령도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16564548823623.jpg“이노패션이 유럽 각지 백화점에 외국 명품 브랜드로 입점하기로 되어 있단다. 독일에서 저 것한테 인수인계 제대로 받고 오렴.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란 뜻이야.”

알리샤는 조 여사에게 대답하는 대신 공허한 시선으로 창밖 정원을 바라보았다. 짧게 혀를 찬 조 여사가 다시 태령에게 말했다.

16564548823623.jpg“넌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서 사장에 대한 정보 책임지고 모조리 내 딸한테 입력시켜 놔. 그간 서강준과 있었던 일들, 어떻게 서강준을 홀려놨는지까지 죄다. 알겠니?”

16564548768335.jpg“노력할게요.”

그때 알리샤가 고개를 들어 태령을 똑바로 응시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16564548823623.jpg“이만 일어나자꾸나. 더러운 게 옆에 있으면 입맛이 떨어지니 저녁은 다른 데서 먹자꾸나. 엄마가 맛있는 것 사줄 테니.”

조 여사가 일어났고 알리샤도 따라 일어났다. 그렇게 식사 자리는 끝이 났다. 아니,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알리샤가 나가기 전 조 여사 몰래 태령의 무릎 위에 작은 쪽지를 한 장 떨어뜨렸다. *** 백제 호텔 피트니스 클럽. 강준이 운동을 빠지자 얼씨구나 했던 경진과 재우는 일주일 만에 끌려 나왔다. 최고 중량의 바벨을 들어 올리는 강준을 두 남자는 두려워하면서도 경건하게 바라보는 중이다.

16564548881234.jpg“슬림한 근육 봐라. 저렇게 광적으로 운동하는데 왜 저 녀석은 헐크가 안 되지?”

키도 크고 골격도 크지만 강준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근육들은 날렵하면서도 탄탄했다. 몸빼바지를 입어도 모델핏이 나올 만큼.

16564548881234.jpg“강준인 운동 안 해도 저 체격 유지할걸? 그냥 유전적으로 타고난 거야.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로 태어나서 풀만 뜯어먹고 몸매를 유지하는 야생마처럼.”

근육질의 야생마. 재우의 딱 좋은 비유에 경진이 감탄하며 말했다.

16564548881234.jpg“근데 오늘은 웬일로 격한 스포츠를 마다하고 얌전하게 기구 운동을 하고 있냐. 저걸로 성에 차려나, 근육질 야생마께서.”

16564548881234.jpg“오늘도 지각한 네가 뭘 알겠냐. 오늘 귀한 님이 여기 온다는 전화 받더니 땀 냄새나면 안 된단다.”

16564548881234.jpg“귀한 님이 누구길래 하필 헬스장에서 만나? 얼마나 빡시게 굴리려고.”

16564548881234.jpg“강준이한테 귀한 님이 아내 말고 더 있겠냐?”

16564548881234.jpg“헐. 부부가 나란히 여기서 알콩달콩 운동하는 눈꼴 시린 모습을 보라고?”

그렇지 않아도 강준에게 사랑 안 하고 결혼 안 한 죄로 실컷 무시당하는 중이다. 그뿐인가. 얼마나 아내에 대해 자랑질을 하고 사랑꾼 티를 내는지, 배 아플 지경인데. 귀로 듣는 것도 모자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생겼다니, 경진은 끔찍했다. 그런데 재우는 오히려 싱글벙글 웃고 있다.

16564548881234.jpg“눈꼴 시릴지 재밌는 구경하게 될지, 어떻게 알아?”

16564548881234.jpg“뭔 소리야.”

16564548881234.jpg“부부끼리도 운전 강습은 해주지 말란 말 있잖아. 운동도 마찬가지야. 태령 씨가 여리한 몸으로 1킬로도 못 들 게 뻔한데. 저 근육질 야생마께서 퍽이나 웃으면서 잘했어요, 우쭈주 해줄까?”

16564548881234.jpg“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재우야, 우리 오랜만에 내기할래?”

16564548881234.jpg“당연히 콜.”

두 친구가 자신을 두고 또 내기하는지 모르는 강준은 오매불망 아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저녁을 먹다가 아내가 불현듯 물었다.

16564548768335.jpg‘강준 씨 근데 요즘 왜 운동 안 해요? 잠은 안 자도 운동은 절대 안 빠지는 사람이.’

타이트한 일정에 운동 시간을 빼지 않으면 아내와 시간을 보낼 수 없어서였다. 그 속내를 읽은 아내가 내일부터 같이 운동하자고 제안했다. 한 달만 같이 운동해 보고 할 만하면 계속 같이 하겠다고. 가만히 있어도 예뻐 죽겠는데 말도 예쁘게 하면 어쩌라는 건지. 그때 강준의 뒤에서 남자들이 웅성거렸다.

16564548881234.jpg“오오, 뉴페이스 장난 아닌데?”

16564548881234.jpg“여기 회원이면 수준도 비슷할 텐데, 어느 집 딸일까. 운동 알려주는 척 말 한번 걸어 봐?”

16564548881234.jpg“너 실패하면 내가 도전.”

한정된 인원이 이용하는 회원제인 만큼 뉴페이스가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다. 새로운 회원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시선이 쏠리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강준은 딱히 관심도 없었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경진과 재우가 쪼르르 달려와 보고하기 전까지는.

16564548881234.jpg“서강준, 아내분이 메두사란 별명 말고 피트니스 여신이라는 별명도 있었냐?”

얄밉게도 웃으며 두 남자가 동시에 강준의 뒤를 눈짓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강준은 하마터면 무거운 바벨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모든 남자 회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다가서는 아내를 본 순간 강준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회원권만 끊어줄 게 아니라 운동복도 골라줬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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