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가 왜 소심한 어흥이입니까?2021.09.26.
결혼식을 다시 하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진 태령은 창 너머 아름다운 신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왜 대답이 없냐고 한마디 할 법한데, 남편은 고요히 태령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태령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묵묵한 기다림에 서글플 만큼 가슴이 아려온다. 내가 뭐라고 이 남잔 이러는 걸까, 정말 바보 같아. 한참의 침묵 후, 강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는 다 예쁘다던데.”
태령도 그렇게 생각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눈부신 티아라를 쓰고,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플라워가든의 여왕 꽃처럼 활짝 핀 오늘의 신부는 더 아름다웠다.
“강준 씨 말대로 신부가 예쁘긴 하네요.”
“내가 언제 예쁘다고 했나?”
무심한 말투에 끌려 시선을 돌리자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강준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당신이…….”
강준이 피식, 웃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죠. 예쁜지 모르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예쁜지 모르겠다고? 도대체 왜? 태령이 다시 통창 너머 신부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근데 당신은 예쁠 것 같아.”
태령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강준을 보았다. 칭찬에 면역이 없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입술만 잘근거릴 뿐.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 보고 싶은데.”
이 남잔 왜 자꾸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걸까. 왜 매번 날 이렇게 흔들까.
“그래 줄 수 있어요?”
그때까지도 강준은 태령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떨리는 눈동자가, 질끈 깨문 입술이, 살짝 흐트러진 가녀린 숨결이. 아내가 뭘 고민하는지 알게 해준다. 하여간 뭐든지 어렵게 생각하지. 그럼 내가 쉽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결혼식 뭐 별거 있나. 우리 둘이 잘 차려입고 서약하면 그게 결혼식이지.”
담담한 음성과 달리 강준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그때 결혼식은 허울뿐인 결혼식이었다. 신부를 제대로 보지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격식과 절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고.”
아내가 유태령이란 이름을 유지하는 이상 격식과 절차는 깰 수 없다. 결혼식보다 먼저 바로잡아야 할 혼인신고조차. 법적인 문제는 때를 기다렸다가 처리하면 된다. 하지만 결혼식만큼은 다시 올리고 싶었다. 유태령이 아니라 주세희와. 나중에 제대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지만 우선 아쉬운 대로. 좋고 예쁜 건 몇 번이고 해도 나쁠 게 없으니까. 그러라고 리마인드웨딩도 있는 거 아닌가.
“마음에 드는 장소 통째로 빌려서 우리 둘이 파티하는 거라 생각해요.”
이봐, 쉽고 간단하잖아. 그러니 좀 넘어와 주라고, 주세희. 그런데 허락을 할 것처럼 달싹거리던 아내의 입술이 다시 다물렸다. 내리깐 풍성한 속눈썹이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애가 달은 강준은 아내에게 마지막 획을 그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 둘이서만 비밀스럽게.”
결혼식 증인으로 경진과 재우는 부를까 했지만, 그마저도 접고 달콤하게 유혹했다. 이래도 웨딩드레스 안 입어줄 거냐고.
“고개만 끄덕여줘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응?”
천천히 고개를 든 아내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강준을 빤히 바라본다. 설마, 거절하기 미안해서 그러나. 걱정이 밀려드는 순간, 아내가 속삭이듯 조심히 물어왔다.
“이번엔…… 나 버리고 어디 안 갈 거예요?”
강준은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떠나버렸던 자신이 떠올라서. 아무리 대타 결혼을 한 거라도 상처였을 것이다. 민망함에 강준은 긴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이제 내 유일한 자리는 주세희 네 옆인데.
“안 가요, 안 갑니다.”
“신혼여행도 가구요?”
짐승 같은 촉이 발동했다. 신혼여행도 간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거기까진 생각 못 했지만, 강준은 빠르게 대답했다.
“제일 중요한 건데 당연히 가야죠.”
대답 대신 아내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강준을 길게 바라보았다.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순간, 아내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미소가 뭐라고, 그 끄덕임이 뭐라고. 어두웠던 세상이 비로소 환해졌다. 이런 기분이구나. 사랑하는 여자의 눈빛 한 번에, 미소 한 번에, 세상의 빛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건. 하지만 미소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강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날짜 잡읍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일정을 바로 잡아버리면 나중에 딴말 못 하겠지.
*** 이틀 후, 한신 자동차 본사 대표실. 윤 실장이 제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확인했다.
“그러니까 사장님 말씀은, 미국 출장 가기 전 하루도 아닌 삼일을…… 통째로 비우라는 뜻입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울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윤 실장에게 강준은 가볍게 까딱했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일주일 치 결재안과 보고서를 모조리 가져오라 할 때 불안하다 했더니.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자꾸 이러시면 저 사표 냅니다. 윤 실장이 어떻게 한번 반기를 들어볼까 고민하는 그때.
“윤 실장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비워봐요. 그럼 미국 출장 갔다 와서 이주일 휴가 줄 테니.”
윤 실장으로선 지금까지 듣던 말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특히 미국 출장 이후의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일주일만 빠질 수 있다면. 강준의 비서가 된 후 3년간 독일에 머무른 덕에 가족들과 못 간 휴가도 이참에 가고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나 더. 윤 실장 여동생, 웨딩 플래너 아직도 합니까?”
내가 그런 말까지 했던가. 윤 실장이 기억을 더듬으니 일 년 전 스치듯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괴물 같은 기억력이 사소한 것에도 발동하나 보다.
“그렇습니다만.”
강준이 내미는 봉투를 윤 실장은 얼떨결에 받았다.
“보수는 천만 원.”
“……?”
“이 안의 내용에 맞게 내일까지 세 가지 플랜 짜서 넘기는 게 조건입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강준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법인 카드도 아닌 무려 개인 카드였다.
“그간 고생했어요. 백화점 가서 아내분 가방 직접 쇼핑하게 해줘요. 그리고 윤 실장 보너스는 별도로 입금해주죠. 동생분 보수보다 정확히 세배 금액으로.”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 이 미친 재벌 3세 클라스! 업무량이 많아서 그렇지 강준은 갑질 안 하는 점잖은 재벌이었다. 윤 실장은 뜨거운 충성을 평생토록 맹세하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제야 강준은 캘린더를 바라보며 빠르게 계산을 두드렸다. 대통령과 동행하는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 참여를 위해 잡힌 미국 출장. 미국 일정은 3박 4일이지만, 이왕 간 김에 유럽 지사와 협력사도 돌아봐야 한다. 결론은 최소 10일 정도 소요되는 출장.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귀국 후 일정이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출장 전에 어떻게든 결혼식을 올리려는 거였다. 법적인 효력은 없더라도, 주세희 마음에 족쇄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에. 요즘 들어 변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아내가 등 뒤에 날개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기우이길 바라며 강준은 다시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했다. *** 도라가 이노패션에 지분 전량을 매각하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승인만을 남겨둔 상황. 대대적으로 기사가 났고 그걸 핑계로 태령은 오후에 도라를 방문했다. 3년 9개월 만이었다.
“와, 200억이라니 대박. 내 돈이 아닌데도 나 손 떨려, 세희야.”
진경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짜 도라의 주인인 태령은 잔잔히 웃고 있을 뿐이다.
“근데 세희 너 나 너무 믿는 거 아니야?”
“왜 나 몰래 뒷돈 좀 챙겨놨어?”
“야아! 날 뭐로 보고! 그런 적 없지만 그럴 머리도 안 되거든?”
“알아, 널 너무 잘 알아서 믿고 너한테 맡긴 거 알잖아. 그래서 고맙게 생각해. 너 아니었으면 나 버티지 못했을 거야.”
진경과 알리샤는 공통점이 있었다. 머리 아픈 건 질색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것. 공부하고 일하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하는 파티광이라는 것. 그런 진경을 도라 대표에 앉혀놓고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주며 뒤에서 태령이 진두지휘했다. 주식회사로 상장할 땐 지분 100%를 진경이 보유하도록 했다. 대신 계약서를 작성하고 공증까지 받아놨지만.
“고마운 건 나지. 너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겠어? 대표직 물러나면 세계 일주 한번 떠나볼까 생각 중이야.”
허울뿐인 대표도 대표라고 그간 제대로 놀지 못했으니까. 진경은 알고 있었다. 이노패션에서 도라를 인수하고 유태령이 다시 주세희가 되면, 자신의 역할은 끝난다는 걸. 지금까지 도라의 지분 100%는 진경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최근 모두 세희에게 넘겼다. 세희는 그간 고생했다며 한 몫 단단히 챙겨줬고 진경은 그걸로 만족했다. 지금 당장 배신하고 개고생하느니 똑똑한 친구 덕을 평생 보는 게 나으니까.
“진경아, 난 네가 계속 회사에 남아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난 이노패션 대표에 내 이름으로 당당히 오르고, 넌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날 보좌하고.”
백수가 되는 것보단 나으니 혹하는 제안이지만 진경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도라야 대표직에 앉아 있어서 눈 감고 아웅 해도 많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되니까. 하지만 대기업에선 밑바닥 드러나는 게 순식간이다, 무슨 망신을 당하라고.
“내가 무슨 능력으로? 어후, 나 자신 없어.”
격하게 내젓는 진경의 손을 태령이 다정히 잡았다.
“너 스스로 헤쳐나가는 능력은 없지만 보좌하고 보태주는 능력은 끝내주잖아. 지금까지도 내가 뼈대를 만들면 살 붙이고 실행하는 건 다 네가 했어. 너 능력 좋다구, 김진경.”
“세희야…….”
태령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진경은 잘만 이끌어주면 누구보다 빛이 나는 인재였다. 또한 직업이 없으면 진경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삶을 살지 알기에 이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
“나 너한테 미리 스카우트 제의하러 온 거야. 귀하게 모실……!”
갑자기 태령을 껴안은 진경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넌 내게 망망대해의 돛대 같은 존재라고 수도 없이 말하면서. *** 밤 10시가 넘어서야 강준은 집에 도착했다. 불이 켜져 환한 공간, 온기 어린 공기, 공기 중에 희미하게 배인 아내의 체취. 그런데 정작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퇴근할 때 전화하니 분명 집이라고 했는데. 집안을 훑는 강준의 눈에 초조함과 불안함이 번진다. 그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둘만의 결혼식도 올리겠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민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 왜 나는 더 불안한 거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자 주방에서 벨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서 울리는 아내의 핸드폰을 집은 강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액정에 자신의 번호가 뜨고 저장된 이름이…….
“소심한 어흥이?”
내가 왜, 어딜 봐서. 그때 도어록 누르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로 나가자 마트에 갔다 왔는지 봉투를 든 아내가 웃으며 다가왔다.
“빨리 도착했네요?”
그야 당연히 네가 보고 싶어서. 강준은 가까이 다가온 아내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걱정되니까 핸드폰은 꼭 가지고 다녀요.”
“앞에 마트 잠깐 가는 거라 안 가지고 나간 거예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아내의 번호로 전화를 건 후 벨소리가 울리자 강준은 담담히 물었다.
“내가 왜 소심한 어흥이입니까?”
꽃잎 같은 아내의 입술이 사르륵 벌어졌다. 당황하는 게 역력한 표정의 아내에게 강준은 좀 더 다가갔다. 위험을 감지했는지 시선을 피하며 아내가 살며시 뒷걸음질 쳤다. 어딜 도망가시려고. 눈치를 보더니 휙 돌아서는 아내의 어깨와 무릎 뒤에 손을 밀어 넣어 안아 올렸다. 얼떨결에 강준의 목에 팔을 감은 아내의 입에서 귀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는 그 말에 강준의 자존심이 더 상했다. 정말 소심한 어흥이가 된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다문 채 강준이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아내가 조심히 물었다.
“침실은 갑자기 왜 가요?”
“왜 갈 것 같아요.”
대답 대신 태령은 떨리는 긴 속눈썹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그 모습조차 심장이 뻐근할 만큼 예쁜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준은 유리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아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짙은 눈빛으로 아내를 내려다보며 일부러 느릿한 손길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 남편이 얼마나 대범한 어흥이인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면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