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결혼식, 다시 할까요.2021.09.23.
도톰한 아랫입술을 베어 물자 과즙 터지듯이 단맛이 밀려들었다. 그 달콤함이 강준의 심장을 아프도록 꽉 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이성이 흐려지면 안 되는데. 배려를 잊으면 안 되는데. 목을 감고 있던 가느다란 팔이 스르륵 올라와 강준의 머리에 닿았다. 어루만지듯 머리칼을 헤집는 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지독히도 요염했다. 겨우 참고 있던 갈증이, 얄팍하게 쥐고 있던 이성이, 아내의 손길에 툭, 끊어졌다. 목 안에서 으르렁거리듯 짐승의 울음소리가 났다. 입술을 뗀 강준은 아내의 가녀린 목에 얼굴을 묻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첫날밤처럼 제 안의 야생마가 미쳐 날뛰게 할 순 없으니까. 지금 강준에게 필요한 건 잠시의 시간과 여유였다. 길고 느리게 몇 번 숨을 토해내자 들끓던 욕망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수리를 간질이는 아내의 숨결이 예사롭지 않다. 천천히 얼굴을 든 강준은 제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배려해주겠다고 힘겹게 본능을 다스리는 동안, 아내는 꿈나라로 빠져드는 중이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굴면 안 되지. 사람 활활 태워놓고선, 사람 미치게 해놓고선. 차마 흔들어 깨우진 못하겠고, 강준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아내를 불러보았다.
“주세희.”
“……으응.”
대답이라도 못 하면. 피식 웃으며 이번엔 좀 더 다정하게 불러본다.
“세희야.”
“……으음.”
다시 한번 부르자 아내는 웅얼거리듯 대답하며 강준의 품을 파고들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사심 없이, 온기를 찾아서. 내 몸은 이렇게 달구어놓고선, 아기 새처럼 보호 본능을 일으키며 안겨 오면 어쩌라는 건지.
“이러는 건 반칙이지, 응?”
그럼에도 또 져줄 수밖에 없는 강준이다. 아내를 이겨서 뭐 할 건데. 져주는 게 이기는 거고 행복한 거고, 그게 사랑인 거지. 사랑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거룩한 순간이었다. 옆으로 누운 강준은 팔로 얼굴을 괸 후 잠이 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세희,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강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아내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하지만, 이거 하나는 정확히 알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정신을 놓고 흐트러질 아내가 아니라는 것. 일어나면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바로 접었다. 묻는다고 곱게 대답해 줄 아내가 아니니까.
“씻고 자야 푹 잘 텐데.”
강준의 마음 같아선 샤워시켜 주고 싶지만. 느낌상 그랬다간 다음날 왠지 아내에게 미운털이 박힐 것 같고.
“……어쩐다.”
강준은 우선 아내에게 공주님 안기를 시전했다. 보이는 곳만 씻겨주는 건 뭐라고 안 하겠지. 그대로 욕실로 향해서 아내를 품에 안고 씻겨주었다. 양치도 시키고 세수도 시키고 보이는 곳은 어디든, 구석구석. 다행히 아내는 잠결에도 강준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참 좋은 잠버릇이고 술버릇이었다. 샤워기를 손에서 놓았을 때 두 사람 모두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군가를 씻겨 본 경험이 없어서였다. 강준은 아내의 겉옷을 벗기고 가운으로 갈아입힌 후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선 자신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웠다. 기다렸다는 듯 아내가 품을 파고든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강준은 아내의 귓가에 속삭여 본다.
“여보라고 불러봐요.”
“……여보.”
“사랑한다고 해봐요.”
“……사랑해요.”
빈틈없는 아내가 술에 취하니 완전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술 취한 것도 예쁘고 자는 것도 예쁜데, 하는 말까지 예쁘면 곤란한데. 곱게 재워주기 싫어졌다. ……다시 한번 깨워 봐? 갈등하며 강준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작은 얼굴에 부서지듯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절대 깨우면 안 될 것 같은 고요한 아름다움에 심장이 저릿했다. 못 깨워, 이렇게 예쁘게 자는데 어떻게 깨워. 깨우면 짐승이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강준은 아내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잘 자요, 부인.”
제 속을 바짝 태워놓고 잠이 든 건 얄밉지만, 그래도 사랑하니까. *** 태령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남편의 팔을 베고 잠이 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집이 아니라 호텔 방일까. 나는 왜 가운을 입고 있고, 남편은 벗고 있을까. 평소에도 상의를 항상 벗고 자는 남편이 오늘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시트를 내려서 확인할 용기는 없다. 조심스럽게 남편의 품에서 벗어나 상체를 세운 태령이 중얼거렸다.
“필름이 끊기다니.”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호텔 바에 도착해서 술을 마신 것까진 기억한다. 양주 한 병을 다 마신 후 더 주문한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이후는 기억하려고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양주도 많이 마시면 숙취가 있는 걸 처음 아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홀리듯이 시선이 남편에게 향했다. 남편보다 먼저 일어난 적이 처음이라 잠이 든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조각처럼 다듬어진 피지컬에 조명을 보태주었다. 슈트를 소화하는 몸도 멋있지만 확실히 벗으면 더 근사한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령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날렵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역삼각형의 상체가 완벽에 가까웠다. 단단한데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만 만졌으면 하는데.”
낮게 잠긴 음성이 들려오고 남편에게 손목이 잡혔다. 반쯤 내리뜬 눈꺼풀 밑으로 탁하게 풀린 검은 눈동자가 태령을 보고 있었다.
“아침은 내가 좀 예민해서.”
막 잠에서 깨어났는데 뭐가 예민하단 건지. 무심코 내려갔다 다시 빠르게 올라온 눈동자가 격하게 진동했다. 얼굴은 빨개지고, 심장은 두근거리고. 태령은 시선을 피하며 속삭이듯 사과했다.
“미안해요. 불순한 의도로 만진 건 절대 아니었어요.”
“미안하면 한 번 더 불러주든지.”
“……?”
“여보라고.”
태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
“전화해서 그렇게 부르니 일도 때려치우고 달려왔어요.”
대답 대신 슬그머니 핸드폰을 확인한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지막 발신목록이 소심한 어흥이였다. 미쳤어, 어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태령의 침묵에 남편이 가늘게 뜬 눈으로 취조하듯 물어왔다.
“설마 기억 안 나요?”
……아, 쥐구멍.
“그럼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쥐구멍은 안 보이고, 발뺌해봤자 들통날 것도 뻔하고. 그래서 태령은 빠르게 이실직고했다.
“술 마신 건 기억해요. 그런데 강준 씨는 어젯밤 제 기억에 없어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태령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지만, 필름이 끊긴 죄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쉽네, 그 좋은 일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게.”
야릇한 의미가 함축된 것 같아 태령은 얼굴을 들었다. 남편의 가늘어진 눈매에 음험한 기운이 농밀하다. 설마, 아니겠지. 불안함이 넘실거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태령은 최대한 태연히 물었다.
“어제 우리…… 무슨 일 없었죠?”
그때 남편이 불쑥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하체를 가리고 있던 시트가 흘러내렸다. 꺄악, 작게 비명을 내지른 태령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린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엉큼하시기는.”
웃음기 배인 나직한 음성과 함께 이마로 아프지 않은 자극이 느껴졌다. 살며시 손가락을 벌리자, 웃음을 참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조금 내려간 시야에 남편이 입고 있는 파자마도. 태령은 가자미 눈으로 강준을 노려보았다. 바지 입었으면서 왜 분위기를 야하게 흘려서 사람 헷갈리게 하는지. 아니면, 내 뇌가 불순해진 걸까. 하아, 모르겠다. 남편과 있으면 늘 자신답지 않은 모습이 불쑥불쑥 나오니까. 어쩌면 이게 진짜 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태령은 체념하듯 다시 말했다.
“대답해줘요.”
“괘씸죄로 노코멘트.”
남편이 싱긋 웃으며 얄밉게 대답했다.
“내가 왜 괘씸, 꺄앗!”
이번엔 태령의 입에서 진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등이 시트에 파묻히면서 남편이 태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유로운 미소와 달리 전혀 그렇지 못한 뜨거운 눈. 덩달아 태령의 심장까지 뜨겁게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태령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요.”
한입에 꿀꺽 집어삼킬 것처럼. 잔인하고 포악스러운 눈빛인데도 잡아먹히고 싶어지게.
“보고만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짙은 눈빛이 손길처럼 피부 곳곳에 와닿았다. 으르렁거리듯 포효하는 뜨거운 눈이 닿은 곳마다 얇은 표피 아래 열감이 피어올랐다.
“지금 씻으러 안 가면, 내 머릿속 상상을 행동에 옮길지도 모릅니다.”
진지하게 경고를 한 남편이 몸에서 내려온 순간, 태령은 스프링처럼 일어나 욕실로 내달렸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리고 있었다. 아침의 남편은 지독할 만큼 섹시하게 위험했다. 눈빛만으로도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가다니. 욕실에서 가운을 벗은 태령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알코올에 뇌가 녹아버린 것 같은 어젯밤의 기억을. 남편이 너무 섹시하게 능청을 떨어서 깜빡 속아 넘어간 거였다.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새하얀 눈밭처럼 깨끗한 피부와 근육통 하나 없이 멀쩡한 몸이 그 증거였다. *** 다시 한번 느끼지만 남편은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였다. 태령의 옷과 속옷, 신발을 준비해놓았고 호텔 레스토랑에 브런치까지 예약해놓았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자마자 색감 좋은 디저트가 주르륵 나열되었다. 얼핏 봐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게 브런치라고 하기엔 과했다.
“이 레스토랑이 디저트로 유명해요. 그러니 하나씩 천천히 맛봐요.”
강준의 설명에 태령은 기가 막힌 듯 물었다.
“이걸 다요?”
“먹고 살 좀 찌라고.”
이상하다. 왜 남편이 조 여사보다 내 몸무게에 더 집착하는 걸까.
“왜 자꾸 내 몸무게에 집착해요?”
“매너 있는 대답을 원해요, 솔직한 대답을 원해요.”
“……매너 있는 대답이요.”
“부인이 너무 작고 가늘고 여린 게 신경 쓰여서라고 합시다.”
빈껍데기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에 태령은 머뭇머뭇 물었다.
“솔직한 대답은 뭔데요?”
“너무 가냘파서 날 감당 못 할까 봐.”
남편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다음 이어질 말이 ‘침대에서’라는 걸.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는 태령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지금껏 남편이 참은 이유가 황당한데도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다음 날 하루 종일 끙끙 앓긴 했으니까. 민망함에 디저트 그릇을 하나 가져왔다. 앙증맞은 카늘레를 한 입 맛본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너무 맛있어요.”
겉은 바삭한데 속은 달콤하고 촉촉했다.
“디저트로 유명하댔잖아요. 다른 것도 먹어봐요.”
고개를 끄덕인 태령은 이번엔 망고 무스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그때 강준의 앞에 소스 없이 핏물을 머금은 스테이크가 놓였다. 태령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스테이크 간은 된 거죠?”
“시즈닝만 살짝.”
태령도 음식의 간이 센 것보다 삼삼한 걸 좋아했다. 근데 저건 너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써는 남편의 동작은 유려하면서도 우아했다. 하지만 포크로 찍은 고기 조각에서 핏물이 툭, 떨어지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식성도 어흥이였다. 딱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표정으로 강준은 스테이크를 천천히 씹었다.
“간도 안 된 걸 무슨 맛으로 먹어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렇게 먹었어요. 그래서 간이 된 음식이 더 입에 안 맞고.”
따지고 보면 건강한 식습관이니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태령과 식사할 때 남편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이유가 이거였다니. 이후 조용한 식사가 이루어졌다. 태령이 디저트를 다섯 개 해치우는 동안 강준은 스테이크를 세 개 해치웠다. 몰랐는데 보기보다 대식가였다. 그것도 날 것 그대로의 육식가. 체지방 14%의 피지컬이 괜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어. 강준의 앞에 놓이는 네 번째 스테이크에 태령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절 먹여서 살찌우는 것보다, 강준 씨가 덜 먹고 힘을 줄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네 번째 스테이크를 썰던 강준의 손이 멈추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타는 듯한 시선에 태령은 얼른 시선을 틀었다.
“와, 저기서도 결혼식을 올리는지 몰랐어요.”
태령의 작은 탄성에 강준의 시선도 절로 창밖으로 향했다. 플라워가든에서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화창한 하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의 신랑. 모두가 행복해하는 게 눈에 환히 보인다. 그래서 태령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런 자신을 강준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결혼식.”
남편의 느릿한 음성이 태령의 시선을 다시 끌어왔다. 응시해오는 검은 눈동자가 깊고 진지했다. 왜 또 날 그렇게 봐요, 심장 떨리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바라보는 태령에게 강준이 담담히 말을 했다.
“우리 둘이 다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