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오늘 밤 나 좀 안아줄래요?2021.09.19.
등 뒤에 달라붙은 여리고 부드러운 몸이 전해오는 온기가 참 미미했다. 다시 돌아서서 안지 않고는 못 배기게. 일정이고 뭐고 될 대로 되라지. 그런 마음으로 강준이 몸을 틀려는 순간이었다. 탄탄한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태령이 속삭이듯 말했다.
“돌아보지 마요. 강준 씨 보면 가지 말라고 잡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럼 사랑한다고 하질 말든가. 아내를 안고 싶은 커다란 손끝에서 번지는 간질거림이 통증에 가까웠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어찌어찌 용케 참아서 한숨처럼 대답했다.
“……알았어요.”
“대신 사랑한다고 말해줄래요?”
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강준 씨한테 그 말 들으면 오늘 하루도 힘내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더는 못 참아.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가녀린 팔의 악력을 풀고 강준은 쉽게 돌아섰다. 가는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얼굴을 내린 후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부인께서 아침부터 날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나 봅니다.”
키스할 듯 다가갔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 내 안의 짐승이 폭주할 것 같아서. 대신 으스러지듯이 꼭 껴안은 후 아내의 귓가에 허스키하면서도 달콤하게 속삭여주었다. 널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 가림 한정식 좌식 룸 한쪽엔 작은 실내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귀해 보이는 난과 꽃들을 보며 작은 물레방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기 좋은 곳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영국이 먼저 와 있었다. 태령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들어와 음식을 세팅했다. 상 위에 차려지는 음식을 태령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주문해놓은 메뉴보다 가짓수가 많았다. 시선을 눈치챈 듯 영국이 다정하게 말했다.
“음식 주문을 소박하게 했기에 내가 더 추가했다. 그렇게 말라서 쓰겠냐.”
태령은 무감한 눈빛으로 영국을 빤히 응시했다. 자신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안쓰러울 만큼 작은 키에 저체중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 젖도 못 빨았지만, 분유나 우유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니까. 종종 할머니가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이며 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차라리 굶어 죽었으면 바랐는데 밥알을 빨아먹으면서 어린 것이 악착같이 살아남더라고. 그땐 절박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에게 미안해서 얼굴을 못 들겠다고. 그렇게 힘들게 커가는 딸의 존재를 아버지란 작자는 외면하고 잊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서 사장이 마른 여잘 안 좋아한다던데, 그럼 더욱 잘 먹어야지.”
그럼 그렇지.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남자였다. 클러치 안에서 녹음기를 조용히 작동시킨 후 태령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께서 어쩐 일로 절 보자고 하셨어요?”
“식사 끝내고 말하자꾸나. 뭘 그리 급히 서둘러.”
“부회장님과 제가 얼굴 마주 보고 편히 식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내가 너에게 아비 노릇을 하지 못했던 건 인정한다. 하지만 다 널 위해서였어. 내가 널 신경 썼다면 네 이모가 그 정도에서 끝내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태령의 무심한 반응에 영국이 한숨을 내쉬며 예의상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널 보니 네 엄마가 생각나는구나. 영희랑 생김새는 같은데 분위기가 어쩜 그리 다르던지, 조용하고 순종적이고 한 폭의 그림 같은 여자였지. 한눈에 반했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긴 속눈썹 아래 무감하게 잠겨 있던 태령의 눈동자에 시퍼런 날이 섰다. 분노를 참아내느라 상 아래에서 불끈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혼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네 할아버지 반대에 부딪혔다. 모든 걸 거두고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데 방법이 없었어.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굶어 죽을 순 없으니.”
이노그룹에서 쫓겨난다고 굶어 죽진 않는다. 그러니 엄마랑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았어야지.
“솔직히 말하마. 널 향한 부성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 회장님 댁에서 안사람이 널 손찌검하려는 순간 알았다. 부성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내가 유태령 노릇을 잘하고 있어서 그날 생긴 부성애겠죠. 당신은 원래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에 들러붙는 박쥐 같은 인간이니까. 약발 떨어진 조 여사와 쓸모없는 딸보단 나한테서 볼 이득이 더 많은 것 같으니까.
“본론만 말씀해주세요.”
단도직입적인 태령의 말에 영국은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얼른 표정 관리를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유태령이 되는 건 어떠냐? 당당하게 내 딸이 되란 의미야.”
지난날의 잘못에 용서를 빌고자 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고 싶었다면, 영국은 다른 제안을 했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널 내 호적에 올려서 유세희로 만들어주겠노라고. 그래도 거절할 판국에 하는 말이 참 가관이었다. 유태령이 당당한 딸이면, 주세희는 뭔데. 당당하지 못한 더러운 존재라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겠지.
“아비로서 든든한 네 편이 되어줄 거란 의미야. 네 이모가 다신 널 괴롭히지 못하도록, 아니 손끝 하나 못 대도록 하마. 지금까지 해준 것 하나 없는데 내 딸이 욕심나는 것 하나 정도는 갖게 해줘야지.”
내 딸이란 말에 구역질이 치밀어서 물 한잔을 천천히 비운 후 태령은 물었다.
“욕심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생각은 왜 안 해요?”
이게 당신이 들여다보지 못한 진실이야. 진실을 알려주었는데도 재밌는 말을 들은 듯 영국이 피식 웃었다.
“넌 사람을 믿지 못하지. 특히 남자는 더더욱. 아니냐?”
그랬었다, 아버지라는 당신 때문에. 하지만 지금 태령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진짜 유태령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잠시 했을 만큼. 태령의 침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국이 달래듯 말을 이었다.
“네 이모가 한 제안을 받아들였다간 큰일 날 것 같아 싫다고 했겠지. 네 이모를 설득하는 것보다 서 사장을 회유하는 게 쉬웠을 테고. 예쁜 여자 마다하는 남잔 없으니까. 그 마음이 얼마나 가느냐가 문제겠지만.”
하도 기가 막혀서 태령은 이젠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고 눈치가 없을 수 있나 싶어서. 이러니 조 여사 치마폭에 싸여 정신 못 차렸겠지.
“진짜 유태령이 되고 부회장님 딸이 되는 건 그렇다 쳐요. 하지만 이모가 평생 내 엄마가 되는 건 끔찍해요. 이모도 당연히 그럴거구요. 둘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영국과의 대화 내용은 사실 딱히 써먹을 덴 없었다. 그런데도 질문을 하는 건 훗날 조 여사를 엿 먹일 때 써먹기 위해서다. 당신 남편이 뒤에서는 이렇게 당신 뒤통수를 치고 있노라고. 질문의 강도가 너무 셌는지 순간 영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능력 없는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게 조 여사니 고민은 당연히 될 것이다. 한참 후 영국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면 이혼하마. 훌륭한 남편 노릇 이 정도면 오래 했으니. 네 이모도 억울하진 않을 거다.”
태령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조 여사와 엄마,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남자 보는 눈은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전 사람을 안 믿어요. 특히 남자는 더더욱. 그러니 이모와 이혼 후에 다시 연락 주세요. 대답은 그때 할게요.”
“너에게 믿음을 주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바라보자 영국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네가 나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으면 하는데.”
태령은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란 남자가 최악의 쓰레기라는 걸 보여주지 않았으면. 딸에게 조금의 미안함은 가지고 있다고 희미한 착각이라도 하도록. 하지만 그 바람조차 영국은 산산조각냈다.
“2세 소식을 전해다오. 그럼 나도 바로 네 이모와 이혼하마.”
구역질 날 정도로 가증스러워. 속으로 내뱉으며 천천히 일어나는 태령을 영국이 다시 불렀다.
“태령아.”
마지막까지 주세희가 아닌 유태령이었다.
“난 네 엄마를 정말 사랑했다. 그거 하난…….”
타악-. 영국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태령은 문을 닫았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의 운전석에 오를 때까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차분하고 단정하고 무심하고. 하지만 핸들을 움켜쥔 작은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 나오면서 은근히 바랐었다. 그래도 아버지란 남자가 조금은 미안해하는 마음이 있기를. 용서는 못 해주더라도 조금의 위로는 될 것 같아서. 태령은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사랑은 개나 주라고 해.”
당신의 입에서 나온 사랑 타령을 내가 믿을 줄 알고? 그럼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랑했었어야지. 책임지지 못 할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엄마도,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도 손가락질 안 당하도록.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부모를 잘못 만나 태어난 죄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이 해놓은 실수를 내가 다 짊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건데. 태령은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 생각도 못 하도록 머릿속을 활활 태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늦은 밤, 강준은 해외 지사 임원들과 화상회의 중에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공과 사는 확실하던 서강준이 회의 중 전화를 받는 모습은 모두에게 이질적이었다. 윤 실장만 제외하고 말이다.
[여보, 나한테 와 줄 수 있어요?]
처음 듣는 여보라는 호칭, 그리고 처음 듣는 혀가 꼬부라진 음성. 남은 회의는 윤 실장이 대신 마무리한 후 보고서로 받기로 하고 뛰쳐나왔다. 재킷을 입지도 못하고 손에 든 채로, 느슨히 풀어 내린 넥타이는 제대로 매지도 않고. 팰리스 호텔 바에 들어서자마자 강준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전화할 때도 취해 있던 아내는 바 의자에 위태롭게 앉아 있었다. 문제는 아내의 뒤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음흉한 늑대들이었다. 아름다운 여자가 혼자 앉아 술에 잔뜩 취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아내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남자들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한 명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더는 못 보겠다. 아내의 예쁜 눈이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보는 것도. 나 아닌 다른 남자가 아내를 보는 것도. 지독한 소유욕에 스스로도 놀라며 강준은 아내에게 다가갔다. 바 의자에 아슬하게 앉아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뇌쇄적이었다. 강준을 올려다보는 긴 속눈썹에 잠긴 몽롱한 눈동자는 고혹적이고. 이러니 남자들이 환장하지. 아내가 가는 손끝을 까딱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신상 읊어볼래요?”
“31세, 서강준. 한신 자동차 사장. 그리고 당신 남편.”
작게 합격을 외친 아내는 연이어 물었다.
“키 188센티에 몸무게 78킬로, 체지방률 14%?”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뭐 그래도 나쁘진 않다.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늑대들을 물리친, 제 남편임을 확인하는 아내의 방법이. 하여간 술 취한 와중에도 야무지시지. 강준은 피식 웃으며 아내의 손을 잡아 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상체로 가져갔다.
“직접 확인해봐요.”
셔츠 위로도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과 또렷한 복근. 그제야 아내는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내 여보 맞네요.”
그리고 강준은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여보란 호칭이 얼마나 달콤한 건지.
“집에 갑시다.”
강준이 팔을 벌려 품을 내주자 비틀거리며 일어난 아내가 아기 새처럼 품에 안겨 왔다.
“팰리스 호텔 스위트룸 1003호.”
“…….”
“집 말고 거기 가요. 야경 보고 싶어졌어.”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팰리스 호텔 1003호는 항상 강준을 위해 대기 중인 공간이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긴 복도를 걸어 방에 들어섰다. 잠과 현실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는 아내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여주었다.
“가볍게 씻고 자요. 내가 씻겨줄게.”
“싫어, 그냥 잘래.”
잠기운이 짙게 번진 아내의 투정에 강준은 하는 수 없이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눕히려는데 아내가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아내의 위로 몸을 드리웠다. 지금 이 순간이 강준에겐 첫날밤의 데자뷔처럼 느껴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 취한 건 자신이 아니라 아내라는 것 정도. 옅은 어둠 속, 촉촉이 젖은 말간 눈동자가 강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을 감싼 가는 팔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잔뜩 힘을 주고선.
“오늘 밤 나 좀 안아줄래요?”
천천히 다가온 떨리는 손끝이 강준의 얼굴선을 애틋하게 어루만진다. 분명 서툰 유혹이었다. 진득한 욕망보다는 서글픈 애절함이 묻어나는. 날 것 그대로의 본능보다는 가슴 안의 심장을 건드리는 애잔한 유혹. 그 유혹을 이번에도 강준은 어떻게든 버텨볼 생각이었다. 지금껏 점잖게 잘 눌러온 욕망은 오래 참은 만큼 뜨겁게 폭발할 테니까. 그런 자신을 아내는 분명 견뎌내지 못할 테니까. 아내의 몸무게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니까. 그래서였다. 참고 인내하며 아내를 안지 않은 건. 하지만 아내의 손끝이 입술을 어루만지는 순간, 서툰 유혹이 간절한 바람이 되는 순간, 물기 어린 속삭임이 가슴으로 번지는 순간.
“아무 생각도 못 하게.”
새까만 눈동자에 탁, 하고 불꽃이 튀며 발화되었다.
“당신이 그래줬으면 좋겠어.”
강준은 그대로 얼굴을 내려 아내의 입술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