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어흥이.2021.09.16.
떨림처럼 흘러나온 아내의 속삭임은 가늘고 작았다. 하필 바람도 세게 불어왔다. 그래서 강준은 제대로 듣지 못했고 망상에 사로잡혀 긴가민가하는 중이었다. 분명 사……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사랑해’지만, 당연히 그 말은 아닐 테고. 강준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살짝 허리를 기울였다.
“바람 때문에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줄래요?”
“……랑한다고요.”
이번엔 한글자가 더 들려왔다. ‘사’라는 말을 들었고, ‘랑’이란 말을 들었고.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강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랐다.
“……다시 한번.”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순간,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사랑해요.”
이번엔 제대로 들었다. 부드러운 아내의 입술이 발음한 ‘사랑해요’가 심장에 박히는 순간. 주변의 소리들이 귀에서 모두 무음 처리가 되었다. 강준은 태어나기 전부터 무언가를 원하기도 전에 모든 걸 다 가졌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형이든 유형이든. 무언가를 원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간절함을 몰랐다. 주세희를 만나기 전까진.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지독히도 낯설었다. 처음으로 간절히 원했고 그걸 가지게 된 이 상황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얼떨떨하고 멍하고, 꿈을 꾸는 것도 같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준이 허리를 세우고 빤히 바라보자 아내가 다시 차분히 물었다.
“이번에도 못 들었어요?”
“들었어요. 근데 다시 한번 말해줄래요.”
“…….”
“믿기지 않아서. 아니면 내 뺨을 한 대 때려줘도 되고.”
꿈이라면 얼른 깨어나야 하니까. 그런데 거짓말처럼 웃음을 참는 얼굴로 아내가 강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오늘 아내가 많이 이상하다. 늘 먼저 다가서는 것도, 짓궂게 구는 것도 자신이었는데. 오늘은 먼저 다가온 것도 모자라 발꿈치를 들고 강준의 목을 팔로 감쌌다.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사랑스럽게 웃으며 입술을 예쁘게도 움직였다.
“사랑한다구, 서강준.”
환청도 꿈도 아닌 고백은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아내의 고백도, 당차게 반말로 불러오는 제 이름마저도. 이럴 때 반말하는 건 반칙이라고, 주세희. 나보고 어떻게 버티라고. 강준은 아내를 와락 품에 안아버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기쁜데,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미안하기도 해서. 강준은 짙은 한숨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좀 더 나중에 말해주지 그랬어요.”
난 아직 너에게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내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나 좀 실컷 이용하고 부려 먹고 애 좀 태운 후에. 내가 무릎 꿇고 애원하면서 죽는시늉이라도 하면,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이렇게 쉽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그래서, 싫어요?”
나긋나긋하게 되묻는 아내의 음성이 조금은 장난스러웠다. 그래서 강준도 픽 웃고 말았다.
“싫을 리가 있나. 이미 난 부인에게 미쳐 있는데.”
그만큼 아내가 속삭여온 ‘사랑해’는 강준을 완벽하게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품에 끌어안았던 아내를 놓아준 강준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1년으로 잡았어요. 부인이 내게 비밀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기간.”
“…….”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면 내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려고 했어요.”
뒷조사를 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성격대로 깔끔하게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럴 만한 머리가 되고 능력이 되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까지 갖추었으니까.
“참을성 많다면서요.”
“그래서 잘못했다고 자진 납세하는 거예요.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아내가 예쁘게 눈을 흘겼다. 그 눈빛조차 예뻐 죽겠다고 생각하며 강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평생 기다리라면 기다릴게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주세희라고 부르지도 않고.”
짐승의 것처럼 날 선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주세희란 이름은 선녀의 날개옷과 같다는 걸. 진짜 주세희를 알게 되는 순간, 아내가 그 날개옷을 입고 사라질 것 같았다. 어쩌면, 주세희란 이름을 포기하는 게 아내가 제 곁에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도 같고. 그래서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려주고 모른 척해주려는 건. 때론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으니까.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 내 옆에만 있어줘요.”
“강준 씨, 지금 나 예뻐요?”
강준은 간절히 바랐다. 조용하게 불쑥 물어오는 아내의 표정이 서글퍼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으면.
“가장 예쁘고 유일하게 예뻐요. 앞으로도 쭉, 죽기 전까지 그럴 거고.”
“그럼 지금 이 모습으로 날 항상 기억해줄래요?”
태령이 남편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유태령도 주세희도 아닌, 그냥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기억해주었으면. 훗날 주세희에 대해 알게 되어도 당신은 날 더럽다는 듯 바라보지 않았으면.
“혹시 어디 아파요?”
되묻는 남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태령은 싱긋 웃어 보였다.
“저 건강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사람 불안하게.”
“그냥, 여자들은 원래 그래요. 사랑하는 남자에겐 항상 예뻐 보이고 싶은 바람이 있거든요.”
다른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난 그래요. 당신에게 지금처럼 예뻐 보였으면, 당신이 날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기억해주었으면.
“그러니까 약속해줄래요?”
태령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어린 의심은 아직 빠져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강준은 기꺼이 그러겠노라 대답해주었다.
“고마워요.”
약속은 꼭 지키는 남자라는 걸 알기에, 태령은 환히 웃어 보였다. 그러곤 처음으로 먼저 남편의 손을 잡고 깍지꼈다.
“이제 그만 우리 집에 가요.”
*** 집에 도착해서 각자의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태령이 침실에 들어오자 때마침 강준도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강준이 무심코 태령을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고정하고선 거리를 좁혀왔다. 가늘게 뜬 눈이 집요하게 태령의 얼굴에 머무른다.
“화장 안 했네요.”
“맨얼굴이 더 예쁘다면서요. 이상하면 다시 가서 화장할까요?”
토라진 듯 몸을 돌리는 척하자, 강준은 얼른 태령을 품에 안았다.
“너무 예뻐서 본 거니 화장하지 마요. 나랑 둘이 있을 때만큼은.”
그런데 부드럽게 속삭인 남편의 커다란 손이 태령의 몸 위에서 미묘하게 움직인다.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쓸고 허리를 쥐어 본 손이 좀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태령은 참아냈다. 오늘 드디어 두 번째 밤을 치를 것 같은, 본능적인 예감이 들어서.
“그렇게 먹였는데.”
머리 위로 내려앉는 나직한 음성에 태령은 발그레해진 얼굴을 들었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네요.”
몸을 더듬었던 야릇한 손길과 다르게 내려다보는 남편의 눈동자는 담백했다.
“아, 1킬로 좀 안 되게 빠졌어요.”
고작 1킬로였다. 그런데도 몸을 만져보고 그걸 단번에 알아챈 남편이 대단했다.
“이제 그만 자러 갑시다.”
늘 그렇듯 남편은 눕자마자 태령을 품에 끌어당겼다. 남편의 단단한 몸과 밀착되자 느껴지는 두려움과 기대감. 태령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품에서 조심히 고개를 들자,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아니, 눈을 감은 게 아니라 정말 자고 있었다.
“강준 씨, 정말 자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쌔근거리는 남편의 숨소리였다. *** 남편이 없어서인지 일찍 눈이 떠졌고 한기가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구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태령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은 먼저 출근할게요.’
잠결이어도 또렷이 기억한다. 귓가에 속삭여왔던 남편의 다정한 음성도, 얼굴 곳곳에 닿았던 입맞춤도. 시트 안에서 몸을 웅크린 태령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고백한 순간부터 집에 오기까지, 긴장했고 기대했고 야릇함에 휩싸여 두근두근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무색하고 민망하게 남편은 얌전하게 잠들었다. 도대체, 왜 남편은 그냥 잤을까.
“……안기고 싶었는데.”
남편을 만난 후 함께할 때마다 태령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따뜻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고 감정을 느끼는. 특히 남편의 품에 안길 때 가장 강렬하게 와닿았다. 그래서 안기고 싶었다.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남편과 공유하는 은밀하고 야하고 고귀했던 그 교감이 좋아서. 어젯밤 남편은 분명 어흥이였다. 집어삼킬 것처럼 바라보던 뜨거운 눈과 잔뜩 성나서 으르렁거리던 성난 근육들. 하지만 남편은 그 모든 걸 외면한 채 잠들었다. 도대체 왜. 연애를 시작했으니 스킨십도 단계별로 밟겠다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태령은 싱긋 웃었다.
“생각보다 소심한 어흥이네.”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난 태령은 연락처 목록에서 저장 이름을 변경했다. 서강준에서 소심한 어흥이로. 출근 준비를 끝내고 내려가자 김 비서가 밝은 표정으로 태령을 맞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장님!”
차가 출발하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이 영국임을 확인한 태령은 싸늘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세요.”
[스케줄 미리 조정하라고 일찍 전화했다.]
“…….”
[오늘 아빠가 맛있는 식사 한 끼 사주고 싶은데, 점심과 저녁 중, 언제가 괜찮으냐?]
태령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지금껏 딸로 대한 적도 없을뿐더러 전화 한 통은커녕 관심조차 안 주던 남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너무 쉽게 아빠란 말을 입에 담는 게 우스워서.
“식사의 목적에 따라 스케줄을 조정할지 말지 제가 결정해요. 그러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이 남자와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는 더더욱.
[태령아, 아빠는 다 안다.]
그놈의 아빠 소리 좀 집어치웠으면. 그런데 다음에 하는 영국의 말은 황망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역시 내 딸이라 똑똑해. 서 사장만 휘어잡으면 다 손에 쥘 수 있다는 걸 파악하다니 말이야. 네가 사랑 같은 걸 할 리는 없고. 한신가 며느리 자리가 탐이 나는 거지?]
이 미친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영국이 말을 이었다.
[그럼 더더욱 아빨 만나야지. 영희가 알기 전에 말이야.]
태령은 모든 걸 안다는 듯 말하는 영국이 가소로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데도 희미한 궁금증이 들었다.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제 욕심만 채울 줄 아는 이 남자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일지.
“저녁 6시 청담 가림 한정식, 괜찮으세요?”
[암 그래야지. 그때 보자꾸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국이 대답하고 통화는 끝났다. *** 비서실 분위기가 미묘했다. 정확히는 태령을 바라보는 비서들의 눈빛에 어떤 감정이 그득 담겨 있었다. 태령이 바라보자 김 비서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이유는 집무실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비서들의 두 눈에 가득했던 감정은 바로 부러움이었다. 넓은 테이블 위가 가득 차 있었다. 농밀한 꽃향기를 뿜어내는 커다란 꽃바구니. 그 옆으로 주르륵 늘어선 간식 바구니들. 빵과 쿠키, 타르트, 마카롱, 수제 초콜릿과 사탕, 조각 케익 등등. 하지만 비서들을 부러워하게 만든 건 테이블 위 음식과 꽃이 아니었다. 통창에 서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통화하던 남편이 인기척에 돌아섰다.
“UAM(도심형 항공 모빌리티) 시장성은 확실합니다. 향후 20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모두 예측하고 있고요. 인천국제공항 항공사와 제이콤과 UAM 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올해 사업부를 신설했으니…….”
빛조차 함몰시킬 남편의 새까만 눈동자에 자신이 담기는 게 보였다. 한 걸음만 떨어져 있어도 완전무결한 남편의 완벽함에 보이지 않는 막이 쳐졌다. 그 거리감이, 이질감이, 싫어서. 태령은 남편에게 다가가 먼저 팔을 뻗어 탄탄한 허리를 껴안았다.
“할아버지, 끊어야겠어요. 나머지는 영만 실장님께 추가 보고 받으세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낸 강준이 작은 몸을 품에 더 꽉 끌어안으며 눈을 맞춰왔다.
“지나는 길에 꽃집이 있었어요. 그 옆으로 주르륵 가게들이 있더라고. 그래서, 어쩌다가.”
그래서 충동적으로 쓸어 담듯이 사 왔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직접 손에 들고. 어젯밤은 소심한 어흥이더니, 오늘 아침의 남편은 로맨틱 어흥이였다.
“예쁘고 좋아 보이는 건 죄다 쓸어와서 부인께 바치고 싶은 심정이라.”
갑자기 뜨거운 감정이 치민 태령은 발꿈치를 들어 남편에게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입술만큼이나 뜨거운 키스를 기대했는데. 초옥-. 가볍게 물리적인 접촉만 하고선 남편이 입술을 뗐다. 오늘도 소심한 어흥이를 태령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키스도 안 해주냐고, 조금은 항의하듯이. 그 눈빛에 남편이 짧게 웃었다.
“여기 잠깐 들른 것도 무리한 건데, 키스하면 여기서 못 나갈 것 같아서.”
그걸 증명하듯 재킷 안에서 강준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지금 바로 내려가죠.”
전화를 받는 와중에도 검은 눈동자는 태령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 많이 늦으니 먼저 자요.”
돌아서는 너른 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태령은 뒤에서 남편의 허리를 안았다. 탄탄한 등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사랑해요, 강준 씨.”
영국이 정말 모르는 중요한 진실. 태령은 이 자리를 탐내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남편과 사랑에 빠졌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