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온통 당신이 처음인데.2021.09.12.
남편이 그 이름을 부르자 태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도 쉽게, 그리고 다정하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아서. 태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요.”
자신을 좋아한다는 진우조차 고정관념은 깨지 못했다. 더러운 피를 물려받으면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사람들에겐 더러운 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떨까. 내가 어떤 여자인지, 내 아빠가 누구인지, 진짜 유태령과 어떤 관계인지. 그 모든 걸 알고 난 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한다고 말할까. 지금처럼 그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줄까. 그래서 난 차라리 몰랐으면 해. 주세희란 이름을 다정히 부르는 당신의 음성을. 훗날 당신이 그 이름을 차갑게 불러도 담담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그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지 마.
“당신이 그렇게 불러선 안 되는 이름이라구요. 그럼 난…….”
감정이 북받친 태령은 말을 멈추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남편이 빠르게 사과를 해왔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애써 말하려고 하지 마요.”
뭐든 받아줄 것처럼 다정한 눈동자로 깊숙이 올려다보며 느리고 낮게 속삭였다.
“말했잖아요, 나 참을성 많다고. 얼마든지 기다려줄 자신 있다고.”
손가락 사이로 밀려드는 서늘한 감촉에 시선을 내리자 반지가 보였다. 옅은 어둠 속에서도 정교하게 세공된 핑크빛이 영롱했다. 주먹을 그러쥐고 있는 작은 손 위에 남편이 커다란 손을 포갰다.
“근데 오늘 프러포즈에 대답은 지금 꼭 들어야겠어요.”
선뜻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이 남자의 눈빛 한 번에, 평범한 말 한마디에, 다정한 말투에. 가슴이 선득거리고 심장이 떨려서. 너무 쉽게 무너지고 흐물흐물 녹아내려서.
“나 연애 한번 안 해보고 결혼했어요.”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바라보자 강준이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연애도 부인이 책임져줘야지.”
태령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누군 연애를 해본 줄 알아. 결혼도 첫키스도 첫날밤도, 난 온통 당신이 처음인데. 하지만 당신은 아니면서. 남편은 그 밤을, 태령 자신을, 빨갛게 달구다 못해 활활 태워버렸다. 문득 남편이 괘씸해진 태령은 눈을 흘겼다.
“연애는 안 해본 남자가 키스는 왜 하고 잠은 왜 잤어요? 강준 씨 나쁜 남자였어요? 그렇게 지조 없는 남자였어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조목조목 따져 들자, 강준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든 말든 뒤늦게 억울함이 밀려든 태령은 멈추지 않았다.
“경험이 얼마나 많으면 스킨십이 그렇게 쉽고 능수능란해요? 그것도 모르고 난…… 순진하게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수위 넘는 말을 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난 온통 당신이 처음인데, 당신에겐 내가 처음이 아니라서 화가 나.”
태령은 남편이 잡고 있는 손을 홱 빼버렸다. 한껏 욕심내기로 한 한 달. 그 시간만큼은 투정도 부리고 화도 내고 질투도 하고, 속 좁게 굴고 싶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서강준에게는 뭐든 해도 될 것 같아서.
“나 억울해서 강준 씨랑 연애 못 해요.”
풉, 하고 낮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 기가 막혀서 바라보자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부인이 보기엔 내가 능수능란한 남자 같아요?”
그 질문에 태령은 순간 멍해졌다.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했나 싶어서.
“그 밤, 부인도 좋았어요?”
“무슨…….”
“얼마나 좋았는지, 말해주면 안 되나.”
은밀하고 야하게 속삭여오는 얼굴이 조금은 짓궂기도 했다. 뒤늦게 태령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아서.
“집에 갈래요.”
태령은 도망치듯 일어나 몸을 틀었다.
“가긴 어딜 가.”
웃음기 어린 나직한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남편이 뒤에서 태령을 안아왔다.
“대답해줘야지.”
“……대답해줬잖아요.”
연애는 억울해서 못 하겠으니, 애 좀 타보라고.
“좋다고 해주고 책임져줘야죠.”
“싫어요, 내가 왜…….”
“나도 처음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남편을 노려보려고 품 안에서 몸을 돌린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초옥-.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에 남편이 가볍게 입맞춤을 해와서.
“선수처럼 봐줘서 고맙긴 한데.”
태령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다음 말들은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사랑도, 키스도, 그 밤도, 나도 온통 다 네가 처음이라고.
“……거짓말.”
태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내가 좀 뛰어나긴 하지.”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로 속삭여오는 나직한 음성이 듣기 좋았다.
“특히 본능적인 분야에서.”
낯부끄러운 말을 참 잘도 하면서.
“앞으로 더 노력할 계획이고. 부인도 더 즐겁게 해줄 예정이고.”
이 남자의 버릇을 하나 더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강력히 피력할 때는, 반말한다는 걸. 그 반말이 예의 없는 게 아니라 더 설득력이 있어서 문제였고.
“그러니 이만 받아주시죠, 부인?”
존칭을 쓸 땐 녹아내릴 듯 달콤해서 문제였다.
“싫어요.”
하지만 태령은 다시 한번 거절했다. 늘 항상 변함없이, 모든 게 쉬운 당신에게도 어려운 게 하나쯤은 있으면 해서. 그게 나였으면 해서.
“연애 안 할……!”
대답 대신 얼굴 위로 자잘한 입맞춤이 쏟아졌다. 이마, 콧등, 눈꺼풀, 코끝, 뺨, 하다못해 손등과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어디 버틸 테면 버텨보라는 듯 온몸으로 설득해 온다. 스킨십에 굴복하긴 자존심이 상해서 어떻게든 오기로 버티려 했다. 또 다른 커플이 저 멀리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 와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보니 태령은 조마조마했다. 스스로를 독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절대 아니었다.
“강준 씨, 그만 해요.”
애원하듯 말하자 그제야 남편이 입맞춤을 멈추었다. 민망함에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태령의 손을 잡고 강준은 성큼성큼 걸었다. 순식간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운전석에 앉은 강준이 몸을 기울이고 손을 뻗어왔다. 얼굴을 감싸고 지그시 눈을 맞춰오는 남편의 눈빛이 변했다. 여유로움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가 음험하게 짙어졌다. 그 눈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남편이 다시 한번 대답을 요구해왔다.
“대답.”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으르렁거리듯 고막을 울렸다. 참 지독하고 집요한 어흥이에게 결국 태령은 백기를 들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이니까. 당신과 하는 게 뭐든, 한 달 동안은 다 받아줄 거야.
“우리 연애해요.”
기어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남편이 입술을 겹쳐왔다. 눈을 감고 남편의 목에 팔을 감은 태령은 뜨겁고 다정한 키스를 받아들였다.
*** 빨간 신호에 차가 멈추자 태령은 절로 긴장했다. 남편이 뭘 할지 알아서였다. 콘솔박스 위에서 깍지 끼고 있던 손이 슬그머니 당겨졌다. 자연스럽게 몸이 운전석 쪽으로 기울었고 남편은 조수석 쪽으로 기울었다.
“운전하면서 이러는 거 위험해요.”
“빨간 불인데 뭐가 위험해.”
“뒤에서 빵빵거리면…….”
“내가 알아서 잘해요.”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이 기어이 다가왔다.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리고 뭉근한 열감이 밀려들었다. 입술을 뗀 남편이 짓궂게 속삭여왔다.
“봐요, 알아서 잘하잖아.”
남편이 허리를 세우자마자 초록 신호로 바뀌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신기했다. 태령은 다시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은 창밖 풍경이 아니라 검은 창에 담긴 남편을 보고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의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우아하다. 방금 그런 야한 키스를 한 남자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남편은 이후로도 계속 그랬다. 신호가 걸리고 차가 멈추면, 지금처럼 불쑥 키스를 해오고. 때론 길거나 짧게, 때로는 가볍거나 깊게. 얼굴을 붉히는 건 오로지 태령의 몫이었다. *** 한강공원 주차장에 차가 멈추었다. 강준이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태령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오늘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강했다. 하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는 것 같아 그 바람마저 좋았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태령은 빠르게 강으로 다가갔다. 빛을 품은 어두운 강이 예쁘고 강 끝에 펼쳐진 빌딩 숲이 멋지다. 남편과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앞서 걸어가던 태령은 핑그르르 돌아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조용히 뒤를 따르던 남편에게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강준 씨, 얼른 와요.”
아내의 얼굴에 번진 환한 미소가 강준을 멍하게 만들었다. 늘 조용한 미소만 지어서 몰랐다. 이렇게 활짝 웃을 줄도 아는 여자라는 걸. 저 미소를 기억하고 항상 미소 짓게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내가 더 노력해서, 사랑해서, 행복하게 해서. 그때 태령의 뒤로 걸어오는 커플이 보였다. 찰싹 달라붙어 서로를 바라보느라 앞을 보지 않는 커플과 태령이 부딪힐 것 같았다.
“뒤에 사람.”
오니 조심해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 커플 남자와 태령이 부딪혔다. 가녀린 몸이 버텨내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강준의 눈빛도 휘청거렸다.
“하 거참, 눈 똑바로 뜨고 안……?”
거칠게 말을 내뱉던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아슬하게 중심을 잡은 태령이 남자를 올려다보아서였다.
“쌍방 과실이지만 그쪽 잘못이 더 크니 먼저 사과할래요? 그럼 나도 사과할게요.”
하지만 태령의 말에 남자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쌍방 과실은 무슨, 그쪽이……!”
때마침 도착한 강준이 매끄럽게 끼어들며 남자의 시야에서 태령을 완벽히 차단했다.
“눈은 뒤통수가 아니라 얼굴에 달렸습니다.”
널찍한 등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심장이 콩닥거렸다. 한 덩치 하는 남자를 압도할 만큼, 큰 키와 너른 어깨와 탄탄한 체격의 남편 때문에.
“그럼 앞 보고 걷는 사람이 더 조심하고 피했어야지.”
“이봐!”
“반말하지 말고, 째려보지 말고, 내 아내에게 사과하시죠.”
무심하면서도 정중한 음성과 다르게 강준의 눈빛만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말 한마디면 끝날 일로 변호사 부르고, 경찰서 갈 일도 없도록.”
변호사와 경찰서를 운운하니 커플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제야 강준은 몸을 돌리고 다정히 물었다.
“부딪힌 어깨는 괜찮아요?”
“네. 근데 굳이 강준 씨가 끼어들 필요 없어요. 이 정돈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차분히 의사를 전달하는 아내의 고집스러운 눈빛에 강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똑 부러지는 여자라는 거 알아, 아는데 말이지. 혼자 해결하는 게 익숙한 것처럼 구는 모습이 난 마음이 아파.
“내가 있는데 굳이 혼자 해결할 필요가 있나.”
나에게 기대주면 좋겠고 응석도 부리면 좋겠는데. 내 마음은 조금도 모르는 무심한 여자 같으니라고.
“나 좀 팍팍 써먹어요. 애인이고 남편이고 부부인데.”
당신이 날 하도 안 써먹어서 썩을 지경이라고.
“그리고 지금부터 내 옆에서 30센티 이상 떨어지지 마요. 손도 꼭 잡고.”
강준의 진지한 말에 태령은 조금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저 애 아니에요.”
“품에 넣고 다니고 싶은 거 참는 거니까 말 들어요.”
“…….”
“아니면, 내가 업고 다녀도 되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머리를 높이 묶어 올렸던 머리끈이 툭 끊어진 것이다. 때마침 아내의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풍성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작은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헤집는 작은 손이 우왕좌왕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강준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나 좀 써먹으라니까. 내가 해줄 테니 가만히 있어요.”
태령은 하는 수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 올 한 올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쓸어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던 머리칼이 사라지자 태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높이를 맞춘 남편의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거 알아요? 머리 묶은 것도 예쁘지만 푼 게 훨씬 예쁜 거.”
머리를 안 묶었으면 하는 남편의 은근한 바람에도 태령은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머리 풀면 불편해서요.”
난 지금 유태령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머리를 묶을 만한 게 안 보인다.
“기다려봐요.”
남편은 오른손으로 태령의 머리칼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서툰 손길로 한참을 씨름하더니, 기어이 태령의 머리칼을 넥타이로 묶는 데 성공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남편은 뿌듯한 눈빛으로 웃는다.
“넥타이도 잘 어울리네요.”
다정한 눈빛이 블랙홀처럼 한없이 태령을 빨아들인다. 뭘 해도 받아줄 것 같은, 오로지 나만 보고 나만을 담고 있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동자 속으로. 그 눈과 뒤엉키는 순간 죄책감을 동반한 기쁨이 밀려들었다. 절대 사랑해선 안 될 남잘 사랑하게 된 죄책감과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기쁨이. 당신은 모르겠지. 나의 길티플레저가 당신이라는 걸. 태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강준 씨.”
나를 사랑해줘서, 내가 사랑을 하게 해줘서, 그래서 너무 고마워.
“그리고…….”
이 말은 떠나는 순간까지 해줄 생각이 없었다. 혼자 고이고이 간직하려 했었다. 하지만 영영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해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지금, 훗날 후회하지 않도록.
“사랑해요.”
가슴 안에 남겨놓은 마지막 벽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