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나랑 연애합시다.2021.09.09.
“내가 남편을 사랑해.”
핵폭탄급 고백을 한 태령의 시선이 고요히 창가로 흘렀다. 무심하면서도 담담한 눈빛과 표정에 진우는 잘못 들었나 싶어 태령을 바라보았다. 미묘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감싼 공기 속으로 고요히 밀려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몰랐다. 둘을 지켜보던 강준이 몸을 돌려 커피숍을 나가는걸. 한참 후,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리며 진우가 입을 열었다.
“세희 네 말은 다른 여자의 남자를, 그러니까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말이지?”
태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 서약을 한 것도. 아내 자리를 지키고 부부로서 지내고 그 남자에게 안긴 것도. 이름만 내 것이 아닐 뿐 모두 다 나였다고. 반박할 말은 많지만, 진우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는 없으니까. 고집스러운 침묵에 진우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네가 왜 유태령 흉내를 내는지 모르지만 이거 하난 확실해. 그 마음 접어야 한다는 거.”
“…….”
“어머니가 한 일, 네가 가장 혐오하고 더럽게 생각했어. 너도 똑같은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니야?”
태령은 허무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신경 쓰지 마. 넌 그냥 주세희일 뿐이야.’
동네에서 손가락질받던 여자의 딸로 불리던 자신에게 진우 남매가 자주 해줬던 말이 떠올라서. 하지만 진우도 결국은 그런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후 사정 듣지도 않고 엄마를 들먹인 거겠지. 피는 못 속인다고 엄마와 똑같은 짓을 할까 봐. 그게 나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역린인 걸 알면서도. 만약 유태령이 이복언니이자 이모의 딸인 걸 알면 어떨지 조금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런 진우에게 화가 난다기보다는 씁쓸했다. 그게 지금 느끼는 감정의 전부였다.
“그래서, 오빠도 내가 혐오스럽고 더러워? 내 엄마처럼?”
태령의 담담한 질문에 아차 싶은 표정으로 진우가 얼른 사과했다.
“네가 오해할 말을 해서 미안해. 하지만 맹세하는데 널 더럽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넌 내가 지금껏 봐온 사람들 중 가장 깨끗하고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존재야.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진지한 음성이 다정하고, 온화한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다.
“세희야, 난 네가 내 앞에서만큼은 감정을 참지 않으면 좋겠어.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속상하면 짜증 부리고 슬프면 눈물 흘리고. 나한테는 그렇게 해주면 안 될까?”
태령은 문득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표정, 온화한 말투. 눈앞의 진우가 남편과 비슷한 것 같아서. 설마, 아니겠지.
“진우 오빠.”
태령은 그냥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그런데도 진우의 귀가 쫑긋해지며 허리 뒤로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 나 좋아해?”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며 진우가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험험…… 응.”
말을 더듬거리다가 마지막은 응이라고 대답하는 진우의 얼굴이 새빨갛다.
“사실 나 너 짝사랑한 지 오래됐어. 너 좋아한 이후로 다른 여자 쳐다본 적도 없고. 그건 너도 잘 알 거야.”
느닷없는 진우의 고백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 태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타이밍 참 뭣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고 고백을 받으러 나온 자리도 아니건만.
“세희야, 나는…….”
또다시 고백일 게 분명한 진우의 말을 잘랐다.
“지금 당장 나에 대한 그 마음 접어.”
천천히 눈을 뜬 태령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남편은 나에겐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될 거야.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두 달 안에 난 원래 내 이름으로, 내 자리로 돌아갈 거야. 그래도 오빠랑 난 안 돼.”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말이 진우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흐지부지 굴면 후에 진우는 더 아파할 테니까.
“난 오빨 남자로 생각해본 적 없어. 10년 넘게 한 번도 남자로 안 보였으면 말 끝난 거잖아.”
“넌 날 제대로 봐준 적도 없잖아. 나한테도 한 번 기회를 줘. 그럼…….”
“제대로 안 본 게 아니라 눈이 안 가서 안 본 거야. 나한텐 남의 남잘 넘보는 것보다 오빠랑 사랑하는 게 더 나쁜 짓이야. 오빠가 자꾸 이러면 나 진경이도 못 봐.”
한 번 한다면 기어이 해내는 그 성격을 알기에 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마음 접으면, 예전처럼 돌아갈 순 있고?”
고개를 푹 숙이고 길고 큰 몸을 늘어뜨린 모습이 영락없이 비를 쫄딱 맞은 대형견 같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다시 삼키고 마지막 대못을 박았다. 하더라도 나중에,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일어난 태령은 진우에게 담담히 말을 했다.
“두 달 후에 봐요, 김진우 씨.”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태령을 진우도 잡지 않았다. *** 미친 운동광 서강준이 웬일로 가만히 앉아 핸드폰만 바라본 게 20분째.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던 재우가 보다못해 다가와 물었다.
“핸드폰은 왜 자꾸 봐?”
핸드폰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강준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전화가 올까, 내가 해야 할까.”
“뭔 소리야. 혹시 태령 씨?”
시선조차 주지 않고 강준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태령 씨 만나러 내려갔잖아. 엇갈려서 못 만났어?”
경진의 물음에 대답 대신 강준이 손을 휘이휘이 내저었다. 방해되니 사라져주라는 무심한 손짓에 발끈한 경진이 말을 했다.
“서강준, 다른 남자 아내도 아니고 네 아내잖아. 근데 왜 전화를 못 해, 임마. 남자답게 확 전화해 그냥! 그게 뭐 어렵다고 보는 사람 속 터지게 만드냐?”
그제야 강준이 천천히 경진과 재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둘을 번갈아 보는 눈빛에 가소로움이 가득했다.
“결혼도 안 하고 아내도 없는 미혼남들이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거만하게 말을 한 강준은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이없다는 듯 강준을 바라보며 두 남자는 투덜거렸다.
“아내 없다고 무시당하긴 또 처음이네.”
“나 내일부터 당장 선본다.”
그때 벽에 걸려 있는 대형스크린에서 국민 댕댕이로 불리는 모델 김진우가 나왔다. 운동에 열중하던 여자들 대부분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스크린에 고정되었다.
“TV 틀기만 하면 쟤 나오던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이긴 해.”
“요즘은 저렇게 멍뭉미 넘치는 친근한 얼굴이 대세라잖아. 착해보이고 순박해보이고.”
“인정. 나도 저번에 김진우 봤는데 성격도 싹싹하고 괜찮더라고. 여동생 있으면 차라리 저런 놈한테 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남자들도 무장해제시키는데 여자들은 오죽하겠냐. 실물이 백 배 더 낫더…….”
“별로야.”
잘 벼른 칼날처럼 날아든 살벌한 음성이 경진의 말을 잘랐다. 두 친구의 시야에 대형스크린을 싸늘히 바라보는 강준이 보였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개처럼 생기고 개처럼 구는 게 뭐 매력적이라고.”
만사에 늘 무관심하던 강준의 날 선 반응이 당황스러운 두 사람이었다. 그때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며 전화를 받는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태령 씨.”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은 성우를 해도 될 만큼 나무랄 곳이 없는 허스키 보이스였다. 세상 다 가진 남자처럼 입가에 사르르 번지는 저 미소는 또 뭐고. 난생처음 보는 친구의 낯설고도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피트니스 클럽 앞이라고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강준은 통화하면서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빠르게 입구로 향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경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우야, 나 왜 저 녀석 뒤에 개 꼬리가 보이는 것 같지?”
“나도 보인다. 아주 격하게 꼬리를 살랑거리며 달려가는 근육질 개 한 마리가.”
두 사람 눈에 아내의 전화 한 통에 후다닥 달려나가는 강준의 모습이 딱 그랬다. 눈빛을 교환하던 두 사람이 피식 웃어버렸다. 개 상 싫다더니, 사람이 개처럼 굴면 안 된다더니.
*** 느닷없이 연락하고 불쑥 찾아온 거다. 하지만 강준은 무척 기쁜 얼굴로 싱긋 웃으면서 20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강준을 기다리며 태령은 통창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커다란 손이 가는 허리를 뒤에서 당겨 안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쓸었다. 등 뒤로 전해져오는 탄탄한 감촉과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태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품이, 이 온기가, 이 향기가 그리워서. 아침에 보았는데 오랫동안 못 본 것처럼 보고 싶어서. 느닷없이 남편에게 연락하고 찾아온 이유였다. 품에 안긴 채 천천히 돌아선 태령은 남편을 빤히 보았다. 급하게 나온 게 역력한 모습이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젖은 머리칼은 그렇다 치고 대충 맨 타이가 보였다. 늘 완벽한 슈트의 정석을 보여주던 남자의 그 흐트러짐이 묘하게 섹시했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태령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당신 넥타이 비뚤어졌어요.”
섬세한 손길로 넥타이를 어루만지는 태령을 강준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잔잔한 미소, 가늘고 긴 손가락, 품 안에 쏘옥 들어오는 작은 몸. 장소가 장소인데도 가슴이 뻐근하고 머릿속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또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죠?”
얼굴처럼 잔잔하고 여린 이 음성마저도 왜 이렇게 유혹적으로 들리는가. 제 마음속에 굉장히 음흉한 악마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강준은 낮게 웃었다.
“그러게, 늘 계획표대로 움직이던 부인께서 무슨 바람이 들었을까.”
“그냥…… 보고 싶어서요.”
말끝을 흐리다가 속삭이듯 끝맺은 말에 강준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증발했다. 본가에 다녀온 이후, 아내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 분위기가 그랬다. 하지만 말로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백제 호텔 가든이 산책하기 좋다던데. 가볼래요?”
강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중문을 통과하고 가든 입구로 향했다. 오솔길로 접어들 때까지 대화 한마디 없었다. 깍지 낀 손을 꼭 잡고 아내의 보폭에 맞추어 긴 다리를 천천히 뻗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길이 멈춘 곳에 꽃 덩굴로 휘감긴 그네 의자가 있었다.
“앉았다 갑시다.”
남편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태령은 그네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정작 앉으라고 권한 남편은 길쭉한 그림자를 머리 위로 드리우며 서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자세로 태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렇게 서 있는 게 편하다는 것처럼. 하긴, 서강준한테 꽃 덩굴 그네 의자라니. 황금으로 제작한 왕좌면 모를까, 어울리지 않긴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태령은 다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호텔 뒤에 플라워 가든이 있는지 몰랐어요. 꽃도 예쁘지만 색의 조화가 너무 예뻐요.”
시야가 황홀할 만큼 예쁜 곳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플라워 가든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오로지 태령만 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볼 게 아내밖에 없다는 것처럼.
“예쁜지 모르겠는데. 색도 뭐 딱히, 내 눈엔 칙칙해 보이고.”
담담히 대답한 강준은 무심한 눈빛으로 성의 없이 주변을 훑었다. 아무리 봐도 무채색으로 흐릿한 세상은 딱히 시선을 끌지 못한다. 지독한 무관심에 뇌에서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거였다. 하지만 아내에게 다시 눈이 닿자 주위가 다채로운 색을 머금었다. 아내를 통해 강준은 세상을 다시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랑이었다.
“다시 보니 확실히 눈에 띄게 예쁘긴 하네요.”
역시나, 예뻤다. 아름다운 가든 안에 여왕 꽃처럼 가장 화려하게 활짝 핀 주세희가.
“내 부인이.”
강준은 가늘게 눈을 뜨며 웃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본인이 예쁜 건 알고 있죠?”
“……몰라요, 그런 거.”
시선을 피하는 아내의 목덜미가 붉다. 귀엽게 이런 건 또 못 견뎌 하지.
“백제 호텔 플라워 가든 그네 의자는 프러포즈 장소로 유명해요.”
느닷없는 설명에 강준을 바라보는 아내는 미처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은 꽤 많았다. 첫날밤 이후 강준이 반지를 새로 주문 제작한 것도. 재킷 안쪽 주머니에 그 반지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반지를 작고 고운 손에 끼워주려 한 것도. 그런데 오늘 우연히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버렸다. 그럼 당연히 끼워줘야지. 그 말을 자신에게 직접 해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랑해란 말은 나중에 천천히 수도 없이 들으면 되니까. 침대에서 들으면 더 좋을 것 같고. 아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강준은 작은 손을 가만히 잡았다.
“결혼도, 했고.”
커다란 손안에 잡힌 손이 터무니없이 작다.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도, 되었고.”
반지를 찾은 날부터 간절하고 애타게 기다렸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에 이 반지를 끼워줄 그 날을.
“사랑도 이미, 하고 있고.”
느리게 올라온 시선에 작은 손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애처로운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강준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랑 연애합시다, 주세희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