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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주세희, 사랑이야. (45/110)

45. 주세희, 사랑이야.2021.09.05.

새의 둥지처럼 아늑한 남편의 품 안에서 태령은 느리게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설마 아니겠지. 내가 잘못 들었겠지. 하지만 남편이 불렀던 그 이름은 지금도 귓가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주세희, 주세희, 주세희. 지독히도 선명한 음성으로 다정하게. 그때 강준이 또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16564547311487.jpg“세희야.”

이번엔 정겹고 친근하게, 마치 자주 불렀던 이름처럼. 태령은 심장이 쿵, 하고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고, 언제부터 알았냐고, 내 뒷조사를 했냐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들을 겨우 참으며 태령은 생각했다. 분명 그 밤이다. 우리의 첫날밤, 잠이 든 줄 알고 남편에게 진짜 이름을 속삭여주었던. 술 취하면 필름이 끊긴 듯 연기한 것처럼, 그때도 남편은 잠이 든 척 연기한 거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흐트러졌던 감정이 놀라울 만큼 추슬러졌다.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태령은 남편의 품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16564547311492.jpg“내 이름, 알고 있었네요.”

남편을 바라보는 눈빛에 실망감이 옅게 담겼다. 또 속았다는 마음에. 사랑하는 마음을 기만당한 것 같아서.

16564547311492.jpg“그래서, 내 뒷조사는 했어요?”

했지, 안 했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이노그룹 부회장 유영국의 숨겨진 사생아라는 것. 아버지의 아내가 엄마의 쌍둥이 언니이고 내 이모라는 것. 정상적인 루트론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진실들을.

16564547311492.jpg“나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연이은 질문에도 강준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집요한 눈빛만큼은 여전히 태령에게 향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아래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을 죄다 읽어내고 있었다. 놀라움, 불안함, 두려움, 체념, 후회.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을 향한 원망과 실망. 뒷조사를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강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64547311487.jpg“뒷조사 안 했어요. 알고 있는 건 이름뿐이고.”

16564547311492.jpg“왜…….”

믿을 수 없다는 듯 살포시 미간을 구기는 아내를 보며 강준은 싱긋 웃었다.

16564547311487.jpg“왜겠어요, 부인.”

네가 이럴 줄 알고. 나를 원망하고 나에게 실망하고, 그래서 마음을 더 닫을까 봐.

16564547311487.jpg“뒷조사했다고 하면 날 쓰레기 취급할 것 같고.”

촉촉이 젖은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자 아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16564547311487.jpg“네가 날 믿고 먼저 말해줬으면 했고.”

흠뻑 젖어 달아오른 눈을 보고 있으니 강준의 가슴이 찌르르 울린다. 사랑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 통증이었다.

16564547311487.jpg“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

다정한 눈빛과 애틋한 스킨십을 자꾸만 연발하는 남편을 피해 태령은 뒤로 살짝 물러났다. 남편은 지금 온갖 매력을 발산하며 작정하고 덤벼드는 중이었다. 자신을 흔들고 무너뜨려서 사랑에 빠진 바보처럼 만들려고. 태령은 떨리는 목소리에 원망을 한껏 담아 물었다.

16564547311492.jpg“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사랑 아니잖아, 사랑일 리가 없잖아요.”

나밖에 없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굴지 말고 차라리 그냥 말해. 새롭게 계획한 복수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뭐든 해줄 테니까, 내 복수에 동참해달라고. 그럼 나도 모르는 척 내 비밀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지 모르잖아.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고, 거래는 그렇게 성립이 되는 거니까. 남편의 대답이 없자 태령은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16564547311492.jpg“그냥 대놓고 말해요. 내게 원하는 게 뭔지.”

남편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16564547311487.jpg“왜 사랑이 아니라고 장담할까.”

강준이 벌린 거리를 다시 좁혀왔고 얼굴을 내리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손끝 하나 닿지 않고 그 이름을 또 불렀다.

16564547311487.jpg“주세희.”

지독히도 낮고 선명한 음성으로.

16564547311487.jpg“사랑이야.”

휘둥그레진 시야로 남편이 버겁게 밀려들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으로는 남편의 그 고백이 뜨겁게 밀려들었다.

16564547311487.jpg“널 사랑한다고.”

더는 의심할 수 없는 남편의 진심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고집스럽게 버텨보지만 이제 남편은 쉼 없이 고백해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애단 표정으로, 아릿한 음성으로.

16564547311487.jpg“사랑해, 주세희. 그것도 아주 미치게.”

조금은 투박하면서도 거친 고백이.

16564547311487.jpg“날마다 입이 닳도록,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고백해줄까. 그럼 믿어주려나.”

다음은 짙은 한숨과 자조적인 미소가 뒤섞인 중얼거림이. 그 순간 태령의 머릿속에서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유태령이 아닌 걸 알게 된 첫날 밤 이후 변한 남편이. 사랑을 입에 담고 다정하고 따스해지고. 자신을 향한 남편의 눈빛, 표정과 말투, 뜨거운 눈동자와 짙은 한숨까지. 사랑이 아니고선 설명이 안 되는 수많은 것들이. 정말 몰랐다, 당신도 사랑일 줄은. 나 혼자 한 사랑이 아니라니. 당신도 결국 사랑이었다니.

16564547311492.jpg“……믿을게요. 그리고 늦게 알아줘서 미안해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짓는 태령을 강준은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16564547311487.jpg“고백에 대한 대답은 천천히 해줘도 돼요. 기다려준다고 했잖아.”

가만히 내려다본 강준의 시야에 물기 젖은 아내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

16564547311487.jpg“그 대신 약속하나 해줘요. 앞으론 내 앞에서만 울겠다고.”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찾아 다시 온 차고지. 그곳에서 본 장면이 가슴에 아리도록 박혀 버렸다. 공허한 눈동자, 자포자기한 표정, 하염없이 흐르는 투명한 눈물. 훅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롭게 서 있던 가녀린 몸.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아픔이 뭔지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16564547311487.jpg“우는 걸 보니까 무지 마음 아픈데.”

젖어 있는 눈가를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 손끝에 묻어난 투명한 눈물을 보며 강준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16564547311487.jpg“내가 없는 곳에서 울고 있으면 그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차마 울지 말라고는 못 하겠고. 그러니까 차라리 내 앞에서 울라고.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16564547311492.jpg“흐윽.”

울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제 가슴을 때리는 작은 손이 아플까 봐 얼른 깍지를 꼈다. 아내의 입술에 냉큼 입을 맞추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끌림이었다. 기가 막힌 듯 바라보는 아내의 눈꼬리에 맺힌 투명한 눈물마저도 너무도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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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피숍 직원이 진우를 창가 쪽 자리로 안내했다. 큰 기둥을 끼고 자리 잡은 넓은 공간에 테이블은 단 하나였다. 룸 못지않게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16564547366752.jpg“와, 나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냐.”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꼬맹이를 만나는데. 김 비서에게 전화를 한 건 일주일 전이지만, 서로의 스케줄을 조율하느라 며칠이 걸렸다. 자신도 바빴지만 꼬맹이도 못지않게 바빴으니까. 겨우 약속을 잡은 게 중간 지점인 백제호텔이었다. 대화를 나눌 시간도 고작 20분이고. 또각또각. 뒤에서 들려오는 산뜻한 하이힐 소리에 진우는 벌떡 일어나 돌아섰다.

16564547366752.jpg“세희야…….”

진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앞에 멈추어 선 태령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16564547311492.jpg“내가 입조심하랬지.”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의미 같아서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진우를 스쳐 지나가는 태령에게서 꽃향기가 난다. 엉거주춤 다시 앉은 진우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참 많았다. 하지만 막상 꼬맹이가 눈앞에 있으니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래서 진우는 입 다물고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이름 한번 불렀다가 눈칫밥을 먹은 효과였다. 가장 큰 이유는 꼬맹이에게 요점만 뽑아서 말하는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어서였지만. 직원이 주문을 받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테이블 위에 주문한 음료를 놓았다. 얼음이 맺힌 잔을 가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태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16564547311492.jpg“한 달, 늦어도 두 달이야.”

앞뒤 툭 잘라먹는 직설적인 화법은 여전했다.

16564547311492.jpg“내가 유태령이란 이름으로 살아갈 남은 기간.”

무슨 소리냐는 듯 진우가 눈을 껌뻑거리며 바라보자 차분히 말을 이었다.

16564547311492.jpg“그 후엔 진짜 내 이름으로, 그리고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갈 거야.”

4년에 가까운 잠수를,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꼬맹이는 단 세 마디로 끝내버렸다. 시작도 없고 중간 설명도 없이, 결과만 깔끔하게. 그런데도 찰떡같이 이해가 되었다. 주세희는 지금 유태령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두 달 후 원래의 자리를 찾고 모든 게 제자리로 원위치 된다는 것. 왜 주세희가 유태령 흉내를 내는지는 모르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알려주고 싶지 않고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 안 해준 거겠지.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조용하고 어둡고 말수 적고 쌀쌀맞고, 혼자 다 생각하고 결정하고 감당하고.

16564547311492.jpg“그때까진 날 모른 척해줘. 그 말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진우의 손길에서 씁쓸함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안부 한번 물을 법한데, 다정히 눈을 맞춰주고 한 번 웃어줄 법한데.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쌀쌀맞게 대하는 꼬맹이 때문에.

16564547366752.jpg“그럴게.”

그런데도 진우는 안도감에 얼른 대답했다. 지금까지 진우는 자신의 외모와 성격에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 남녀노소, 나이 불문, 누구에게든 먹혔고 친근하게 다가가서 매력을 어필했다. 하지만 꼬맹이의 남편이라는 위압적인 남자를 만난 이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그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과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압도적인 분위기, 강렬한 남성스러움, 오만한 눈빛과 건방지면서도 정중했던 말투. 최근에 하늘 높이 치솟았던 자신감이 확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 남자와 정면으로 붙으면 백전백패할 것 같아서. 그런데 유태령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건, 두 달 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건. 그 결혼도, 남편이라는 남자와의 관계도 진짜가 아니란 거니까. 나에게 다시 기회가 돌아온다는 의미니까.

16564547366752.jpg“대신 두 달 안에 꼭 돌아와야 해, 알았지?”

주세희로, 나의 꼬맹이로. 지금까지 꼬맹이의 폐쇄적인 성격을 알기에 너무 느슨하게 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깨달았다. 고백은 준비가 아니라 타이밍이란 걸. 제자리로 돌아만 와 봐. 아주 정신 못 차리게 고백한 후에 직진해줄 테니까. 인간 오뚜기가 뭔지 보여주고 말리라. 의지를 활활 태우는 그때 볼일 끝났다는 듯 꼬맹이가 매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64547366752.jpg“잠깐, 나 하나만 물어볼게!”

그래서 진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 강준이 운동을 한창 하고 있을 무렵, 피트니스 클럽에 늦게 나타난 경진이 말했다.

16564547395282.jpg‘뭐야, 너 아직도 운동 중이냐? 태령 씨 커피숍에 들어가는 거 봤는데, 너 만나러 온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운동복 차림으로 바로 내려왔다. 오늘의 일정표에 의하면 아내는 호텔 근처에서 관계자들과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호텔에 왔다는 건 자신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집무실을 찾아왔던 그 날처럼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려는 건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커피숍으로 향하는 강준의 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그래도 연락은 해줬어야지. 길이 어긋났거나 많이 기다리면 어쩌려고. 커피숍에 들어선 강준에게 직원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강준이 회원 보증금만 억대인 백제호텔 피트니스 클럽 회원이란 걸 알아서였다. 운동이 끝난 후 삼총사가 늘 들러서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사라진다는 것도. 거침없이 넓은 공간을 가르며 강준은 기둥 쪽으로 향했다. 아내의 성격이라면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할 것 같아서였다. 예상대로 그 자리에 앉은 아내를 본 강준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내는 혼자가 아니었다. 볼 때마다 이유 없이 거슬렸던 댕댕이 같은 남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16564547366752.jpg“잠깐, 나 하나만 물어볼게!”

남자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는 아내가 보였다. 둘이 왜 만났고 무슨 사이일까. 이 만남을 내게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뭐고. 온갖 의심들이 뒤엉키는 와중에도 강준은 아내를 믿고 싶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확인했는데, 이딴 오해로 다시 멀어질 순 없으니까.

16564547366752.jpg“결혼도 거짓인 거지? 그 키 크고 잘생긴 재벌 3세 남편도. 사랑은 아니지?”

남자가 던진 질문에 아내는 대답 대신 창밖을 고요히 응시했다. 그 침묵에 긴장한 건 남자가 아닌 강준이었다. 한참 후, 차분히 흘러나온 아내의 말이 강준의 뇌를 후려쳤다.

16564547311492.jpg“거짓이라는 오빠 표현이 맞아. 내 이름으로 한 결혼이 아니니까.”

아내의 그 대답에 환하게 빛이 나던 강준의 시야가 어둠 안으로 침몰했다. 다채롭게 빛이 났던 세상이 고유의 색을 잃었다. 당장 뛰쳐나가 아내에게 묻고 싶었다. 너에게 난 거짓뿐인 존재였는지.

16564547366752.jpg“그치? 난 또 괜히 걱정했네.”

남자의 음성에 어린 안도감과 기쁨이 강준에겐 분노로 닿아왔다. 머릿속이 분노로 달궈져 뜨거워졌고 가슴 안에서 붉은 경고등이 울렸다. 선을 넘은 건 남자였다. 그 날 경고했는데 듣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 말로 하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품위를 잃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때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갈 상황이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다시 들려온 아내의 음성이 강준에게 겨우 브레이크를 걸었다.

16564547311492.jpg“근데 오빠, 그 거짓 속에 진실 하나가 있어.”

창밖을 응시하던 아내의 눈빛이 미묘하게 부드러워지고.

16564547311492.jpg“사랑은 맞거든.”

곱고 어여쁜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희미하게 어렸다.

16564547311492.jpg“내가 남편을 사랑해.”

아내의 그 말이 강준의 심장을 제대로 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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