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제 너만 하면 돼.2021.09.02.
다정한 그 눈빛이 태령에게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도 같았다. 마음껏 이용하라고, 기꺼이 이용당해주겠다고, 너만은 그래도 된다고. 태령은 문득 생각했다. 남편이 언제부터 날 이런 눈으로 보았던 걸까. ……모르겠다. 늘 외면하고 경계하고 의심하느라 바빠서, 남편을 제대로 보려 한 적이 없어서. 아득한 감정에 사로잡혀 태령은 조심히 물었다.
“정말 뭐든지 해줄 거예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강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태령은 못된 부탁을 하려고 했었다. 남편에게 키스해달라고 하고 사랑한다고 달콤하게 속삭여달라고 할 참이었다. 내가 뭘 해도 남편은 괜찮을 것 같아서.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아서, 담담할 것 같아서. 어차피 서강준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다정한 눈을 보니 못 하겠어. 태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 잠깐만 안아줄래요.”
지금은 그거면 될 것 같아. 남편이 태령을 품에 안으며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안아주는 게 뭐 어렵다고, 거창하게 뜸을 들여요.”
몇 번을 말해요, 내게 당신은 뭐든 어렵다고. 남편이 괜히 얄미워 품에서 벗어나려다 더 포옥 품에 안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내려앉는 나직한 음성.
“좀 더 안겨 있어요.”
그래서 태령은 몰랐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조 여사 부부에게 강준이 시선을 두고 있다는 걸.
“걷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마지못한 듯 강준이 태령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안을 땐 전광석화 같던 팔이 놓아줄 땐 슬로우모션처럼. 태령이 가만히 올려다보자 강준이 피식, 웃었다.
“짧게 안고 있으니까 아쉬워서.”
“잘 때 내내 안고 자는데 뭐가 아쉬워요.”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태령이 말하자 강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때 안는 거랑 지금 안는 거랑은 감정의 결이 달라요.”
밤마다 강준은 제 품에 안긴 건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이라고 애써 최면을 걸었다. 그래야만 몸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포효하는 짐승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결론은 아내를 밤에 안는 건 안는 게 아니었다. 길고 긴 고달픈 수행과도 같았다. 물론 아내는 그걸 모르겠지만. 그때 연숙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조 여사 부부가 가봐야 한다고 했다. 서 회장과 연숙을 대신해 태령과 강준이 조 여사 부부를 배웅했다. 차고에 도착하자 조 여사가 나긋나긋하게 말을 했다.
“태령아, 넌 우리 차 타고 같이 가지 그러니. 회사 경영하느라 가족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힘든데.”
좋지 않은 의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 여사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태령에겐 없다.
“그럴…….”
그때 갑자기 강준이 태령의 손을 잡아 제 뒤로 보내며 말을 가로챘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태령 씨와 더 있고 싶어 합니다. 아들인 제가 질투 날만큼 워낙 예뻐해서요. 다음에 시간 되면 같이 식사 한 끼 하시죠.”
오늘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선언해서일까. 강준은 이젠 노골적으로 태령을 감싸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고 있는 태령마저 조마조마할 만큼.
“그럼 강준 군, 가족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니 자리 좀 잠시 피해 주겠나?”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강준의 손을 태령은 살며시 잡아당겼다. 비스듬히 내리뜬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제야 강준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기다리시니 10분 안에 들어와요. 시간 오버되면 데리러 나올 테니까.”
태령에게 말하고 있지만, 강준의 시선은 조 여사에게 향해 있었다. 마치 조 여사가 태령에게 해코지라도 할 것처럼. 강준이 사라지자 조 여사는 도끼눈으로 태령을 잠시 노려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조 여사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여보, 얘 얼굴에 상처 나면 어쩌려고!”
화들짝 놀란 영국이 조 여사의 손을 얼른 잡았다.
“지금 당신, 이것을 걱정하는 거예요?”
“어허, 그럴 리가. 얼굴에 상처 남으면 회장님과 서 사장이 눈치챌까 봐 그러지. 당신 손도 아프고. 그러니 말로 합시다, 응?”
씨근덕거리며 숨을 내쉬던 조 여사가 날카롭게 태령을 쏘아붙였다.
“적당히 잘 지내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작정하고 달려들었나 보지?”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누굴 등신 취급해! 서강준이 너한테 푹 빠진 게 뻔히 보이는데! 너 보호하겠다고 가족들 내세워 방패 노릇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 거래도 털어놨니?”
태령은 속으로 비소를 흘렸다. 이럴 줄 알았다. 적당히 잘 지내라고 해놓고 진짜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니 불안했겠지.
“비밀은 지켰고 엄마가 적당히 잘 지내래서 그러는 중이에요.”
“비밀을 지켰는데 서강준이 널 그리 싸고 돌아?”
“전엔 안 그랬는데 집무실에서 엄마가 절 폭행한 걸 본 후로 그러는 것 같아요. 그날 특히 몸이 좀 안 좋았던 걸 강준 씨가 알거든요.”
태령은 나긋나긋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당신 잘못이라고. 슬쩍 영국의 눈치를 본 조 여사는 태연히 대화 주제를 틀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보렴. 적당히 잘 지내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예뻐 보이려 했고 살갑게 굴었고 애교도 좀 부리고, 자존심도 좀 세웠어요.”
남편에겐 오히려 반대로 굴었지만 태령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순진한 척 가식을 떨며 조 여사를 열 받게 할 수만 있다면.
“엄마 조언대로 예전에 언니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면서 생각하고 행동했어요. 왜 언니가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은지 이제 알겠어요. 쌀쌀맞던 강준 씨까지 저에게 마음을 열 줄은 몰랐거든요.”
독기 어린 눈과 파들파들 떨리는 입매를 보니 묘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하지 말……!”
갑자기 다가온 조 여사가 태령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챘다.
“서강준이랑 잤지? 네 엄마처럼 그 몸뚱이로 유혹한 거야, 그렇지?”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두피가 벗겨지는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태령은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아픔에 무감각해지려 애썼다.
“한 침대에서 잠은 잤지만 엄마가 상상했던 일은 없었어요.”
그 말에 영국이 얼른 다가와 태령의 머리채를 움켜쥔 조 여사의 손을 떼어냈다.
“거참, 당신은 잘하고 있는 애한테 왜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뭐라고요?”
“그 애였다면 이렇게 못 해. 태령이나 되니까 어른 공경할 줄 알고 싹싹하게 굴어서 이쁨받지. 그뿐이야? 회사 경영도 야무지게 잘하고 서 서방도 우리 의도대로 넘어왔고. 대체 뭐가 문제야?”
조 여사를 달래려는 듯 영국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 말씀 같이 들었잖아. 손자며느리가 예뻐서 뭐든 해주고 싶다고. 요즘 내 사정 힘든 거 알고 나한테도 힘을 실어주고 싶다 하셨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노는 거 좋아하고 자유로운 거 좋아하는 그 애한테는 오히려 이 자리가 더 감옥일 텐데, 굳이 위험하게 꼭 바꿀 필요가 있나 싶어서.”
조 여사가 살벌하게 노려보자 흠칫하긴 했지만, 영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그 애한테도 좋은 일이고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험험, 태령이한테도 우리가 좋은 일이 되게 해주면 되고.”
태령은 질렸다는 눈빛으로 영국을 보았다. 이 순간조차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려는 영국이 경멸스러워서.
“아니면 회장님이 날 밀어줄 때까지 시일을 좀 미루든가. 괜히 분위기 좋은데 바꿨다가 들통나면 어쩌려 그래. 서 회장한테 점수 따긴커녕 이혼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분노감에 몸을 부르르 떨던 조 여사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곤 태령을 향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제안했을 때 내숭 안 떨고 받아들였으면 엄마도 이렇게 화를 안 냈을 텐데. 이제 든든한 후원자까지 생겼으니 다시 생각해보렴, 태령아.”
한 걸음 더 다가온 조 여사가 태령을 다정하게 품에 안았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난 네 엄마 무덤에 찾아갈 생각이란다. 해주고 싶은 말이 꽤 많지 않겠니?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네 딸도 너랑 똑같은 짓을 했다고. 천박한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하지만 귓가에 흘리는 속삭임은 지독히도 잔인했다.
“네가 내게 남편을 빼앗아갔으니, 난 그런 네 딸이라도 뺏어가겠다고. 살아서도 못 본 딸, 죽어서도 못 보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제발 그래 주렴, 내 딸.”
*** 차고지에 홀로 남은 태령은 멍하니 서 있었다. 강준이 말한 시간이 훌쩍 지난 줄도 모른 채. 태연한 척 버텼지만, 사실은 조 여사의 말들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악착같이 뒤집어쓰고 있던 허물을 기어이 벗겨버렸다. 조 여사는 태령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원망하고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했던 엄마를. 그런 엄마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죽기보다 더 싫어했던 자신을.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눈가가 따끔거리더니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흘리는 눈물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고개를 떨군 태령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난 엄마랑 달라.”
그걸 증명해 보이려고 이렇게 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사랑도 하지 않고 독기 가득해서 돈만 모으고 복수를 목표로 살아가고. 그때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거칠게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지만 이미 늦었다. 눈가는 붉고 뺨은 흠뻑 젖고, 온몸은 달달 떨고 있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얼굴에 닿는 시선이 집요했다.
“……보지 마.”
태령의 입에서 반말이 툭, 튀어나왔다. 음울하고 독하고 잔뜩 비뚤어진, 매력은 쥐뿔도 없는 밀랍 인형. 우아하고 단정한 유태령의 허물을 벗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조용히 다가온 남편이 태령의 허리를 가만히 당겨 안았다.
“……안지도 말라구!”
작은 손으로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보지만 이미 남편의 품이었다.
“안는 건 허락해줘야죠, 그래야 얼굴을 안 보는데.”
나직한 음성이 묘하게 짓궂었다. 발끈해서 고개를 든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흉한 꼴을 보고도 변함없이 다정한 눈빛에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펑 하고 터져버렸다.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줄줄 흘러내렸다. 지금 이 남자의 모든 게, 바라보는 눈빛이, 표정이, 말투가, 분위기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사랑 같아서.
“정말 나한테 원하는 거 없어요?”
남편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고 눈물을 훔친다.
“뭐든 해주겠다는데, 기꺼이 이용당해주겠다는데.”
벌어졌던 거리가 좁혀지고, 서로의 몸이 다시 빈틈없이 밀착되고. 그리고 입술이 다가왔다. 뺨에 닿은 뜨거운 입술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따라 움직였다. 거부하고 밀어내야 하는 걸 아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이 남자의 품이, 이 남자의 위로가. 지금 너무도 간절해서.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요. 내가 정말 못되고 이기적으로 굴면 어쩌려고.”
이 남자가 꺼내 보인 진심이 버거워 태령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감은 눈꺼풀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쏟아졌다.
“뭐든 용서하고 받아줄 테니 좀 그래 봐요. 그럼 부인이 내 진심을 좀 알아주겠지.”
“당신 진심 따위 난 궁금하지 않아.”
당신도 나처럼 복수로 가득 차 있잖아.
“궁금해하지 마요. 내가 알게 해줄 테니까 곁에만 있어 줘요.”
처음이었다. 목적이 뭐든, 누군가 나를 이토록 간절히 원한 적은. 태령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조차 혼자 있을 땐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딸을 사랑하면서도 제 딸의 목숨을 앗아간 손녀딸이 미워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기어이 입 밖으로 터져버렸다. 늘 그렇듯 남편은 타이밍의 귀재였다. 지금 태령은 감정이 흐트러지고 멘탈은 무너진 상태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여리고 말랑말랑해진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눈물 날만큼 다정한 이 남자 앞에서 버틸 재간이 더는 없었다. 젖어 있는 긴 속눈썹 너머로 남편을 바라보며 태령은 속삭이듯 말했다.
“나한테만 다정하게 대해줘요.”
헤어짐은 피할 수 없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욕심 내보고 싶어졌다. 이 남자를, 이 남자의 사랑을.
“그 눈으로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해줘요.”
연기라도 좋으니 이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뭔지 알고 싶어졌다. 날 혼란스럽게 하는 지금처럼. 뭐든 완벽하게 잘하는 당신은 사랑하는 연기도 뛰어날 테니까.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당신이 그래 줬으면 좋겠어.
“그래 줄 수 있어요?”
아릴 듯한 시선으로 애처롭게 매달리는 아내 때문에 강준은 여유가 사라졌다.
“왜 모를까.”
중얼거리듯 말을 하며 강준은 천천히 아내에게 손을 뻗었다.
“난 이미 너한테만 다정하고.”
짐승 같은 촉으로 눈치를 챘다. 지금 눈앞의 아내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너밖에 보이지 않고.”
고집스러운 턱 끝을 잡고 깊숙이 눈을 맞추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랑도 이미, 하고 있는데.”
너를. 마지막 말은 긴 속눈썹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눈물방울을 입술로 쓸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 사랑.
“이제 너만 하면 돼.”
아내의 귓가에 심장 떨리는 그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 본다.
“……주세희.”
사랑하는 여자의 진짜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