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아내의 어여쁜 대답.2021.08.29.
아내는 순진무구한 눈빛과 단정한 말투로 강준을 너무도 쉽게 유혹했다. 가슴 안에 단단히 박아놓은 심지가 줏대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짧은 순간, 격렬한 충돌이 일었다. 안으라는 본능과 참아야 한다는 이성이. 당장의 욕망인지, 오래 갈 사랑인지. 짐승으로 남을지, 인간으로 기억될지. 갈등에 빠지는 순간, 강준은 숨을 멈추며 시선을 내렸다.
“……!”
아내의 작은 손이 살금살금 가슴을 침범하고 있었다. 상의를 입을 걸 그랬다고 후회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맨가슴을 어루만지는 서툰 손길에 몸은 빠르고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꽉 다문 잇새로 뜨거운 숨만 훅훅 내뱉으며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몸은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걸 아내도 느낀 것 같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겠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방황하던 아내의 얼굴이 새빨갛다. 속삭여오는 나긋나긋한 음성에 수줍음이 가득했다.
“강준 씨, 참지 않아도 돼요.”
다행스럽게도 상반신만큼은 강준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었다.
“아직 참을 만해요.”
입술은 이성적인 인간처럼 말을 했다. 야한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손은 아내의 옷을 벗기는 대신 더 꼭 품에 끌어안았다. 비록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노는 남편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짐승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했으니 된 거다.
“그러니까 나중에.”
욕망보다 급한 건 사랑이고, 아내의 몸보다 고픈 건 아내의 마음이니까.
“강준 씬 날 안고 싶지 않아요?”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참는 겁니다.”
강준은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아내는 알까. 어느 남자들보다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근력에 체력에 뒤에 력(力)자가 들어가는 건 모두 월등한 남편을.
“그러니까 왜요?”
그런데 오늘따라 아내는 집요했다. 조 여사와 저녁 식사를 했다고 했는데, 거기서 또 무슨 말을 들었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강준은 참아야 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줄래요?”
강준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원하는 거다. 하지만 아내는 그를 원해서가 아니라 도리를 하려는 거였다. 몸은 주되 마음의 문은 꼭 닫은 채로. 이깟 욕망 하나 컨트롤 못 하는 것도 자존심에 스크래치 갈 일이고. 아내의 침묵에 강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교미하는 짐승이 되고 싶진 않아요.”
그 밤, 짐승같이 굴었던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배려하고 섬세하게 굴지 못 해서. 교감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것 같아서. 사랑보다 욕망을 먼저 앞세운 것 같아서. 자신만 환장하게 좋았던 것 같아서.
“누, 누가 그렇대요?”
노골적인 대답에 눈을 흘기는 작은 얼굴조차 어여뻐 침이 꼴깍 삼켜졌다.
“아내의 도리가 아니라, 부인이 날 사랑해서 안겨줬으면 해요.”
지금도 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강준은 참고 또 참으며 인내했다.
“그래서 그 말 듣기 전까진, 안고 잠만 잘 거예요.”
날 믿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아내를 안지 않기로.
“말했잖아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뭐든 다 쉽게 해줄게요, 내가.”
강준은 향기로운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부인은 내 곁에만 있어줘요. 난 그거면 돼.”
곁에 있어줘야 내가 참고 인내할 수 있으니까. 아내가 사라지는 순간, 아마 미쳐 날뛰는 짐승을 보게 될 테니까.
“잘난 남편 둬서 뭐 합니까, 실컷 이용 좀 해줘요.”
가만히 안겨 있던 아내가 갑자기 강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 아내의 어여쁜 대답이었다.
그게 뭐라고, 이상하게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런 맛에 사랑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강준은 아내의 등을 토닥여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잡시다. 재워줄게요.”
겨우 가라앉힌 몹쓸 기운이 깨어나기 전에. 아내가 그만 잠들어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 다가온 주말, 처음으로 서 회장의 본가로 점심 초대를 받았다. 으리으리한 대문을 말없이 바라보는 태령에게 강준이 웃으면서 물었다.
“긴장돼요?”
태령은 대답 대신, 남편의 손을 꼭 잡으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사실 태령을 긴장하게 만드는 건 오늘 같이 초대받은 조 여사 부부 때문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 돌계단을 오르자 무릉도원이 펼쳐졌다. 기하학적으로 뻗은 오래된 소나무, 졸졸 흐르는 물길, 큼지막한 돌들과 이름 모를 꽃들. 잘 꾸며진 조경은 인공미보다 자연미에 치중한 듯했다.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앞뒤로 지어진 두 채의 건물이 보였다. 태령이 말없이 바라보자 강준이 설명해주었다.
“뒷건물은 갤러리로 쓰고 있어요. 할아버지 취미가 예술품 수집이라서. 오랫동안 사라졌던 작품들은 아마 다 저 안에 있을 겁니다. 앞 건물은 가족들이 지내는 곳이고.”
3층으로 지어진 앞 건물의 1층은 사면이 모두 오픈될 수 있도록 창문 형태였다.
“1층은 다용도 공간으로 주로 이용해요. 손님들도 초대하고 파티도 하고, 식사도 하고 회의도 하고. 워낙 밖에서 뭘 하는 걸 싫어하는 분이라서.”
강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으로 들어간 태령은 연숙에게 선물을 건넸다. 격하게 기뻐한 연숙이 서 회장을 모셔오겠다고 2층으로 사라졌다. 20명은 족히 앉을 널찍한 식탁에 앉아 있는 조 여사 부부에게 태령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조 여사가 유리알 같은 차가운 눈동자로 태령을 바라보았다.
“태령아, 식사 초대를 받았으면 30분은 일찍 오는 게 예의란다.”
“제 일이 좀 늦게 끝났습니다.”
그러자 강준이 태령의 앞을 막아서며 시선을 가볍게 차단했다.
“강준 군 바쁜 거야 우리도 잘 알지. 태령인 이쪽에 앉으렴.”
조 여사의 옆자리로 향하는 태령의 손을 강준이 잡았다.
“아내는 제 옆에 앉히겠습니다. 부부가 따로 앉으면 할아버님이 언짢아하실 수도 있어서.”
“그러든지, 그럼.”
그렇게 조 여사 부부와 마주 앉게 되었다. 태령은 그제야 건조한 눈으로 이노그룹 부회장인 영국을 바라보았다. 결혼식 후 처음 보는 건데도 서 회장이 나타날 엘리베이터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긴, 당신은 원래 그런 남자지. 외모만 번지르르하고 간도 작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책임감이나 양심의 가책은 더더욱 없고 말이다. 아내의 동생인 걸 알면서도 엄말 유혹하고 건든 건 영국이었다. 엄마의 임신 소식엔 비겁하게 혼자 빠져나갔다. 너무 똑같이 생겨서 착각했다고, 당신인 줄 알고 유혹하고 잠자리를 한 거라고. 조 여사가 부리는 패악도, 엄마의 죽음도, 핏줄인 딸도, 모두 외면하고 버린 남자. 그래도 조 여사가 낳은 딸만은 끔찍하게 아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혔다. 온기를 잃은 손끝이 고통스러울 만큼 시려서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때 테이블 아래로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태령의 손을 지그시 감쌌다. 가만히 시선을 틀자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그런데도 남편의 손이 나누어주는 온기는 눈물이 날 만큼 따뜻했다. *** 서 회장이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식사가 끝난 후 드러났다.
“내가 자네들에게 사과할 게 있어서 불렀네.”
서 회장의 시선이 조 여사 부부에게 향했다.
“내 손자 녀석이 태령이 속을 썩이고 다니는 걸 이제 알았지 뭔가. 그것도 우리 며느리가 말 안 해줬으면 여태 모를 뻔했어.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어릴 적부터 내 그리 교육시켰건만.”
강준을 한 번 노려본 서 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내가 자네들에게 대신 사과하지.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했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만 봐주게나.”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서 회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모두가 서 회장을 부르며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만류했다. 서 회장을 부축한 연숙이 조곤조곤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
“강준이가 내 말은 통 듣질 않아서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렸어요. 한 남자의 아내였고 한 아들의 어머니로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즐기고 싶었으면 결혼 전에 했어야지. 결혼하고 혼인 신고까지 했는데 그러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거잖아요.”
생긋 웃은 연숙의 시선이 조 여사에게 향했다.
“사실 사돈도 우리 강준이가 원망스러웠을 거예요. 세상 어느 엄마가 딸 냉대하는 사위가 예뻐 보이겠어요. 우리 강준이 고집에 사돈도 마지못해서 이해해준 걸 텐데. 내가 미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죠, 사돈?”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는 조 여사의 눈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걸 가만히 주시하던 서 회장이 갑자기 강준에게 호통을 쳤다.
“이 녀석아! 할아비와 어미가 사과하는데 넌 고개 빳빳이 들고 뭐 하는 거냐? 당장 사과하고 어른들 앞에서 약속해라! 다신 허튼짓 안 하고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그제야 천천히 일어난 강준이 조 여사 부부에게 말했다.
“너그러운 장인어른과 장모님과 달리 할아버님과 어머니는 그간 제가 못마땅하셨나 봅니다. 날마다 저를 잡아먹지 못해 이리 안달이시니. 그래서 일탈은 이쯤에서 그만둘까 합니다.”
“서강준! 그게 사과니?”
연숙이 작게 언성을 높이자 강준이 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두 분을 언짢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훌륭한 남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못한 것까지 사죄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구요. 그 대신…….”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린 강준의 시선이 태령에게 노골적으로 향했다. 그 눈빛을 알아차린 연숙이 얼른 끼어들었다.
“당연히 부부가 같이 노력해야지. 태령아, 강준이가 마음 잡겠다니까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같이 노력해주면 안 되겠니? 이혼할 게 아니면 같이 노력해야 부부 사이도 좋아지고 아이도 생기지. 그렇죠, 사돈?”
연숙이 조 여사 부부에게 지원을 요청하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조 여사가 입을 꾹 다물자, 영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령아, 네 엄마처럼 좋은 아내가 되겠다고 어른들께 대답해야지.”
서 회장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영국이 조 여사를 툭, 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 여사가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딸 가진 부모 마음을 이해해주셔서 두 분께 감사해요. 그리고 태령아, 서 서방이 좋은 남편이 되어주겠다는데 너도 노력하겠다고 대답해야지. 응?”
가식의 끝을 달리는 조 여사 부부를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고 태령은 차분히 대답했다.
“두 분 말씀대로 저도 노력할게요. 강준 씨에게 좋은 아내가 되도록. 최대한 빨리 좋은 소식도 전해드리려고 노력하구요.”
좋은 소식이 뭔지 알기에 서 회장과 연숙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면 조 여사 부부는 어두워졌다.
“내 손자가 고집이 좀 세도 약속 하나는 잘 지킨다네. 그러니 이만 앉아서 따뜻한 차 한 잔씩 마시자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서 회장이 앉자 강준을 제외하고 모두가 착석했다. 강준이 태령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서 회장에게 말했다.
“전 잠시 아내와 빠지겠습니다. 집 구경도 시켜줄 겸, 앞으로의 미래에 관해 대화도 나눌 겸.”
“그러려무나. 우리 손자며느리한테 내 갤러리도 좀 보여주고.”
서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강준이 손을 내밀었다.
“집 구경시켜줄게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태령은 조심히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정원에 다시 가보고 싶어요.”
선선한 바람이 쐬고 싶었고 증오로 들끓는 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정원을 나와 좀 걸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제야 태령은 차분하게 강준에게 물었다.
“오늘 일, 강준 씨가 계획한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해요.”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이었다. 태령은 조용히 웃으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냥, 여자의 감이요.”
며칠 전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옆에만 있어 달라고. 추진력이 무서울 만큼 거침이 없었다. 그 밤, 다 알아서 해줄 테니 옆에만 있어 달라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남편이 돌려서 말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왕 하게 된 결혼, 우연히 알게 된 진실, 더 짜릿한 복수를 위한. 내 옆에서 복수를 도와주면, 난 당신의 방패막을 해주겠다는. 무심코 몸을 튼 태령은 창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유 부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문득 궁금해졌다. 존재 자체를 잊으며 가차 없이 버린 딸이, 애지중지 키운 딸의 남편을 가로채면, 아버지라는 이름의 당신은 어떤 느낌일까. 사위와 적당히 잘 지내라고 했지만 막상 잘 지내는 걸 보면, 날 잡아먹지 못해 몸이 단 이모는 어떤 반응을 할까.
“강준 씨, 나 지금 당신 이용해도 돼요?”
느닷없는 태령의 요구에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태령의 앞에 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태령의 앞에 서서 허리를 기울여왔다.
“말만 해요.”
부드러운 숨결이 모난 태령의 마음을 달래듯이 귓가를 스쳤다. 이유 없이 아려오는 가슴에 태령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숨결이 닿을 만큼 남편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
깊이 응시해오는 눈빛이 가슴이 아릴 만큼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