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정말 그냥 잘 거예요?2021.08.26.
입술이 맞물리는 순간, 남편이 부드럽게 머금으며 빨아들였다. 벌어진 입안을 헤집는 숨결이 애간장이 탈 만큼 느리면서도 조심스럽다. 달콤하면서도 아릿한 자극에 온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흐물거렸다. 키스는 달콤하면서도 정중했고 아릿하면서도 금욕적이었다. 활활 태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선, 참고 또 참는 절제가 느껴졌다. 남편의 그 인내가 태령을 더 갈증 나게 했다. 그 밤처럼 뜨겁게 키스해주었으면. 아무 생각도 못 하도록, 오로지 당신과 나만 생각하도록. 나로 인해 이성적인 이 남자가 한껏 흐트러졌으면. 단단한 목을 감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셔츠에 닿았다. 손끝에서 요동치는 탄탄하고 따뜻한 근육의 감촉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얇은 셔츠 위에서 손톱을 세우자 남편의 목에서 낮은 신음이 울렸다. 흡사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류에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순간이었다.
“흐, 흐억! 죄, 죄송합니다! 노크해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뒤에서 들려오는 식겁한 음성에 엉켜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탁해져 버린 머릿속처럼 긴 속눈썹 너머의 시야도 흐리다. 뿌연 시야 속, 남편의 얼굴만은 또렷했다. 비스듬히 내리뜬 뜨거운 눈, 단정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 젖어 있는 입술. 책상 위에 반쯤 눕다시피 한 남편의 몸 위에 자신이 올라타 있다는 건 감으로 알았고. 나른한 감각에 취해 있어서인지 현기증이 났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태령은 생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엉큼하고 뻔뻔해졌을까. 꽤 대담한 짓을 했는데도 부끄럽진 않았다. 윤 실장을 보는 건 좀 민망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수고했으니 이만 퇴근해요.”
머리 위로 내려앉는 남편의 음성이 낮고 이성적이었다. 방금 전 짐승 울음소리를 냈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태령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독히도 나른하고 허스키한 음성으로 남편이 속삭여왔다.
“윤 실장 나갔는데, 이어서 더 할까요.”
어느새 남편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태령은 살며시 고개를 비틀어 그 입술을 피했다.
“싫어요, 그만할래.”
미묘한 침묵에 천천히 눈을 뜬 태령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남편의 표정에 어린 불만이 눈에 뻔히 보였다.
“혹시 삐졌어요?”
“삐졌다고 하면 더 해도 되고?”
어딜 감히.
“아니요.”
태령의 단호한 거절에 남편이 피식, 웃었다. 그 낮은 웃음소리마저 태령의 심장을 봄바람처럼 간질였다.
“매정하네. 방금 전까지 날 올라타서 요녀처럼 홀려놓고선.”
“요녀에게 홀린 남자치곤 키스도 점잖고 차분히 상황 정리도 잘하던데요.”
“부끄럽고 민망했을 부인을 위해서라고 합시다.”
내숭을 떨까 말까. 고민하던 태령은 조심히 말했다.
“저 부끄럽지 않아요. 민망하지도 않고요.”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었다. 서강준 당신은 모르겠지. 뭐든 쉬운 당신과 달리 난 당신에 대한 모든 게 어렵다는 걸. 수도 없이 망설이고 고민해야 한다는 걸. 이곳에 오는 것도, 당신에게 다가가는 것도, 기다리겠다는 별것 아닌 그 말도. 그런데도 오늘 당신에게 왔고, 기다리겠다고 했고, 발꿈치를 들며 먼저 입을 맞추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두 달뿐이니까. 내가 마음껏 사랑하고 떠나도 당신은 날 천천히 잊을 테니까. 뭐든 당신에게 해도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후회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부부끼리 한 스킨십이고, 여긴 공공장소가 아니라 강준 씨 집무실이잖아요. 그리고 옷도 다 갖춰 입고 건전하게 키스했어요, 우리.”
논리적으로 말하다 보니 정말 그랬다. 남편 덕분에 아주 부드럽고 점잖은 키스를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요. 그런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며 태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집에서 이어서 해요.”
발칙하고 도발적인 대답에 남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태령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남은 두 달 동안 남편과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마음의 교감도, 몸의 교감도 마음껏 나누면서. 당신이 날 뻔뻔하다고 해도, 훗날 이런 날 이기적이었다고 욕할지라도. 시간이 흐른 후 당신은 다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릴 것이다. 하지만 난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일 테니까. 그래서 이 정도 욕심은 부리고 싶어.
“혹시 내가 너무 뻔뻔해서 여자로서의 매력이 반감됐나요?”
남편이 그렇다고 하면, 강도를 조금은 낮출 의향은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난 심각하고 진지한데.
“웃어서 미안해요, 부인이 뻔뻔한 거면 난 음흉한 변태 같아서.”
얼굴을 내린 남편이 야트막한 숨과 함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그 밤 이후, 부인은 늘 내 앞에서 옷을 입었던 적이 없다고.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이 귀 끝까지 붉어졌다. 늘 이성적이고 담담하고 무심해 보이던 남편이 그런 야한 남자일 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태령의 허리를 남편이 더 바짝 당겨 안았다.
“이제 부인이 대답해봐요. 나도 남자로서의 매력이 반감됐는지.”
태령은 대답 대신 남편의 입술에 쪼옥, 건전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은 없을 테니까. 뻔뻔한 부인과 음흉한 변태 남편. 이보다 더 어울리는 조합은 없을 거라고. *** 진우는 최근 들어 연기를 배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집중하지 못한 탓에 선생님에게 혼쭐이 나고 20분 만에 수업이 끝났다. 멍하니 차에 오르는 진우에게 매니저가 물었다.
“너 아까부터 왜 그래, 김진우?”
이노패션 창립 행사에 다녀온 후 진우가 넋을 넣고 있어서였다.
“요즘 무리했더니 좀 졸려서요. 형, 나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해도 될까요?”
“그래. 대신 다음 스케줄은 정신 바짝 차리는 거다.”
“넵!”
매니저가 차에서 내린 후 진우는 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진경, 하나만 묻자. 먼저 말해주자면 묵비권 행사할 권리는 없다.”
[누가 댕댕이 아니랄까 봐 개소리를 하네.]
“세희 결혼했냐?”
[누, 누가 그딴 소리를 해!]
동생의 오버스러운 반응에 진우는 절망했다. 정말 결혼했구나, 나의 꼬맹이가.
“세희 만났어. 아니, 유태령 사장님을 만났다고 해야 하나 이제.”
[헐,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놈의 동생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쭈가 뭐래?]
“아무 말도 안 했어. 연락하라고 했는데 아직 못 했거든.”
겁나서. 내가 치졸한 남자라서.
“진경아, 그 결혼 진짜 아니지? 아니, 사랑해서 한 결혼 아니지? 세희한테 무슨 사정이 있는 거지?”
이노패션 유태령 사장에 대해 포털 검색을 해보았다. 대부분의 기사가 비즈니스적인 업적이 주였지만, 결혼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남편이라니, 아내라니. 내 꼬맹이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사랑을 한다는 게 감히 상상이 안 된다.
[난 오빠한테 어떤 말도 못 해줘. 쭈 만나서 직접 들어.]
“야! 너 핏줄끼리 치사하게 이러기냐? 내가 널 얼마나 끔찍하게 아꼈는데!”
[핏줄이 뭐! 난 핏줄보다 세희가 더 좋거든? 오빠는 아껴주기만 했지만 세희는 날 인간 만들어 줬어! 걔 아니면 나 지금 뭘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검은 머리 짐승이지만, 은혜를 고자질로 갚을 순 없지. 끊는다.]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아후, 김진경 진짜.”
속은 부글거리지만 감히 탓할 순 없었다. 주세희를 만나지 않았다면 제 동생은 지금도 철없는 날라리였을 것이다. 그런 동생을 악착같이 옆에 앉혀서 공부를 가르쳐준 게 세희였다. 쇼핑몰 대표직에 앉혀주고 사업을 알려주고 지금 누리는 이 넉넉한 삶도 세희 덕분이었다. 워낙 노는 걸 좋아하고 뭐든 빨리 질리고, 틀에 박히는 걸 싫어하고. 그런 동생을 유일하게 컨트롤하는 게 주세희니까.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세희는 고삐 풀린 남매를 유일하게 컨트롤 하는 능력자였다. 결국 진우는 직접 부딪혀보기로 했다.
“까짓거, 직접 듣지 뭐.”
김 비서가 건넸던 명함을 꺼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 강준이 욕실에서 나오자 이제 막 태령도 침실에 들어왔다. 늘 그렇듯 물기를 머금은 아내의 뽀얀 피부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 피부에서 얼마나 단내가 나는지, 입안에 머금으면 얼마나 달콤한지. 눈이 기억하고 몸이 기억하고 세포가 기억한다. 하늘거리는 잠옷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몸체도. 너무 잘 알아서 보는 것 자체가 곤욕이라는 걸 아내도 이제 조금은 알 것이다. 제발 좀 알아주라고 음흉한 변태임을 시인했으니까.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 아내가 살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침대로 향했다. 피하라고 말해준 건 아닌데. 물론 피한다고 두고 볼 생각도 없지만.
“오늘은 머리 안 말려줘요?”
어차피 아내가 올 거라는 걸 알기에 강준은 벽에 기대어 섰다.
“아니면, 이대로 자고.”
사뿐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강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애도 아니고, 머리는 혼자 말리면 안 돼요?”
“애처럼 버릇 들인 게 누군데.”
강준의 말에 태령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겨우 한 번 말려줬어요.”
“잠자리도 한 번 했는데 버릇 들었잖아요.”
강준은 긴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내 머리가, 당신의 모든 걸, 습관처럼 버릇처럼 기억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내는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당신 설마 지금도…….”
날 벗겼어요, 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늘 차분하던 아내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좀 더 짓궂게 굴고 싶게.
“억울하면 부인도 내 옷 벗겨요.”
바로 지금. 늘 그렇듯 지금 강준이 걸치고 있는 건 파자마가 전부였다. 허리춤에 손끝을 걸고 느긋이 시선을 내리며 일부러 느리게 말을 이었다.
“운동 열심히 해서 봐줄 만할 거예요. 그래서 부인도 좋아했던 걸로 기억…….!”
강준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새빨개진 얼굴의 아내가 작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버려서.
“요망한 입 좀 다물어……꺄앗!”
아내의 허리를 휘감아 품으로 끌어당기며 강준은 의자에 앉았다. 머리 안 말려주고 뭐 해요. 그런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빤히 올려다보자 아내도 결국 웃어버렸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아내의 손이 머리에 닿았다. 머리를 말려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좋아 강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 회사에 와줘서 기뻤어요.”
아내의 걸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서.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 물어봐도 돼요?”
드라이기 소리가 멈추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간 내가 너무 강준 씨한테 무심했어요. 강준 씬 내게 잘해줬는데 난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강준 씨에게 아내의 도리를 다하고 싶어요. 진심을 다해서요.”
“…….”
“물론 강준 씨만 괜찮다면요.”
의중을 묻는 조심스러운 음성에 강준은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무릎에서 떨어지는 치마 끝을 만지작거리며 강준은 담담히 물었다.
“부인이 말한 아내의 도리 경계선이 어디까지예요?”
“……강준 씨에게 경계선은 없어요.”
얌전하고 순종적인 그 허락에 아내를 당장 침대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래도 아내는 거부하지 않고 안겨 오겠지. 하지만 침대에 오른 강준은 아내를 품에 꼭 끌어안는 게 전부였다. 오늘도 마음속에서 애국가를 제창하며 건전하고 금욕적으로 한번 자볼까. 작은 머리 위에 턱을 올린 강준은 낮게 중얼거렸다.
“잘 자요, 부인.”
그런데 품 안의 아내가 오늘 유독 긴장한 것 같았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자 움찔, 했다. 왜 그런가 싶어 눈을 내리자 어둠 속에서 빤히 올려다보는 말간 눈과 마주쳤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미묘한 표정으로 아내가 조심히 물었다.
“정말 그냥 잘 거예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강준이 생각하려는 순간. 아내는 차분하고 단정하게 다시 물어왔다.
“오늘 밤, 절 안지 않을 건가요?”
강준의 단단한 멘탈마저 가볍게 흔들어버린 아내는 요녀, 마녀. 아니, 요마녀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