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젠 내가 서강준 당신을 더 원해.2021.08.22.
강준은 이노패션 창립 행사에 초대되진 않았다. 초대될 이유도 없지만, 초대했어도 참석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올 수 있었던 건, 호텔 근처에서 스케줄이 있어서였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였다. 저녁 식사를 거르고 선택한 행선지. 큰 걸 바라진 않았다. 20분이라는 시간 동안 아내의 얼굴을 맘껏 보고 갔으면 했다. 몇 마디 말도 나누면 더 좋고. 그런데 제 아내에게 넋이 빠져 있는 놈을 볼 줄이야. 예쁘니 멋지니, 반하니 마느니 중얼거리면서. 그때 그 댕댕이였다. 백화점에서 보았던, 그리고 청담동에서 둘의 키스를 구경하다 사라진 사냥꾼. 싸늘한 눈빛으로 내리찍으니 움찔할 땐 언제고, 이내 차분하게 반격한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유태령 사장님은 미혼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박해 보이는 눈으로 꽤 용기 있게. 물론 강준에겐 여전히 가소롭기 그지없지만. 강준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얄미울 만큼 느긋하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방금 알려줬잖아. 내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주세희고 유태령이기도 한, 저 예쁘고 멋진 여자의 남편이라고.
“이제 알았으면 사심은 접고. 내 아내에게 관심 끄고 접근하지 않으면 됩니다.”
처음엔 주세희란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더니. 오늘은 유태령이란 이름마저 아무렇지 않게 부른다. 그게 짜증스러울 만큼 거슬렸다. 자신보다 더 아내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과 같은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것도.
“그럼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을 테고. 내가 그쪽 삶을 망가뜨릴 일도 없을 겁니다.”
진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최고로 오만하고 재수 없는데. 타고난 분위기가 우아하고 정중해서. 사람 열 받게 반말하는데 또 존칭을 깍듯하게 섞으니까. 섬뜩한 협박이 분명한데 부탁하는 것처럼 어투가 세련되어서. 꼭지가 돌 만큼 열은 받는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입 다물고 물러나자니, 꼬맹이를 포기하는 것 같아서 싫다. 물론 눈앞의 위압적인 남자도 기어이 대답을 듣겠다는 듯 버티고 서 있었지만.
“유태령 사장님과 제가 조금 아는 사입니다. 그러니 본인에게 직접 듣고 나서 사심을 접든, 관심을 끄든, 접근하지 않든 하겠습니다.”
진우는 김 비서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럼 지금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꿀 먹은 벙어리는 안됐을 테니까. 물론 아무것도 모른다고 꼬리 내리고 물러나며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히 눈앞의 꼬맹이는 예전보다 멋지고 예뻐졌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살도 내려앉고 분위기는 더 차갑고 어둡고.
“하지만 제가 도와주고 지켜줘야 할 상황이면, 난 그렇게 할 겁니다.”
그게 안타까우면서도 진우에겐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이 남자와 결혼을 했어도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닐 거라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돈이 되는 거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던 독한 꼬맹이를 기억하기에. 만약 정말 그렇다면 기꺼이 꼬맹이를 위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지옥에 빠져 있다 해도 풍덩 뛰어들어 기어이 데리고 나올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살벌하고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함부로 오지랖 부리지 말지.”
오로지 진우만 들을 수 있는, 얼음송곳처럼 고막을 찔러오는 낮고 차가운 음성.
“그 대가를 본인이 아니라 내 아내가 치를 수도 있으니까.”
진우로선 본능이었다. 위협적인 남자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폭풍전야처럼 고요하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입니다.”
고저 없는 무심한 음성은 여전히 고요했다. 너 따윈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팽팽하면서도 살벌한 적막이 두 남자의 주변을 깨끗하게 점멸시켰다. 오로지 둘만 있는 것처럼. 파지직, 미묘하게 다른 눈높이에서 얽힌 두 개의 시선에서 푸르른 불꽃이 튀었다. 경계하는 눈동자와 방어하는 눈동자. 가차없이 찍어 내리는 눈빛과 그럼에도 기어이 고개를 들려는 눈빛. 그때 말끔한 슈트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남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다는 못 들었지만 끝은 들었다. ……가셔야 합니다라고. 남자의 서늘한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냉기가 더 짙어진다. 그럼에도 여유로운 눈빛과 표정으로 한 걸음 다시 다가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툭툭, 가볍게 진우의 어깨를 두드리는 남자의 커다란 손은 매끈하고 우아했다. 고생 따윈 안 해본 것처럼, 늘 지시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데만 이 손을 쓴 것처럼.
“내 여잔 내가 지킬 테니, 그쪽은 그쪽 걱정이나 하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유히 남자가 사라진 후에야 진우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여태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숨조차 제대로 쉬고 있지 않았다는 걸. 백화점에서 보았던 대로 남자는 최상위 포식자인 수컷이었다.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외모 속에 잔인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 남자인 자신이 봐도 위협적인데 여자인 너는 괜찮을까.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진우는 아득한 눈으로 다시 단상 위의 태령을 바라보았다. 꼬맹아, 방금 그 위험한 남자가 진짜 네 남편은 아니지? 아니었으면 한다, 제발.
*** 단상에서 내려와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끝낸 태령에게 김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
“이노 사모님한테 전화 왔었어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태령은 김 비서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나 긴 복도를 걸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휴게실에 들어가 앉자 김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장님과 남편분에 관련된 건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해달라고 했어요.”
“대가는?”
“매달 말에 이천만 원씩 입금해주시겠대요.”
“내가 말해준 대로 보고하고 입금받아요.”
“돈은 안 받으면 안 될까요? 괜히 받았다가 나중에 제가 사장님 편이고 사모님 속인 것까지 들통나면, 어후.”
겁먹은 표정을 짓는 김 비서에게 태령은 싱긋 웃으며 태연히 말했다.
“들통나도 뭘 어쩌겠어요. 혼자 분해서 바르르 떨기밖에 더하겠어요?”
“진짜 그럴까요?”
“몰래 분풀이는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땐 내가 승기를 쥐고 있고 본인 밥그릇 챙기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아직 때가 아니라 밝히지 않았을 뿐, 조 여사에 대한 자료는 충분히 모았다. 물론 정 실장과의 외도 장면은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꼭 끌어안고 있는 사진 몇 장만으로도 유 부회장은 부르르 떨 것이다. 믿음이 깨지는 것도 순식간일 테고. 또한 조 여사가 고가의 예술품을 사고팔며 돈세탁을 한 정황도 포착했다. 계획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 복수는 남편과 딸이 조 여사와 인연을 끊게 하는 거지만.
“아, 그리고 이거요. 서강준 사장님이 전해달라고 했어요.”
김 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내 남편 왔다 갔어요? 언제?”
“사장님 단상에 서서 창립사 하실 때요. 잠깐 들른 거라서 제대로 못 보고 가신다고 이거 주고 가셨어요.”
쇼핑백 안을 열어보자 작은 아이스팩과 함께 요구르트가 들어 있었다.
“편하게 드시고 나오세요.”
김 비서가 나간 후 태령은 빨대를 꽂아서 요구르트를 마셨다. 그런데 예전처럼 달콤하지가 않다. 결국 마시다 만 요구르트를 가만히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별것 아닌 것에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 사실은 요구르트를 마실 때마다 그때가 떠올랐다. 어두웠던 비상계단, 백허그 당했던 단단한 품, 그 품에서 묻어나던 짙은 체향. 옆에 앉았던 남편의 존재감, 자신을 가만히 지켜봐 주던 눈빛. 요구르트를 한 번 빨고선 찌푸리던 짙은 눈썹도. 이젠 알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뭘 망설이고 있는지.
“보고 싶어.”
태령은 그립고 보고 싶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잠깐 들러서 제 얼굴을 보고 간 남편이. 요구르트를 직접 손에 들고 와서 김 비서에게 줬을 남편이. 이 마음을 더이상 참고 외면하기 힘들었다. 아니, 이젠 남편의 숨은 속내가 뭐든 상관없어졌다. 난 내 마음만 조금씩 드러내면 되니까. 부부로서, 아내로서. 그 빌미를 먼저 마련해준 건 바로 조 여사였다. 타고난 의심과 자신을 향한 불신으로 인해. 그러니까…….
“보러 갈래.”
지금 당장. 난 당신 아내니까. *** 남편의 집무실에 들어선 태령은 윤 실장에게 돌아섰다.
“고마워요, 윤 실장님.”
남편의 일정을 파악하고, 이곳까지 프리패스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윤 실장 덕분이었다.
“오히려 제가 사모님께 감사합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가만히 바라보는 태령에게 윤 실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은 저녁부터 사장님 기분이 저기압이셨습니다.”
이노패션 창립행사에서 마주친 어떤 남자 모델 때문이라고는 차마 고자질 못 하겠고.
“그래도 사모님이 이렇게 오신 거 알면 사장님 기분 다 풀리실 겁니다. 아니,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제가 장담해요.”
윤 실장의 말에 태령은 대답 대신 조용히 웃어 보였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미소 짓는 새하얀 얼굴이 이슬 맺힌 새벽의 은방울꽃 같았다. 비 내린 날 수채화 같은 서늘함과 단정함이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해야 하나. 보고 있는 사람마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을 만큼. 이래서 우리 보스가 푹 빠지셨군.
“20분 안에 오실 겁니다. 전 그럼 이만.”
윤 실장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그제야 태령은 남편의 집무실을 가만히 눈으로 훑었다. 손끝으로 소파를 쓸고 집무실 책상 위를 쓸고.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바라보며 느긋하게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행거에 걸린 남편의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일할 땐 재킷을 벗는구나.”
가만히 재킷을 어루만지는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 실장인가 싶어 돌아섰는데 남편이 서 있었다. 두어 개 풀린 단추, 느슨히 끌어내린 넥타이, 몇 번 걷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팔뚝. 이마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과 그 아래 자리한 서늘한 눈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려 태령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긴장한 적도, 남자를 이렇게 의식한 적도 없다. 하지만 항상 서강준과 있으면 이렇게 된다. 긴장하고 의식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그런데도 시선은 자꾸만 흐르고. 결혼식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때 내리깐 시야로 정교한 구두 굽이 스윽, 밀려들었다.
“서프라이즈 이벤트예요?”
남편의 나직한 음성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장난기. 그제야 태령은 조심히 눈을 들었다. 살짝 흐트러진 모습마저 섹시한 남편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 남잔 알까.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뜨겁고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자진 납세한 거예요. 오늘은 벌 받기 싫어서.”
“…….”
“남은 일 봐요. 전 저기 앉아서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게요.”
“…….”
“혹시 제가 방해되면 집에 가서…….”
“방해 안 돼요.”
느리게 말을 자른 남편은 책상으로 다가가 비스듬히 기대섰다. 태령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단추를 채울 듯 올라갔던 손가락을 다시 천천히 내린다.
“부인이 좀 해줄래요?”
놀랄 만큼 기민한 남자였다. 태령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걸 감지하고선 반응을 보는 거였다. 작게 심호흡을 내쉰 태령은 천천히 다가가 남편의 다리 사이에 섰다. 집요할 만큼 달라붙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목선의 단추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태령의 가는 허리를 당겨 안았다.
“……!”
얇은 옷감을 사이에 두고 밀착된 단단한 몸이 뿜어내는 열기가 뜨겁다. 태령이 품에 얌전히 안겨 있자 이번엔 남편이 가만히 이마를 맞대어왔다. 그래도 가만히 있자 비스듬히 턱의 각도를 틀었다. 부드럽고 천천히 이어지는 일련의 야릇한 동작들은 느리고 또 느렸다. 언제든지 싫으면 피하라는 것처럼. 남편이 뭘 하려는지 알기에 심장이 떨려왔다.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매주려 했는데 왜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걸까. 아니, 그 밤 이후 항상 이랬던 것 같다. 태령은 외면했고 남편은 참고 기다려줬을 뿐.
“키스, 해도 돼요?”
남편의 나직한 물음에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제 알 것 같았다. 뜨거운 밤을 보낸 후에도 남편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를. 감당 못 하게 차올라버린 이 감정을 그 밤 활활 태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활활 타올랐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가슴 안에 잔재처럼 남아 있었다. 그걸 숨기고 외면하려고 하면 활활 타올랐고. 마음먹고 끄려고 달려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고. 악마가 가슴 안에서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남은 시간은 두 달. 그리고 조 여사가 먼저 남편과 잘 지내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을, 이 욕심을, 조금은 드러내도 되지 않을까. 부부로서, 아내로서, 여자로서.
“난 당신 아내잖아요.”
속삭이듯 말하며 떨리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남편의 뜨거운 눈과 마주쳤다. 이젠 내가 서강준 당신을 더 원해. 그 눈을 마주 보며 태령은 남편의 목에 가는 팔을 천천히 둘렀다. 살며시 발끝을 드는 순간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그게 태령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