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반하지 마세요.2021.08.19.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한 듯 위태로운 듯, 참을 듯 폭발할 듯. 공기를 밀도 있게 채우는 이 긴장감이 뭔지 태령은 안다. 그 밤도 그랬으니까. 그걸 알기에 야릇한 기대감으로 몸이 떨렸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가 온몸을 돌면서 예열을 시켰다. 이대로 멈춰 주었으면. 아니, 아무 생각도 못 하게 그냥 날 좀 안아줬으면. 양면적인 생각이 파도처럼 태령을 덮치는 순간. 나직하면서도 허스키한 속삭임이 태령의 귓가에 속삭여왔다.
“긴장하지 마요, 겁먹지도 말고.”
비스듬히 내리뜬 남편의 검은 눈동자가 들끓고 있었다.
“내가 당신 기다려준다고 했잖아.”
들끓는 눈동자와 달리 낮고 이성적인 음성. 그러곤 남편이 얼굴을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래도 괘씸해서 벌은 줘야겠어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태령은 숨을 멈추었다. 초옥, 뽀얀 목덜미에 남편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멀어졌다가 다시 닿아오며 좀 더 진하게 머금었다가 풀어준다. 뜨겁고 축축한 숨이 여린 살결을 적시자 태령은 눈을 감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의도적으로 날 피하고, 혼자 잠들게 하고.”
입술을 떼지 않고 말을 하니 살결이 간지럽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호흡을 가다듬느라 말이 스타카토처럼 느리게 툭툭 끊긴다.
“시치미를 떼시겠다.”
남편이 피식 웃는 바람에 목덜미로 더운 숨결이 번진다.
“벌 더 받아야겠네.”
그 벌이 뭔지 알기에 태령은 떨리는 숨과 함께 이실직고했다.
“인정할게요!”
스케줄을 확인하고 의도적으로 피한 것도. 품에 안겨 잠이 드는 밤이 두려워서 일부러 늦게 퇴근한 것도.
“……내가 잘못했어요.”
이대로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서. 이 남자의 벌이 너무도 달콤해서, 이성을 놓아버릴 것 같아서. 안아달라고 매달릴 것 같아서.
“부인 때문에 내가 미치기 일보 직전인 거 알아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강준은 태령을 품에 안고 핑그르르 몸을 돌렸다. 무아지경에 빠져 방금 선을 넘을 뻔했다. 제 몸 아래서 아내가 떨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내는 아직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물론 강준도 참고 기다리는 게 힘들다. 지금껏 참아본 적도 없고 뭘 기다려 본 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넘쳐나는 이 마음을 꾹꾹 눌러야만 한다. 운동으로는 절대 해소가 안 되는 몸 안의 뜨거운 기운도 같이. 그런 고통도 몰라주고 아내는 자신을 피하느라 바빴다. 맘껏 안지도 못하는데 맘껏 보지도 못하게 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작은 머리 위에 턱을 괴고선 강준은 투덜거렸다.
“없으면 품이 허전해서 잠이 안 오고.”
아내는 강준에게 달콤한 고문이라는 표현이 옳았다. 너무 힘든데 또 너무 달콤해서 끊을 수가 없는.
“품에 안으면 내 몸이 고달프고.”
강준은 아내를 더 꼭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뭐 그래도 몸 고달픈 게 낫긴 하지만.”
그냥 주세희 네가 조금은 알아줬으면 해. 내가 얼마나 잘 참고 인내하고 배려하고 기다리고 있는지.
“부인 때문에 내가 애국자가 되고 있어요.”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미성년자 때도 안 불러본 애국가를 밤마다 열창하게 하니까.”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김수한무보다 애국가가 더 효과적이더라고.”
자조적인 웃음도 간간이 흘러나왔다.
“웅장하고 거룩해서 그러나.”
태령은 아늑한 품에 안겨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쿵쾅쿵쾅, 강인한 심장 박동 소리에 화음처럼 얹어지는 남편의 나직한 웅얼거림.
“나도 몰랐는데, 내가 좀 잘 참고 잘 기다리더라고.”
어느 순간,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처럼 말도 느려진다.
“그러니까 천천히 와요.”
태령에게 하는 말인지, 잠꼬대인지.
“얼마든지 기다려줄 테니까…… 오기만 해줘요.”
마지막은 고요한 숨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제야 태령은 눈을 감으며 남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은 모르겠지. 나도 이제 당신이 없으면 허전하다는 걸. 안기면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은데도 품에 안겨야 잠이 온다는 걸. 차마 못 할 말들을 응어리 채 집어삼키며 태령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은 조 여사와 만나는 날이었다.
*** 점심시간. 태령을 만난 조 여사는 평소처럼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왔냐고 인사를 건넸고 편히 식사하라고 했다.
“엄만 안 드세요?”
“난 다이어트 중이니 편히 먹으렴.”
제 눈치를 보면서 조심히 식사하는 태령을 바라보는 조 여사의 눈빛이 날카롭다. 한신그룹 모자와의 저녁 식사는 갑자기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래서 그 날은 부탁을 빙자한 강준의 협박이 그저 괘씸하고 분했다. 하지만 집에 와서 내내 곱씹다 보니 뭔가 이상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맘 편히 사생활을 즐기려고 태령을 살찌우라고 한 걸까. 아니면 또 저 아이 방패 노릇을 해준 걸까. 이노 패션 집무실에서 저를 노려보던 강준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건 제 여자를 지키려는 남자의 본능이었다. 조 여사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3개월 남았구나. 시간이 참 빨라. 그렇지?”
제 할머니 때문이라도 태령은 비밀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욕심을 내지 말란 법은 없었다. 천하디천하게 살아온 것에게 한 번 맛본 이 세계는 달콤하고 매혹적일 것이다. 멋진 남편과 재력, 배경, 위치. 세상 어떤 여자가 마다할까. 자신 앞에선 욕심 없는 척 내숭을 떨어놓고선 딸을 찾아가 그 지경을 만들어 놓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누리는 걸 포기하기 싫어서겠지. 감히 자신이 완벽한 대체품이 된다고 착각에라도 빠졌겠지. 천박하고 더러운 제 엄마처럼.
“그래서 말인데 이대로 계속 지내는 건 어떠니? 이노 그룹의 장녀로, 한신가의 며느리로 말이다.”
조 여사는 우아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 가증스러운 것이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니까.
“혹시 계약을 연장하자는 말씀이신가요?”
“진짜 내 딸 유태령이 되란 뜻이야.”
“죄송하지만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그 애가 임신이 힘들지도 모른다고 하더구나. 임신에 성공해도 유산할 가능성이 크고. 이 결혼의 목적을 이루려면 아이는 꼭 낳아야 하는데 말이지. 하지만 넌 건강하잖니. 그 아이보다 내 말도 잘 듣고.”
이제 달콤한 미끼를 흔들 차례였다.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도 널 진짜 딸처럼 대할 생각이다. 평생 사이좋은 모녀로 지내야 하는데 폭언이나 폭력은 있을 수 없지. 안 그러니?”
조 여사는 간절히 바랐다. 저 가증스러운 것이 얼른 미끼를 물고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 주기를.
“진짜 유태령이 되면 그 아이 몫의 재산도 다 네 것이 돼. 물론 네 할머니 건강도 내가 평생 책임지마. 한국의 병원은 내가 다 꿰차고 있는 건 너도 알잖니.”
‘그럴게요.’라는 대답만 나오면 우선 저 탐스러운 머리채부터 쥐어뜯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 대신 넌 내게 하나만 약속하면 돼. 서강준의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조 여사의 눈은 유리알처럼 차갑고 투명했다.
“그럼 난 너에게 평생 너그러운 친정 엄마가 되어줄 거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거야.”
그럴듯한 연기와 혹할 만한 미끼에 넘어가기엔 태령은 조 여사를 너무 잘 알았다. 이용가치가 없으면 제 딸도 버릴 여자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진짜 딸로 삼을 여자도 아니었다. 결론은 조 여사는 지금 태령을 테스트하는 중이다. 서강준에게 흑심을 품었는지 안 품었는지, 달콤한 미끼를 흔들면서. 내가 미끼를 무는 순간, 당신은 포악한 이빨을 드러내고 날 갈기갈기 찢어놓겠지.
“정말 죄송해요, 엄마. 전 할 수 없어요.”
겁먹은 듯 눈을 내리깔며 태령은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서강준 씨가 어떤 남자인지 안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지금도 겨우 버티면서 계약 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걸요.”
“…….”
“그 남잔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어요. 새장 안에 있는 새처럼 보호를 명목으로 절 가두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요. 안전하긴 하겠죠. 하지만 서서히 말라죽을 거예요.”
“아쉽구나. 네가 싫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지금 이 순간조차 조 여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강준이 마음만 먹으면 저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잠자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조신한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는 의미. 취향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꺼리는 건지도 모른다. 결혼 전까지 비혼주의였고 여자는 거들떠도 안 봐서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그런 남자가 결혼하고 나서야 사생활을 즐긴다는 건 뻔했다.
“그럼 다른 제안을 하마.”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 결혼을 망치려고 일부러 정떨어지게 행동한 게 아닐까 하는. 저 아이는 자신이 이 결혼에 목매고 있다는 걸 안다. 보는 것도 끔찍스러운 남편의 사생아를, 그것도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의 딸을 대타로 세울 정도로. 그렇다면 그간의 일들이 설명이 된다. 귀국하자마자 별거를 한 것도, 서강준의 외도도. 모두 저 아이가 의도한 것이 분명했다. 손끝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지만 조 여사는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 딸, 성격이 어떤지 너도 잘 알지? 남은 기간은 그 아이 흉내를 좀 내면서 적당히 잘 지내보렴. 살도 최대한 많이 찌우는 게 좋을 거야. 단, 선은 넘지 말고.”
그렇다면 반대로 요구해주는 수밖에. 어차피 바꿔치기하기 전 적당한 밑밥도 깔아놓아야 했으니까. 절대 다른 사람임을 눈치 못 채도록.
“두 달 후에 제자리로 돌릴 생각이야.”
“한 달을 줄인다는 말씀이시죠?”
불안함이 가득 차 있던 커다란 눈동자에 안도감이 어리자 조 여사는 배알이 뒤틀렸다. 맘 같아선 석 달 꽉 채워서 괴롭혀주고 싶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서강준이 돌아온 이상 시간을 길게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남성 편력이 심한 딸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보험 차원으로 조사도 좀 해놓고.
“서강준이 좋아하는 음식, 취향, 취미, 여자 스타일까지. 작은 것까지 다 알아내서 보고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태령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부부로서 적당히 잘 지내고, 강준 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제가 받은 혜택은 하나인데 요구사항은 두 개네요.”
하마터면 손이 나갈 뻔한 걸 겨우 참은 조 여사는 최대한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공짜로 해달란 말은 아니다. 원하는 걸 말하렴.”
“엄마가 가지고 있는 이노패션 주식 5% 저에게 주신다고 계약서 써주세요. 그럼 말씀하신 요구사항 다 받아들일게요.”
돈 준다고 해도 마다하더니 주식을 달라니. 무슨 꿍꿍인가 싶어 조 여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차라리 돈을 받지 그러니?”
“요즘 금리도 낮지만 제가 돈 관리를 할 줄 몰라요. 지금 추진하는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이노패션 주식은 더 급등할 건데 그게 더 이득일 것 같아서요.”
하여간 일 이야기만 나오면 야무지지.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고개를 끄덕인 조 여사는 정 실장을 들어오라고 했다. *** 오늘은 이노패션 창립 10주년 행사가 있었다. 아슬하게 호텔에 도착한 태령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연회장 입구로 내달리는 하이힐 소리가 빠르게 로비를 울렸다.
“사장님, 이쪽이요!”
입구에 마중 나와 있던 김 비서가 태령에게 생수를 내밀었다. 뛰어왔으니 목부터 축이라는 뜻이었다.
“저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태령은 대답 대신 생긋 웃은 후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언제 뛰었냐는 듯 반듯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음성으로, 당당한 눈빛으로. 막힘 없이 창립 기념사를 읊기 시작한 태령은 몰랐다. 연회장 안에 진우도 있다는 걸. 같이 고생했을 직원들을 위해 가장 보고 싶은 연예인을 투표해서 초대하라고 했다. 남직원들은 당연히 핫한 여자 아이돌 그룹을, 여직원들은 대세 모델 김진우를 뽑았다. 그런데 오늘 하필 조 여사를 만났고 늘 10분 안에 끝나던 만남이 길어졌으니까. 행사 중간에 도착해서 단상에 선 태령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진우는 중얼거렸다.
“진짜 사장님이었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주세희였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바로 연락했을 테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들을 이야기가 꽤 충격적일 것 같아서, 그걸 쿨하게 들어줄 자신이 없어서. 그 밤 세희와 키스를 하던 남자의 존재도. 왜 나의 꼬맹이가 이노패션의 유태령 사장님이 됐는지도. 진우의 지금 심정은 딱 머리가 돌기 일보 직전이었다. 네가 자꾸만 내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활짝 웃으면서 잘된 일이라고 기뻐하고 응원해줄 자신이 없어서. 자신이 이렇게 치졸한 남자인 줄은 처음 알았다.
“왜 이렇게 예쁘고 멋진 거야.”
그런데 어떡하냐. 넌 여전히 나에게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존재인데.
“이러니 내가 안 반하냐고, 유태령 사장님.”
주세희든, 유태령이든. 이름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반하지 마세요.”
그런데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나직하고 살벌한 음성에 진우는 돌아섰다. 182센티라는 키가 무색하게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눈높이가 좀 더 위였다.
남자가 뿜어내는 위압적인 분위기에 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근데 어디서 본 남자인데. 잘생긴 얼굴이, 싸늘한 눈빛이, 오만한 분위기가. 내리찍듯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는 남자의 입술이 느리게 달싹인 순간, 진우는 기억났다.
“예쁘고 멋진 그 여자가 내 아내니까.”
그 남자였다. 백화점 매장에서 보았던 상위 포식자, 그 수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