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말 대신 입술로.2021.08.15.
강남 스타디움 컨벤션 야외홀에서 친한 모델 형의 결혼식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스케줄 때문에 진우는 중간에 나와야 했다. 밴이 막 출발하려는 순간, 창밖을 내다보던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 잠깐만요!”
주차를 마친 차의 운전석에서 우아하게 내리는 여자가 보였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말총머리, 특유의 서늘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 이노패션 비서실의 그 여자다. 아니, 나의 주세희다!
“야 임마! 어딜 가?”
매니저가 불렀지만 이미 차에서 내린 진우는 내달리고 있었다.
“주세희!”
남자와 키스하던 주세희를 본 그 날 이후 내내 궁리했다. 어떻게 이노패션 비서실을 쳐들어갈지. 그런데 쳐들어갈 궁리만 하면 뭐 하냐고, 시간이 안 나는데. 살인적인 스케줄이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거기서 일하는 게 뭐 어떻다고 잠수까지 타는지. 작은 머리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그런데 이렇게 마주치니, 머릿속이 깨끗해지면서 단순하고 심플해진다. 그냥 꼬맹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올랐다. 사람들은 그걸 그리움이라고 표현하던데.
“세희야!”
3년 만에 부른 그 이름이 진우의 심장을 울렸다. 꼬맹이 넌 알까. 이렇게 부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얼마나 벅찬지. 다행스럽게도 여자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름에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여자 앞을 가로막은 진우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망할 주차장은 왜 이렇게 넓어서는! 그런데도 여자가 시야에 가득 차오른 순간, 가슴으로 찐한 감동이 번진다. 실없는 웃음이 절로 번지며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세희, 맞지?”
이렇게 짙은 화장을 한 것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것도 처음 보지만. 진우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눈빛, 표정, 자세, 분위기. 틀림없이 나의 꼬맹이다.
“나 진우 오빠야.”
하지만 3년 만에 보는 세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빤히 진우를 올려다볼 뿐이다. 그 눈빛이 익숙하면서도 지독히도 낯설어서 진우가 머쓱할 만큼.
“사람 착각했어요.”
사람 환장하게 하는 처연할 만큼 긴 속눈썹도. 나긋나긋하고 매끄러운 특유의 이 차분한 목소리도. 분명 나의 주세희가 맞는데.
“김진우 씨는 알지만.”
나는 안다면서, 주세희는 아니란다. 살짝 고개를 까딱한 세희가 무심히 진우를 지나쳤다. 차마 손은 못 대겠고, 진우는 세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혹시 오빠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이렇게 날 모른 척하면 내 마음이 무너진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버는데.
“아니면 서운한 거 있어? 말을 해줘야 알지.”
촉촉이 젖었던 심장이 미라처럼 바싹 마르면서 온갖 생각이 다 든다. 혹시 서울에 와서 먼저 연락 안 해서 삐졌나. 다른 여자 연예인들과 찍은 화보 때문에? 아니면 광고? 하지만 성공하고 나서 연락하고 싶었다고. 너한테 남자로서 당당해지고 싶어서.
“김진우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그때 앙칼진 소리가 들려오고 진우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이노패션 비서팀의 실세인 김 비서였다.
“안녕하세요, 김 비서님!”
진우의 해맑은 미소에도 자신의 팬이라던 김 비서의 성난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묻잖아요. 우리 사장님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누가 사장인데요?”
김 비서의 손끝이 세희에게 향했다. 진우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 피식, 웃어버렸다.
“에이, 장난치지 마세요. 김 비서님. 우리 세희가 사장이라니, 하하!”
“진우 씨가 말하는 세희가 누군지 전 모르겠고, 저분은 제가 모시는 유태령 사장님이시라구요. 그러니 그만 치근덕대고 꺼져요! 광고 위약금 물기 싫으면!”
헤헤거리던 미소가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야에 여전히 차분한 세희가 보였다.
“김 비서.”
그 부름에 빠르게 다가간 김 비서에게 세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김 비서가 다시 다가와 진우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제 번호니까 시간 될 때 연락해요.”
주세희가 아니고 유태령이라고? 비서가 아니고 사장이라고? 넋이 나간 진우에게 김 비서가 작게 속살거렸다.
“그 입 눈치 없이 함부로 놀리면 확 찢어버릴지도 몰라요.”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김 비서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라는 사장님 메시지도 있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망부석이 되어버린 진우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세희는 진우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야, 김진우! 너 얼른 안 올래?”
성난 매니저의 목소리에 진우는 휙 돌아섰다.
“가요, 형!”
다시 밴에 오른 진우는 푹신한 시트에 몸을 파묻고 명함을 바라보았다.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분명 세희는 맞는데 세희가 또 아니었다. 점점 더 생각들이 복잡하게 꼬이자 머리가 아팠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인데.”
온통 의문만 남긴 채 3년 만의 재회가 끝나버렸다. 하지만 진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내 꼬맹이를 찾아냈으니까. 연락하라고 한 건 날 모른 척한 게 아니니까. 그거면 된 거다.
***
“사장님, 엘리베이터는 저쪽인데요?”
“오늘은 저걸 탑시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마다하고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강준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유는 하나. 컨벤션 로비에서 나의 주세희를 발견했으니까. 꽤 먼 거리임에도,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작은 몸이 가려져 있었는데도, 단 한 번에. 이것도 사랑이 불러일으킨 초능력 중 하나였다.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시선을 틀던 아내가 강준을 발견했다.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가 다시 시선을 트는 찰나의 순간까지 아내는 고요했다. 타인처럼 무심히 대하는 아내를 보고 있으니 강준은 입이 근질거렸다. 다가가서 매끄러운 뺨에 입을 맞추고 이 여자가 내 아내라고 말하고 싶어서. 덩달아 심장도 간지러워졌다. 시야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내의 향기가 떠오르고 감촉이 떠올라서. 주세희 넌 알까. 아는 척을 못 해도, 내 아내라고 못 해도. 그런 널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스케줄을 변경하고 맞추는걸. 가까운 곳에, 같은 공간에 있다면, 우연이라도 마주칠까 봐. 회의장과 식사 장소를 변경하고, 스케줄 시간을 뒤바꾸고. 덕분에 고생하는 건 비서실이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강준도 같이 올라탔다. 그런데도 아내의 옆자리를 여유롭게 선점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우월함에 걸음하는 곳은 늘 비어 있었고 누구든 비켜주었다. 지금까지 늘 그렇게 살아왔다. 어려워하지 않고 뭐든 쉽고 편하게, 원하는 걸 취하고 고민하지 않고 손만 내밀면 되었다. 주세희가 나타나기 전까진.
“사장님, 저희는 3층인데요.”
강준의 무언의 눈빛에 윤 실장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삼 느끼지만 참 지독한 여자다. 한번 바라봐줄 법도 한데 시선 한번 주지 않으니. 가만히 내리깐 부채처럼 퍼진 긴 속눈썹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속눈썹 아래 잠긴 눈동자도 보고 싶은데. 강준은 문득 오늘 아내에게 사랑 고백을 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그럼 해야지. 꽉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내의 손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작은 손을 잡고 손바닥 안에 손끝으로 조심히, 또박또박 적어 본다. 사, 랑, 해. 알아들었을까. 모를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할까. 마지막 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내리고 공간에 빈틈이 생기자 벗어나려는 손의 악력이 강해졌다. 아쉽지만 강준은 손을 놓아주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아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역시 냉정해, 주세희. 빛이 나던 시야가 무채색으로 변하고, 얼굴에서 쓴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서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돌아서는 아내가 보였다. 좁은 틈을 관통해서 마주친 두 쌍의 눈.
“…….”
“…….”
혼란함이 번진 아내의 눈을 보자 자신이 왜 유치한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외면하지 못하는 눈동자, 그리고 눈빛. 그래, 이 눈이 보고 싶었지. 다시 색을 품은 시야가 아름다워진다. 쓴웃음은 증발했고 강준의 얼굴에서 다시 여유로움이 피어올랐다. ***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태령은 진경과 통화를 했다.
“이번 신상들, 네가 다 직접 착용해 본 거지?”
[당연한 걸 물어. 끝내주게 편안하고 날씬해 보여. 완전 신기하다니까? 신축성은 끝내주는데 건조기에 돌려도 하나도 안 줄어.]
“그럼 비용 절감 조금만 더 하고 진행하는 걸로.”
[야아! 거기서 더 어떻게 절감해?]
“생산량의 90%를 우리랑 계약하자고 해. 다른 업체에서 마다하는 컬러까지 전부 다.”
[미쳤어? 업체들이 재고 때문에 폭망하는 거 몰라?]
“원단 좋고 가격 좋은데 안 팔릴 이유가 있을까?”
[……헐. 쩌는 그 자신감 뭐니.]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진경이 상상되어 태령은 싱긋 웃었다.
“언론사 연락해서 기사 먼저 내. 도라가 애슬레저 부문에서 올해의 브랜드 대상 수상한 거 기사로 내달라고 하고 마케팅에 활용해. 이번 신제품에선 마진 남길 생각하지 말고 전부 다 광고 홍보로 돌리고.”
[생긴 건 완전 얌전해선 추진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아 맞다, 너 울 오빠 만났어?]
“어.”
[헐. 그 댕댕이가 눈치 없이 달려들진 않았어?]
물론 달려들었다. 해맑게 웃으며, 주세희라고 부르며. 그 자리에 김 비서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쓰지 마.”
[하긴, 그 댕댕이를 너 아니면 누가 컨트롤 해. 여튼 몸조심해, 쭈.]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린 태령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늘은 몸이 아닌 정신이 고단한 하루였다. 진우와의 만남은 예상하고 있어서 차분히 대처했다. 어차피 한번 만나서 입단속 시켜놓을 생각이었으니까. 태령을 고단하게 만든 건 남편이었다. 엘리베이터, 몰래 잡은 손, 그리고 손바닥에 끄적거린 남편의 메시지. 차라리 몰랐으면 했다. 하지만 남편이 시원하게 쓴 큼지막한 글씨 하나하나가 음성지원이 되어 귓가에 들려왔다. 사, 랑, 해. 달콤하고 다정하게 속삭여오듯이. 그 한마디가 태령을 하루종일 신경 쓰게 만들었다. 2층에서 샤워를 한 후 침실에 들어오자 반듯한 자세로 잠이 든 남편이 보였다.
“진짜 잠버릇 얌전하네.”
태령은 침대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잠이 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얼굴은 보고 또 보고, 평생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홀리듯이 바라보느라 태령은 미처 몰랐다. 자신의 손끝이 가만가만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걸. 물론 남편도 조금은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 밤 날 그렇게 안았겠지. 하지만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 밤 이후 남편은 비슷한 분위기로 몰아간 적이 많았다. 다정해지고 따스해지고 살가워지고. 사랑하냐고 하면 믿어줄 거냐고 묻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편이 변한 건 수정된 계획에서 파생된 연기라고 치부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사랑해라고 적었을까.
“서강준 씨, 부탁이에요.”
감히 사랑을 바라진 않았다. 그냥 조금 흔들려주었으면 했고, 내가 유태령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나도 홀가분히 떠나니까. 당신이 아파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날 사랑하지 마요.”
그래야 나도 살아갈 수 있고 당신도 살아갈 수 있어.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 남자가 있어서 버텼던 것 같다. 이 남자가 있어서 복수도 여기까지 온 것 같고. 이 남자가, 이 남자 때문에, 이 남자라서. 남편에게 도움은 많이 받았는데 정작 고맙다는 말은 해준 적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참 쉬운데 왜 고맙다는 말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지금 이 순간조차도.
“이마에 하는 입맞춤이 변치 않는 사랑이더라구요.”
근데 난 그 말 안 믿을래요. 오늘 그 고백도. 태령은 잠이 든 남편의 눈꺼풀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자잘하게, 수도 없이. 당신이어서 다행이에요. 그래서 고마워요, 서강준 씨. 그때 손목이 잡히면서 당겨졌다.
“……!”
몸이 회전하면서 침대에 파묻히고 남편의 단단한 몸 아래 깔렸다. 눈꺼풀 아래 잠긴 검은 눈동자가 어둠을 밀어내며 태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잠든 남잘 깨우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낮게 깔린 음성이 허스키하면서도 나른하다.
“말해봐요, 나한테 왜 입 맞췄는지.”
바보같이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잠버릇이 얌전한 것도, 잠귀가 예민한 것도, 자신이 아닌 남편이라는 걸. 떨리는 호흡을 고르며 가까스로 태령은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해 준 것뿐이에요.”
“말 대신 입술로?”
남편의 얼굴이 내려오고 아슬한 간극으로 속삭여오는 야릇한 입술.
“그럼 나도 부인한테 다시 대답해줘야겠네요.”
지그시 눈을 맞추고, 가만히 시선을 휘어잡고, 느리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색정적이다.
“……입술로.”
입술과 입술 사이에 고인 지독히도 허스키한 음성이 섹시했다. 남편의 다음 행위를 예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