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2021.08.12.
손등에 와 닿는 입술이 뜨겁다. 화들짝 놀란 태령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더 꾹 눌러오는 홧홧한 감촉에 신음을 참느라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제야 손등을 떠나는 뜨거운 입술, 자유로워진 손.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려와요.”
문 너머의 다정한 음성과 서서히 멀어지는 남편의 발걸음 소리. 태령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살짝 열렸던 문 사이로 마주쳤던 남편의 눈을 기억한다. 검은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차올랐던 열기를, 무심히 드러낸 욕망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야릇한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남편의 부름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떨림이 전해질까 봐, 야릇한 긴장감을 들킬까 봐. 문을 열면 어쩌지, 같이 자자고 하면 어쩌지. 거절해야 할까, 받아들여야 할까. 엉큼해진 자신에게 기가 막히면서도 우선 옷부터 갖춰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손목이 붙잡혔고 손등 키스를 받았다. 그렇게 사람 제대로 흔들어 놓고선, 남편은 미련 없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정신 차려 유태령.”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놓고선, 고작 손등 키스가 뭐라고. 가만히 내리뜬 시선 끝에 남편이 쥐여준 옷가지가 보였다. 아, 하느님, 부처님.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요. 태령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신을 찾았다. 옷으로 감싸 건네준 걸 보면 속옷도 봤을 텐데, 하필 속옷도 실크 소재의 강렬한 레드와인 컬러였다.
“확실히 나한테 해로워.”
사랑도, 서강준이란 남자도. 겨우 옷을 갖춰 입고 나온 태령은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정 실장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 목표 몸무게는 50킬로 이상, 주말 만남은 예정대로 나오랍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알리샤는 안쓰러울 만큼 말라 있어서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을 찌우라고? 게다가 50킬로라면 예전 몸무게였다. 도대체 조 여사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건지 의심하는 순간 남편이 떠올랐다. 예전 몸무게를 묻고 자신의 몸무게로 계산할 게 있다고 했던. 남편은 조 여사를 움직일 만한 힘이 있는 남자였다.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며 태령은 1층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거실이 아닌 다이닝 룸에서 음식을 세팅하고 있었다. 가만히 식탁 위를 훑는 태령에게 남편이 다가왔다.
“곤드레밥, 오디양갱, 표고탕수육, 솔잎 수육, 호박꽃 쌈밥, 장아찌. 부인 취향, 맞아요?”
눈을 들자 주인에게 칭찬을 바라는 대형견처럼 남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태령은 먼저 확인할 게 있었다.
“혹시 엄마랑 통화했어요?”
“안 했어요.”
의심스럽다는 듯 태령이 눈을 가늘게 뜨자 남편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만나서 식사는 했지만.”
그 한마디에 태령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남편을 믿고 남편이 한 약속을 믿는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무슨 말…… 했어요?”
“내가 약속을 안 지켰을까 봐 걱정돼요?”
허리를 숙인 남편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왔다.
“나를 못 믿어서?”
귓가에 속살거리는 음성이 나직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태령은 차분히 대답했다.
“믿어요.”
다른 건 몰라도 남편에게 그것만큼은 말해주고 싶었다. 다정히 구는 의도는 불순할지라도 당신이란 남자는 믿는다고.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천천히 허리를 세운 남편이 다시 물어왔다.
“정말 날 믿어요?”
눈을 피하지 않고 강준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눈빛이 올곧다.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처럼.
“날 얼마나 믿는지 물어봐도 돼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믿음만큼은 절대적이에요.”
절대적이라는 단어에 강준은 아내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날 믿냐고. 간절히 애원하고도 싶었다. 그냥 나 좀 믿어주면 안 되냐고. 하지만 성급하게 굴었다가 아내의 그 믿음마저 깨져버릴까 봐 조심스러워진다. 사랑하고 싶어 하는 자신과 달리 아내는 아직 도망가고 싶어 하니까. 자신을 향한 마음보다 조 여사에게 잡힌 약점이 크니까. 약점이 아니면 계약 조건일지도, 그게 뭐든.
“약속은 당연히 지켰어요.”
“…….”
“어머니와 장모님 앞에서 못된 남편 연기 제대로 했단 뜻입니다. 그 대가로 어머니한테 등을 헌납하긴 했지만.”
물론 등을 헌납한 건 다른 이유였지만 그것까진 아내에게 말해주기 싫었다. 조금은 동정심을 유발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내가 걱정해줬으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서.
“못된 남편 연기, 어떻게 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아내는 강준이 맞았다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확 차려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냉정할 땐 얼마나 냉정한 여자인지. 저 냉정함 속에 사람 미치게 하는 달콤함을 품은 것도 자신만 알지만. 작게 한숨을 내쉰 강준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아내에게 얌전히 고했다.
“부인이 내가 온 후 살이 많이 빠져서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날 잡아먹으려 한다고, 그러니 장모님이 책임지고 딸 살 좀 찌우라는.”
“…….”
“욕 안 먹고 맘 편히 놀아야 후에 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겠냐. 부탁을 좀 했어요.”
태령은 남편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본인은 부탁이었다고 하지만 듣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아하고 정중한 협박이었겠지. 결론은 남편은 약속을 지켰다는 것. 문제는 그 협박을 조 여사가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는 것. 태령이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자, 남편이 조금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고마워하진 말아요. 부인이 표정 풀고 맛있게 먹어주면 그걸로 난 만족하니까.”
셀프로 고마움을 받아내는 남편의 귀여운 뻔뻔함에 태령은 그만 웃어버렸다. 남편 덕에 가혹한 다이어트에서 벗어난 건 사실이니까. 식탁에 앉아 자신의 취향이 분명한 음식들을 보면서 자그맣게 말했다.
“잘 먹을게요, 강준 씨.”
“몸무게는 이제 신경 쓰지 마요. 앞으로 맛있는 음식 많이 사줄 생각이니까.”
별것 아닌 그 말이 태령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그만 다정하게 굴었으면.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 않았으면.
“50킬로 넘으면 다시 다이어트 할 거예요. 이건 엄마가 아니라 내 철칙이니까.”
“퇴근 후에 나랑 땀 흘리는 운동 날마다 해요. 그럼 살찔 일 절대 없으니까.”
태령이 눈을 들자 남편의 야릇한 눈과 마주쳤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의미심장한 눈빛에 문득 연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뛰어난 유전자, 그리고 유전자 못지않게 뛰어난……. 설마, 침대에서 하는 운동은 아니겠지. 온통 새빨간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태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엉큼해진 건지, 이 남자가 그렇게 만드는 건지.
“부인?”
남편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태령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근데 당신, 왜 내 이름 안 불러요?”
지금껏 다른 데 정신이 팔려 간과하고 있던 사실. 오늘 남편은 이름 대신 부인이란 호칭을 내내 쓰고 있다는 걸.
“그냥.”
돌아오는 대답은 싱겁고 가벼웠지만.
“지금은 이름보다 부인이란 호칭이 더 좋아서라고 합시다.”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무겁고 진중했다. 마치 그 이름은 진짜 당신 이름이 아니니까,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그 눈빛이 버거워서 태령은 시선을 피해버렸다. *** 다음 날 아침. 가볍게 아침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늘 변함없는 아내이건만, 강준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단정한 얼굴, 반듯한 자태, 봉긋 솟은 이마와 내리깐 긴 속눈썹, 길고 우아한 목선까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만 바라보는 아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건. 그냥 좋아죽겠고, 좋아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건.
“내가 인내심이 좀 많아요. 진득하게 기다릴 줄도 알고.”
불쑥 던진 말에 아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강준은 피식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냥, 참고 좀 해줬으면 해서.”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작은 손에 손깍지를 꼈다. 맘대로 키스도 못 하고 안지도 못하는데, 손만큼은 원 없이 잡고 싶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준은 아내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제 차가 아닌 아내의 차로.
“강준 씨 차는 저기 있는데요?”
아내가 조용한 말투로 물어왔다.
“부인 가는 거 배웅해주고 갈 거예요.”
“갑자기요?”
물론 강준도 알고 있다. 지금까진 자신이 먼저 차에 타서 가버린 날이 많았다는 걸. 하지만 오늘부터는 안 그럴 생각이다.
“갑자기, 앞으로 쭉 그럴 예정입니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무슨 말을 할 듯 벙긋거리다가 다물렸다. 그걸 바라보며 강준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싫으면 충분히 피할 여지를 주려는 것처럼. 아내는 피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입술에 강준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음 같아선 입맞춤이 아닌 키스를 퍼부으며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저 입술을, 숨결을, 달콤함을. 하지만 진득한 욕망을 뒤로한 채 미련 가득한 입술을 뗐다. 아내의 마음 먼저 열고, 저 달콤함은 나중에. 밤마다 잠을 설치며 거룩한 노래를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하루를 도 닦는 기분으로 수련하는 한이 있더라도. 날 믿고 와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기다려줘야겠지.
“오늘도 수고해요.”
귓가에 다정히 속삭여주자 아내의 말간 눈동자에서 혼란이 번진다. 물론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이건 아내가 적응해야 할 것 중 하나였다. 가만히 뻗은 손끝이 아내의 매끄러운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부드럽고 따스하고 여린 이 감촉을 내 손안에 간직할 수만 있다면. 틈만 나면 끄집어내서 느낄 수 있다면. 그럼 오늘 하루도 행복할 텐데. 전혀 자신답지 않은 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강준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퇴근하고 봅시다.”
이제 보내줘야 할 때였다. 친히 차문을 열어주고 닫아주고. 아내를 태운 차가 주차장에서 빠져나간 후에야 강준은 돌아섰다.
‘믿어요.’
어젯밤 아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던 그 한마디가 강준에게 힘이 되었다. 희망이 보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사랑은 기다림이고 인내고 이해고 너그러움이니까. 그걸 깨닫게 해준 게 아내였다. 정작 본인은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괘씸하지만. 뭐 그건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돌려주면 되니까. 참고 괴로워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준 만큼. 강준은 아내를 잘 먹이고 푹 재우고 편하게 해주어 살찌울 계획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두 번째 밤. 주세희 씨, 그날 두고 봅시다. 며칠 동안 침실에 박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각만으로도 근육 밑에서 감당 못 할 폭발적인 에너지가 활활 타오른다. 오늘도 인내의 한숨을 내쉬며 차에 오른 강준은 중얼거렸다.
“벌써 보고 싶네.”
주세희와 헤어진 지 고작 1분이 지난 후였다. ***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태령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제부터 다정한 남편이 한 번 더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 최상위 포식자 같은 남자가 주인밖에 모르는 순딩순딩한 대형견처럼 굴다니.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유혹을 할 듯 말 듯, 키스를 할 듯 말 듯, 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첫날밤 이후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태령에게 쭉 그러고 있었다. 본인이야 배려하는 거라지만 그 배려에 죽어나는 건 태령이었다. 마음이 없으면 무시라도 할 텐데. 넘쳐나는 이 마음이 문제였다. 남편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의식이 된다. 그 밤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려다보던 뜨거운 눈동자가, 요동치던 근육이, 날렵한 얼굴선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감각과 뇌가 뜨겁게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할머니, 할머니 손녀가 이렇게 철이 없어요.”
태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잘해왔었는데. 29년 동안 머릿속엔 오로지 할머니와 돈, 복수밖에 없었다. 첫사랑도 없고, 일탈도 안 해봤고, 연애 한번 안 해봤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고. 그런데 서강준이 그 독한 결심을 흔들어버렸다. 3년 넘게 보지 못한 할머니 대신, 남자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겐 행복이겠지만, 태령에겐 불행이었다. 자꾸만 브레이크를 거니까. 철없는 주세희로 만드니까. 급한 안건부터 처리한 태령은 직접 차를 몰고 강남 컨벤션 홀로 향했다. 운전기사는 갑자기 집안 사정이 생겼다고 했고 김 비서는 무면허고. 어차피 운전은 익숙하니 직접 한다고 무슨 일 나는 것도 아니니까. 태령이 한 번에 주차에 성공하자 김 비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오오, 한 손 주차. 사장님, 짱 멋지세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으며 차에서 내린 태령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음성이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고.
“세희야!”
좀 더 가까이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번 더 들려오고.
“주세희!”
김진우가 눈앞에 서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찰랑거리면서, 살짝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반가움을 잔뜩 머금은 눈웃음으로 바라보며,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으면서.
“주세희,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