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환장하게 예쁘고 미치도록 귀여워서.2021.08.08.
다음 날 아침. 샤워 후 화장을 하다가 태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키스할 걸 그랬나 봐.”
몸무게가 1.5킬로 늘어 있었다. 한 달 가까이 힘들게 뺀 살인데, 찌는 건 참 빠르고 쉽다. 이게 모두 남편 탓이었다. 어제 갑자기 쳐들어온 남편이 연기해준 대가로 저녁을 먹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너무 예쁘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사주었으니까.
“다음 주가 몸무게 체크하는 날인데.”
……어쩐다.
“일주일이면 충분히 뺄 수 있어.”
1층으로 내려간 태령은 걸음을 멈추었다. 출근한 줄 알았던 남편이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
“아직 출근 안 했어요?”
“태령 씨 얼굴 보고 가려고 기다렸어요.”
그런 남편이 태령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두려웠다. 하루하루 흐를 때마다 조금씩 변해가는 남편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는 것 같아서. 소파에서 일어난 남편이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어제 그 레스토랑이 브런치도 유명해서 부탁 좀 했어요.”
“이 시간에요?”
아침 6시 30분에? 태령이 살며시 눈을 찌푸리자 그가 피식 웃는다.
“그만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했어요. 그러니 돈지랄하는 몹쓸 놈처럼 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기가 막히게 속마음을 들여다본 남편 때문에 태령도 결국 웃어버렸다.
“아침 같이 먹어요.”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너른 등을 바라보며 태령은 조심히 말했다.
“미안한데 아침은 강준 씨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냐는 듯 남편이 다시 돌아섰다.
“어제 너무 과식했는지 속이 불편해요. 살도 좀 쪘구요.”
말을 하는 내내 태령은 남편에게 미안했다. 의도가 뭐든 신경 써준 호의를 무시한 거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남편이 태령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눈으로 훑는다.
“살이 어디에 쪘어요?”
천천히 뻗은 양손이 태령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왔다.
“옷이 헐렁할 만큼 허리가 이렇게 가는데. 불안해서 맘껏 안지도 못하게.”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남편이 지그시 눈을 맞춰왔다. 속내를 긁어내려는 그 눈빛을 태령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많이 말랐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조 여사의 딸과 몸무게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태령의 시야로 쇼핑백이 밀려들었다.
“어제 빚진 것도 있으니 김 비서 가져다줘요.”
“혹시 기분 상했어요?”
아내의 조심스러운 눈빛 그리고 말투. 강준은 그게 싫었다. 맘 편히 자신을 대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싫으면 싫다고 하고 거절할 게 있으면 거절하고.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내가 말랑말랑해질 때면 강준은 욕심이 생겼다.
“기분 상했다고 하면, 달래줄 생각은 있어요?”
아내에게 조금 투정을 부려도 될 것 같아서. 그게 뭐든, 받아줄 것 같아서.
“제가 어떻게 해줄까요?”
새하얀 이에 질끈 물린 아랫입술이 강준의 시선을 홀린다. 저 입술의 향과 감촉을 알기에.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요.”
키스하고 싶어지니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내려 강준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나 배웅 좀 해줄래요?”
그렇게 도착한 현관문 앞. 다시 돌아서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아내가 보였다. 강준이 거리를 좁히자 움찔한 아내가 살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두고 볼 만큼 강준은 착한 남자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는 가는 허리를 휘감고, 왼손으로는 아내의 뒤통수를 감쌌다.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후,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맘 같아선 입술에 하고 싶지만 멈출 자신이 없었다. 아내에게 미움받기도 싫고. 초옥-. 아쉬운 대로 동그란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녀올게요.”
화들짝 놀란 아내는 이마에 손을 대며 강준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 눈빛조차 예뻐 보이는 걸 당신은 알까. 강준은 아내에게 날마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사랑한다고 하면 싫어하고 도망치려 할 게 뻔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고백하는 수밖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참은 강준은 아내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이마에 하는 입맞춤의 의미, 검색해봐요.”
당신에게 변치 않은 사랑을 맹세합니다. 그게 이마에 하는 입맞춤의 의미였다.
“오늘도 수고하고, 저녁에 봅시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오른 강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장모님.”
아내를 살찌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
“장모님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강준은 조 여사에게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어머나, 뭐 이런 것까지. 고마워, 강준 군.”
고급스러운 케이스 안을 확인한 조 여사가 환히 미소를 지었다.
“이 디자인 한국에 10개밖에 안 들어왔다던데 어떻게 구했나 몰라. 혹시 나만 선물 준 건 아니지? 이러면 내 입장이 곤란해서.”
제게로 향한 시선에 연숙은 싱긋 웃어 보였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사돈. 이렇게 같이 아들이랑 식사한 게 나한테는 큰 선물이랍니다.”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아들이 먼저 식사를 청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아들의 전화를 받자마자 기쁘다기보다는 불안했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안 하던 짓을 하나 싶어서. 아들에게 사정설명을 듣고 나니 연숙은 조 여사가 이해가 안 되었다. 세상 어떤 엄마가 제 딸이 그렇게 삐쩍 마른 걸 좋아하나 싶어서. 물론 아들도 이해가 안 되었다. 딸 부부가 사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조 여사도 좋아할 텐데, 그걸 숨기겠다니.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아들은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며 입을 꾹 다물었다. 궁금해서 죽을 것 같지만, 우선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사실 연숙도 볼 때마다 살이 내려앉은 태령이 안쓰러웠으니까.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조 여사가 강준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태령이도 이 자리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태령 씨가 많이 바쁩니다. 같이 사는 저도 얼굴 보기 힘들 만큼.”
묘하게 서늘한 강준의 대답에 조 여사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내가 딸 대신 사과할게. 전에도 사정설명은 했지만 3, 4개월 후에 일 관두고 자네 내조 확실히 할 걸 세. 내가 아주 제대로 교육시켜 놓을 테니 나 믿고 강준 군이 조금만 기다려 줘. 응?”
“그래, 강준아. 사돈이 내조 잘하는 걸로 유명하단다. 그건 엄마가 보장해. 그 핏줄이 어디 가겠니?”
내조라면 내조였다. 무능력한 이노그룹의 장남이 부회장직을 맡은 건 모두 아내 때문이라고 했으니. 물론 그걸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연숙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아들이 부탁했다. 이 식사 자리에선 조 여사와 무조건 한 편이 되어달라고.
“사실은 장모님께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서 식사를 청했습니다.”
대답 없는 조 여사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강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돌아온 후 아내가 너무 살이 빠졌습니다. 이 결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특히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
“지금 아내 몸무게가 45킬로라고 합니다. 50킬로 이상 살찌우라고 해주세요.”
아내의 비밀은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정확했다. 지금 아내는 조 여사의 말에 죽는시늉이라도 한다는 것.
“아내는 장모님 말에 죽는시늉이라도 할 만큼 효녀이니 잘 따를 겁니다.”
“우선 말은 해보겠지만 태령이 다이어트 의지가 강력해서…….”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주셔야지요. 그러라고 드린 뇌물이고 부탁인데.”
느긋하게 말을 자르는 강준의 표정은 오만하다 못해 싸늘했다. 미묘하게 살벌해진 분위기. 고래 싸움에 낀 새우처럼 연숙은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저한테 1년은 마음껏 즐기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내가 그렇게 미라처럼 말라 있으면 제가 맘 편히 즐길 수 있을까요?”
조 여사는 갑자기 강준이 조용히 지냈다는 걸 안다. 그게 그 독한 것에게 빠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서 회장과 연숙이 강준을 들들 볶아서 잠시 자제하고 있는 거였다.
“장모님이 약속을 지켜주셔야 저도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명 강준의 뜻은 이러했다. 1년 후 정신 차릴 테니, 대신 남은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합리적인 부탁이긴 했다. 하지만 조 여사는 지금 협박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식사 자리에 왜 태령이 빠지고 연숙과 자신만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한신의 태양이라더니. 일머리만 좋은 줄 알았더니 잔머리도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사돈, 강준 군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우리 딸이 다이어트에 강박관념이 있어서 그렇지, 절대 강준 군 때문에 살 빠진 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1년 후에 정신 차리겠다는데, 우리 같이 기다려 줘요, 네?”
“아니, 나는 뭐.”
연숙이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싫겠지, 그때도 질색했는데. 하지만 조 여사도 연숙에게 못을 박아주란 강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진짜 제 딸이 돌아왔을 때 강준이 정신 차려준다면 오히려 득이니까.
“사돈이 그렇다면 뭐 그래야죠.”
마지못해 연숙이 대답하자 그제야 조 여사는 우아하게 웃으며 강준을 보았다. 이제 되었냐고.
“아내 목표 체중도 장모님이 잘 해결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건조한 눈동자, 싸늘한 표정, 확고한 말투.
“50킬로 이상, 오늘부터입니다.”
강준은 부탁이 아닌 명령을 하고 있었다. 조 여사는 저 잘난 얼굴에 차를 끼얹어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마른 여자는 취향이 아니라서요.”
이젠 그 독한 것의 몸무게에 맞춰 자신의 딸이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란 듯이 뒤집힌 상황에 속이 부글거린다. 하지만 조 여사는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새끼를 낳았니? 어디 물 게 없어서 아내를 물어뜯어 놔! 한 번만 더 그리 험하게 다루면 당장 태령이 우리 집에 데려올 테니 그리 알아!’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기 전 연숙에게 수십 대는 맞은 것 같다. 체구도 작고 손도 작으신 분이 손맛은 얼마나 매서운지. 집에 도착하니 밤 9시였다. 강준의 양손엔 유명 한정식 가게의 로고가 적힌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조 여사가 약속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확인도 할 겸. 아내에게 맛있는 음식도 먹일 겸. 불이 훤히 켜진 1층 어디에도 아내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강준의 발걸음이 2층 계단으로 향했다. 복도 끝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냥 내려오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자석처럼 강준의 발길을 당긴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걸 알면서도, 애만 탈 게 뻔한 걸 알면서도. 문 앞에 선 강준은 물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지 않아도 시야를 채우는 몹쓸 상상에 몸을 틀려는 찰나였다. 욕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수줍게 벌어지는 문 사이로 언뜻 보인 뽀얀 실루엣에 강준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
“…….”
타악, 욕실 문이 세차게 다시 닫혔다. 강준의 시선이 천천히 하강했다. 욕실 문 앞에 제멋대로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미묘해졌다. 아내는 잠버릇 빼곤 늘 차분하고 단정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겁도 없이 속옷을 밖에 두셨을까. 이거 방심해도 너무 방심하지 않았나.
“태령 씨.”
강준은 문 옆의 벽에 몸을 기대고선 똑똑 노크를 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도 답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강준도 아니었다. 집요한 노크에 차분한 음성이 조심스럽게 문을 넘어왔다.
“옷을 밖에 둬서 그런데 1층으로 내려가 줄래요?”
이렇게 불쑥 빈틈을 내보이니 내가 짓궂어질 수밖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으며 강준은 태연하게 말을 했다.
“부부끼리 내외하면 서운해요. 같이 뜨거운 밤도 보냈는데.”
스스로도 처음 알았다. 자신에게 이런 짓궂은 면이 있을 줄은.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이상하게 즐거웠다. 이런 별 의미 없는 대화가, 그리고 이 상황이.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확 열린 게 아니라 아주 살짝. 좁은 문틈 사이로 뽀얀 살결을 품은 가느다란 팔이 불쑥 튀어나와 바닥을 더듬는다. 하지만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니 작은 손이 목표물을 제대로 찾을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준은 그만 웃어버렸다. 이건 너무 반칙 아닌가. 환장하게 예쁜 줄만 알았더니 미치게 귀엽기까지 하다니. 알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손만 쭉 내밀고 있을 모습이 상상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더 짓궂게 굴고 싶지만, 이쯤 관두기로 했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강준은 앙증맞은 속옷을 옷가지 안에 잘 싸서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옷 찾는 거 맞죠?”
“……고마워요.”
말과 달리 목소리는 화를 참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얌체처럼 쏙 사라지려는 작은 손을 강준은 잡아서 끌어당겼다. 실핏줄이 희미하게 비치는 하얀 손등 위에 뜨거워진 입술을 꾹 눌렀다.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떨어뜨린 옷을 작은 손에 다시 쥐여주며 강준은 속삭이듯 말했다.
“별말씀을.”
내가 짓궂게 구는 것도, 이렇게 엉큼해진 것도. 다 너 때문이다. 주세희 네가 환장하게 예쁘고 미치도록 귀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