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줄래요?2021.07.29.
뭉개진 입술 안으로 남편이 부드럽게 침범해왔다. 샅샅이 핥으며 촘촘히 빨아들이는 감각에 태령은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타들어 가는 초처럼, 온몸의 감각들이 몽글거리며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긴 속눈썹 사이로 촉촉한 물기가 차올랐다. 이대로 녹아서 사라져도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서 이 남자의 가슴에 내가 스며들었으면. 차라리 형체 없이 이 남자의 안에 영원히 머물렀으면.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속에서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들린 발끝 밑의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아득해서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가슴 안에서 넘실거리는 수줍으면서도 대담한 욕망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래서 태령은 남편에게 매달리며 파고들었다. 슈트 밑에 숨겨진 단단한 근육을 더듬던 가는 손가락이 남편의 결 좋은 흑발을 파고들었다. 그걸 신호로 남편이 더 파고들며 키스가 깊어졌다. 할딱거리는 숨을 내쉬며 살며시 눈을 뜨자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다. 그런데도 비스듬히 내리뜬 남편의 눈만큼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태우고 태령마저도 태우는 들끓는 눈. 나를 욕망하는 그 눈이 좋다. 지금만큼은 이 남자도 연기가 아닌 것 같아서. 유태령이 아닌 주세희를 원하는 눈 같아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당기자 남편이 입술을 뗐다. 거친 숨을 토해낼수록 활활 타오르던 눈동자에서 불길이 서서히 꺼진다. 약한 불씨마저 사라져버리자 길고 단단한 손끝이 다가와 태령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부풀어 오른 입술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매끄러운 뺨을.
“사냥꾼은 갔어요.”
담담히 말을 하는 남편은 방금 전의 모든 걸 연기처럼 날려버린 모습이었다. 들끓는 눈도, 거칠었던 호흡도, 자신을 향해 가감 없이 드러낸 욕망도. 모든 걸 지워버린 남편의 무심한 눈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가슴이 아렸다. 이 남잔 모든 게 참 쉽구나. 날 잊을 때도 쉽겠지. 입술을 깨물며 태령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다음은 질의응답 시간이겠지. 그때 태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업혀요.”
질문을 던지는 대신 남편은 한쪽 무릎을 꿇고 등을 내어주고 있었다.
“주차장까지 맨발로 가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태령이 움직이지 않자 태연할 만큼 뻔뻔하게 남편이 말을 이었다.
“업히는 게 싫으면, 신나서 퇴근한 윤 실장한테 신발 사서 오라고 하고.”
“…….”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서 집으로 향하고 있을 텐데.”
협박도 재주라면 이 남잔 타고났을 거야. 작게 한숨을 내쉰 태령은 최대한 조심히 남편의 등에 업혔다. 그 조심스러움이 민망할 만큼 남편은 너무도 가뿐히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너른 가슴처럼 너른 등도 참 따뜻하고 편안했다. 품도 내어주더니 이젠 등도 내어주네. 쓴웃음이 태령의 얼굴에 번진다. 남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면서 가만히 뺨을 댔다. 누군가에게 업힌 기억이 있나 더듬어보지만 없었다. 이것도 남편이 처음이었다. 왜 자꾸 내 처음을 앗아가는 건지. 그걸 이 남잔 알고는 있는지.
*** 집에 도착해서도 남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샤워하고 나온 태령을 거실에 앉히고선 상처가 난 무릎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다. 남편의 침묵을 못 참고 태령이 먼저 물었다.
“왜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남편이 물어보기 전까지 불안함에 떠느니 먼저 묻는 게 나았다.
“묻고 싶은 게 없으니까.”
남편의 대답이 태령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숨통을 더 조여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가짜인 거 알면서. 오늘 일도 그렇고. 차분히 말한다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약간 격앙된 것 같다.
“강준 씨, 나한테 물어볼 거 많잖아요.”
넌 누구냐고, 정체가 뭐냐고, 목적이 뭐냐고. 그런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데. 상처 밴드까지 붙인 후에야 남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딪혀 오는 눈동자가 견고하고 단단하다. 그 눈으로 태령을 압박해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줄래요?”
남편이 담담히 흘린 사랑이란 단어가 심장을 나락까지 떨어지게 했다. 눈앞이 새하얘진 태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침에 떠올렸던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방향을 전환한 남편의 새로운 복수. 그게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아서. 눈을 감은 채 태령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니요, 안 믿어요.”
다시 천천히 눈을 뜬 후 한 번 더 확고히 말했다.
“절대 안 믿어.”
남편이 아닌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말을 잇는 태령의 음성이 쌀쌀맞았다.
“강준 씨,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대놓고 말해줘요.”
남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절대 내 입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내 삶 대신 당신의 곁에 남는 걸 선택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남편이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럼 둘이 머리를 맞대고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으니까.
“태령 씨한테 원하는 거라.”
날카로워진 태령과 달리 남편은 여전히 여유롭고 태연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손길이 나른했다. 그리고 눈을 부딪쳐왔다.
“나 좀 제대로 봐줘요.”
천천히 올라온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태령의 머리를 가리켰다가.
“잘 돌아가는 이 머리에서 나를 미리 결론 내지 말고.”
다시 흘러내린 손가락이 멈춘 곳은 가슴이었다.
“여기서 느끼는 그대로.”
정확히는, 얄팍한 가슴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심장을.
“머리는 거짓말해도 가슴은 거짓말하지 않거든.”
남편의 눈과 손끝이 잘 벼른 창끝처럼 심장을 푹 찌르는 것 같았다.
“강요라기보단 그냥 내 바람이에요.”
다시 천천히 올라온 손이 태령의 매끄러운 뺨을 감싸 눈을 마주 보게 했다.
“태령 씨가 날 믿어줬으면 하는.”
다정하고 애틋한 남편의 속삭임에 심장이 쿵쿵 뛴다. 그가 원하는 건 진심이었다. 사랑보다도 더 어려운 믿음을. 날 얼마나 이용하고 무너뜨리려고.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촘촘하고 질긴 그물을 태령에게 던지고 가두려 한다. 못다 한 키스를 다시 하려는 듯, 천천히 다가오는 남편의 입술을 태령은 외면했다. 소파 위, 꽉 쥔 주먹이 새하얬다.
“강요는 아니라고 했죠?”
흘러나오는 음성은 놀라울 만큼 낮고 차분했다. 머리와 가슴으로 더 견고히 다진 결심처럼. 당신이 흔든 만큼 난 더 단단해질 거야. 당신이 다가온 만큼 난 더 멀어질 거야. 그렇게 버티다 보면 시간은 흐르겠지. 당신이 쳐놓은 그물을 가위로 자르고 다시 물속으로 돌아갈 날이. 그토록 원하는 자유, 그리고 복수, 내가 원하는 것들을 향해.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게 내 답이에요.”
거절이 분명한데 남편은 여전히 여유롭다. 태령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회사 일에 머리 쓰기 바쁠 텐데, 나한테는 머리 쓰지 말지.”
방금 그 대답, 머리로 한 거잖아. 마치 그렇게 묻는 것도 같았다.
“부부끼리는 머리 말고 여기로 대화해야지.”
이번에 남편은 자신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태령 씨한텐 어려운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요.”
난 이미 너와 가슴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처럼. 응시해오는 새까만 눈동자가 뻔뻔할 만큼 오만하고 당당했다.
“나와 대화할 수 있도록.”
그 눈을 마주한 태령은 덜컥 겁이 났다. 눈앞의 남자가 너무도 견고하고 단단해서. 무슨 짓을 해도 이 미친 짓을 말릴 수 없을 것 같아서.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태령은 도망치듯 일어나서 침실로 향했다. 남편과 더 같이 있다가는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이 남잔 위험해, 정말이지 지독하게 위험해. *** 검은 밴이 백화점 주차장에 도착했다.
“형, 고마워요. 30분 안에 돌아올게요.”
매니저에게 사정해서 잠시 낸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우는 며칠 전 세리 장의 생일 파티에서 보았던 여자를 떠올렸다.
“분명 주세희였는데.”
메이크업과 스타일은 달랐지만 주세희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했으니까. 특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흐트러지지 않는 서늘한 차분함이. 어떻게든 쫓아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여자를 쫓아갔다. 하지만 확인은커녕 낯 뜨거운 장면만 목격하고 기분 더럽게 돌아왔다. 3층 계단에서 내려다보자 여자는 남자와 뜨거운 키스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높이 묶어 올린 말총머리와 옷차림이 분명 그 여자였다. 그 남자가 보고 싶어서 자신이 불러도 그렇게 급하게 내려갔나 싶기도 하고.
“쳐다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키스를 오래 하냐.”
더 지켜보았다간 관음증 있는 놈처럼 보일까 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주세희가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남자와 그렇게 짙게 키스하는 주세희는 상상이 안 되고.
“미치겠네.”
뭔가 찜찜하고 불안하고. 그래서 생각해낸 게 동생이었다. 뇌물 좀 바치고, 찔러봐야지. 이번엔 떠보는 게 아니라 확신한 것처럼 몰아붙일 생각이다. 주세희가 이노패션 비서실에 있는 거 다 안다고, 확인했다고. 그럼 단순한 동생이 뭐라도 하나 불겠지. 고가의 명품매장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손님은 없었다.
“최근에 나온 신상 중 잘 나가는 디자인 좀 보여주세요.”
진우를 알아본 직원의 눈이 동그래지자 또다시 특유의 미소를 실실 흘렸다.
“여동생 생일이 다가와서요. 알죠? 저 닮아서 예쁘게 생긴.”
원래 손님에게 알은 척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진우가 흘리는 특유의 미소는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친근함이 있었다.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직원이 발그레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진우 님, 화면보다 훨씬 잘생기셨어요.”
“실물이 더 낫죠? 얼굴도 더 작아보이고.”
넉살 좋게 받아친 진우는 가방을 구경하며 진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샤닐 매장에서 네 가방 보는 중. 혹시 사려고 했던 모델 있으면 알려주든지.]
그런데 뒤쪽이 살짝 소란스럽다. 이제 막 매장에 들어선 중년의 여자와 키가 큰 남자를 매니저가 달려가 맞이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편히 보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조치라는 게 아마도 자신을 매장 밖으로 나가게 하려는 것 같았다. VVIP가 분명한 저 남자가 매장을 독차지하고 편히 볼 수 있도록. 그 예상이 맞는 듯, 진우 앞의 직원이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망할 재벌들, 어디서든 재수 없는 티를 내요. 진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기분 나쁜데 항의도 못 하겠고. 이럴 땐 공인이라는 게 참 안 좋다니까. 직원이 곤란해하지 않도록 먼저 나가줘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15층에서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모델별로 가지고…….?”
남자가 작은 손짓으로 매니저의 호의를 거절했다. 별것 아닌 그 손짓이 참 우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쇼핑하고 갈 생각이니 볼일 보세요.”
직원을 대하는 말투와 태도가 예의 바르다. 갑질하는 재벌이라기보다는 남자는 정중한 신사였다. 뉘 집 자식이길래 인성도 좋은데 생긴 것도 저리 잘났나. 훤칠한 키에 단단한 체격의 남자는 모델보다도 슈트를 정석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잘난 외모보다 몸에 두른 아우라가 참 고급스러웠다. 타고날 때부터 재벌인 자의 아우라인가, 저게. 계속 보고 있자니 밑도 끝도 없이 같은 남자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존재감이다. 그때 진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진짜 나 주려고 가방 사는 거야?]
하이톤의 목소리가 뿜는 텐션부터가 남다르다. 진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럼 내가 여자 가방 사서 누구 주냐?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그 배우 누구더라. 김영강 사인도 받아다 줄게.”
[흐음, 김진우가 공짜로 줄 린 없고. 우리 댕댕이 오라버니가 원하는 게 뭘까?]
“진경아, 주세희 말이야.”
[끊어.]
그런데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동생이 딱 잘라 말했다. 이제 답답해지는 건 진우다.
“야! 나 세희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거든?”
그 여자가 주세희가 맞다면. 가까이서 보진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마르고 가냘팠다. 훅 불면 민들레 씨처럼 붕 떠서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얘가 도대체 서울에서 뭘 하고 있길래 그런 몰골인지. 뭐 그래도 여전히 예쁘긴 했지만. 전화를 받으면서 매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때,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얘가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니까? 나의 주세희가 삐쩍 말라 있었어.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무심코 고개를 튼 순간,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와 부딪혔다. 그 눈빛이 어찌나 싸늘하고 포악스럽던지. 진우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남자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더 열 받는 건 이유 없이 눈빛만으로 기선 제압당했다는 것. 소름이 돋을 만큼 당당하고 오만한 남자였다. 혹시 내 통화 목소리가 매너 없이 컸나. 아니, 그건 아닌데.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그때 때마침 중년의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제야 느릿하게 먼저 시선을 트는 남자. 매장에서 나온 진우는 기가 막힌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정중한 신사라는 말 취소. 매너나 배려는 여자한테만 베푸는 건가 보다.
“……뭐야, 사람 기분 나쁘게.”
남자는 우아한 슈트를 입은 포악한 짐승이었다. 그것도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 저런 놈에게 찍히면 뼈도 못 추릴 거라는 건 직감이고 본능이다. 그래서 진우는 가방은 다음에 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