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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해줘요, 진짜 키스. (33/110)

33. 해줘요, 진짜 키스.2021.07.25.

태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16564544839857.jpg“언제부터요?”

16564544839862.jpg“같이 잔 첫날부터. 날마다 내 품에 안겨 잤는데.”

16564544839857.jpg“당신이 잠든 날 안아준 거예요?”

남편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것뿐이었다. 그게 아니고선 말이 안 되니까.

16564544839862.jpg“내가 음흉한 놈도 아니고, 태령 씨가 자진해서 안겨 왔어요.”

16564544839857.jpg“…….”

16564544839862.jpg“난 그저 품을 내어주었을 뿐이고.”

담담한 남편의 대답에 태령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16564544839857.jpg“거짓말.”

옅은 어둠에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남편의 입술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16564544839862.jpg“잘 생각해봐요. 나랑 잔 날부터 따뜻하게 잤을 텐데.”

머리로는 부정하면서도 가만히 기억을 더듬게 된다.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잔 후로 추위를 못 느끼긴 했다. 그래서 편히 잤고 푹 잤고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태령은 그 모든 걸 사람의 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까지 데우는 이 남자의 뜨거움 때문이라고. 그런데 안겨 잤던 거였어? 그것도 내가 먼저? 뺨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16564544839857.jpg“생각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살그머니 몸을 뒤로 빼던 태령의 허리가 확 끌어 당겨졌다.

16564544839862.jpg“어딜 내빼.”

남편의 품에 안겨 귀 끝까지 붉어진 태령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둘 다 맨정신일 때 안긴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태령은 차분한 어투로 항의하듯 말했다.

16564544839857.jpg“아침에 눈 떴을 땐 항상 내 자리였어요.”

16564544839862.jpg“아침에 내가 다시 눕혀놨으니까, 이불도 잘 덮어주고.”

16564544839857.jpg“저 그런 잠버릇 없는데…….”

힘없는 중얼거림에 남편이 픽, 웃었다.

16564544839862.jpg“잠버릇을 본인이 어떻게 압니까? 같이 잔 사람이 기억하지.”

16564544839857.jpg“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럼 조심했을 텐데.”

16564544839862.jpg“내가 말해줬으면, 태령 씨가 편히 잤을 것 같아요? 밤새 긴장하느라 잠도 안 잤을 거면서.”

남편의 말이 맞았다. 침대에 누울 때마다 더 긴장하고 경계하느라 아침까지 잠을 못 잤을 것 같다. 다신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16564544839862.jpg“잠도 편히 못 자게 할 만큼 못된 남편은 아니에요.”

태령이 고개를 들자 내려다보는 남편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부드러운 온기가 어린 다정한 눈. 예전과는 다른 온도를 품은 남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언제부터 나에 대해 이렇게 잘 알게 된 걸까. 우리는 분명 남보다 못한 사인데. 그런데도 부부란 이유만으로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말씨름은 이쯤에서 그만하고 태령은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16564544839857.jpg“미안해요.”

16564544839862.jpg“미안해하지 마요. 솔직히 이기적인 내 욕심도 좀 있었으니까.”

태령을 안은 남편의 단단한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16564544839862.jpg“난 크고 뜨겁고 단단한데 태령 씬 작고 서늘하고 부드럽고 향긋하고.”

16564544839857.jpg“…….”

16564544839862.jpg“그 느낌이 좋다고 해야 하나. 태령 씨 안으면 나도 푹 잤어요.”

잠시 말을 멈춘 남편의 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태령의 뒷머리를 지그시 감쌌다.

16564544839862.jpg“이래서 결혼하는 건가 싶을 만큼.”

좀 더 가까워진 얼굴. 지그시 응시해오는 짙은 시선.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 그 밤, 잠들기 전까지 했던 남편과의 키스가 떠올랐다. 뜨겁고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했던. 머릿속이 새빨개지면서 태령의 심장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설마 키스하려는 걸까. 시선을 피한 태령의 긴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슴 안에서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몽글몽글 번져간다.

16564544839862.jpg“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안고 자요, 우리.”

하지만 뜨거운 입술 대신 뜨거운 몸이 닿아왔다.

16564544839862.jpg“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눈치 보지도 말고.”

태령을 꽉 끌어안은 남편의 더운 숨결이 귓가를 데운다.

16564544839862.jpg“우리 둘만 있을 땐, 그냥 우리만 생각하는 걸로.”

정말 우리만 생각해도 되는 걸까.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16564544839862.jpg“단순하고 쉽게.”

당신은 쉽겠지만 나한테는 어려워. 작은 것 하나하나가, 별것 아닌 그 단순함이, 어렵지 않은 그 쉬움이. 그런 것들을 쉽게 허락하고 반복할수록 내가 정말 걷잡을 수 없어질까 봐. 하나씩 늘어나는 추억들이 나중에 모두 독이 될 테니까. 아무렇지 않게 날 잊을 당신처럼, 난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그걸 알면서도 태령은 이 품을 벗어날 수가 없다. 아니, 벗어나기 싫었다.

16564544839857.jpg“……졸려요.”

졸음을 핑계로 품으로 더 파고드는 게 태령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자 참고 있던 피곤함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그런데 잠이 들 만하면,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눈이 떠진다.

16564544839857.jpg“강준 씨?”

몽롱한 시야로 졸음기 하나 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16564544839862.jpg“오늘은 아무 짓 안 해요.”

아무 짓도 안 한다는 손이 참 바빴다. 작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고, 등을 쓸어내리고, 품에 꽉 안았다가 빤히 쳐다보고. 지금은 태령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의심 가득한 태령의 눈빛에 남편이 웃으면서 얼굴을 내렸다.

16564544839862.jpg“내가 짐승이긴 한데, 지킬 건 지키는 짐승이거든.”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를 데운다. 도대체 잠을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항의하듯 눈을 가늘게 뜨자 또다시 남편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16564544839862.jpg“미안, 재워줄게요.”

그리고 정말 강준은 재워주었다. 부드럽게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에. 잔잔한 파도처럼 온몸을 잠식해오는 따스함에. 태령은 다시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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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령이 눈을 떴을 때 남편은 출근하고 없었다. 평소처럼 샤워한 후 화장대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손은 습관처럼 움직이지만 머릿속은 어젯밤의 남편으로 가득했다.

16564544839857.jpg“혹시 날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태령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남편을 재회한 순간부터 피하고 경계하느라 바빴다.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넨 적도 없었다. 예뻐 보이려 한 적도 없고, 매력 어필은 더더욱 한 적 없고. 그런데 남편이 날 왜 좋아해. 고작 하룻밤 보냈다고 감정이 생겼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태령은 첫 키스였고 첫 남자였다. 하지만 남편에겐 그것도 아닐 텐데.

16564544839857.jpg“그럼 나한테 왜 그러는 거지?”

첫날밤을 보냈으니 내가 유태령이 아니란 걸 알 텐데. 그걸 알면서도 이젠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라니.

16564544839857.jpg“설마, 복수의 방법을 바꾼 거야?”

그제야 태령은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나에게 잘해줘서, 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 자리를 지키게 하려고. 조 여사의 딸이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진짜 이름을 찾지 못하도록. 남편이 비밀을 알았으니 한신을 우롱한 이노그룹을 압박할 이유는 충분했다. 조 여사의 딸을 아내로 두는 것보다 그게 더 효과 좋은 복수였다. 똑똑한 남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 복수의 유일한 단점을 꼽자면 바로 자신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

16564544839857.jpg“이젠 나한테 연기하는 거구나.”

따뜻한 눈빛, 부드러운 표정, 다정한 말투. 나를 사랑하는 척한 것도, 다정한 남편인 척한 것도,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라는 말도. 결론을 내리고 나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64544839857.jpg“하마터면 속을 뻔했어.”

당신이 날 정말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참 바보같이. 태령은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6564544839857.jpg“주세희, 네 달만 버티면 돼.”

서강준 당신 곁에 머무를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당신도 복수를 원하듯이 나도 복수를 원하니까. 사랑 따윈 개나 주라지. 난 원래의 주세희로 돌아갈 거야. ***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은 청담의 지오바(BAR)에서 열린 디자이너 세리 장의 생일 파티였다. 세리 장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한 태령은 누군가를 찾았다. 강 관장과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으면서 다가갔다.

16564544839857.jpg“관장님, 잘 지내셨어요?”

사적인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는 태령이 이 파티에 온건 강 관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1656454495293.jpg“세상에, 빠질 살이 어디 있다고 더 빠졌을까? 영희 그것이 또 들들 볶았구나?”

강 관장의 걱정에 태령은 곱게 눈가를 접으며 웃을 뿐이다. 강 관장은 10년 전 보았던 조 여사의 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분위기와 성격까지. 태령이 접근하자마자 바로 가짜라는 걸 알아볼 만큼 눈썰미까지 좋았다.

1656454495293.jpg‘영희가 어지간히도 이 결혼에 목맸나 보네. 한신을 상대로 이런 사기극을 벌이다니.’

놀라긴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듯 웃는 강 관장에게 굽히고 들어간 건 태령이었다. 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조 여사에게 복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강 관장은 흔쾌히 태령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모를 증오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태령의 눈빛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1656454495293.jpg“좋은 소식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 통화 대신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거 있지.”

지금 두 사람은 동지였고 활동성이 묶인 태령 대신 강 관장이 움직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강 관장이 말한 좋은 소식이 뭔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아마도 지분 매각 건이리라.

1656454495293.jpg“이노패션에 관심을 보이는 해외 기업이 있어. 머스크라고 유명한 코스메틱 대기업인데 유 사장도 아마 알 거야.”

16564544839857.jpg“네, 알아요.”

모를 리가 없었다. 머스크는 세계 10대 기업 중 하나로 태령 또한 그 회사 브랜드 화장품을 쓰고 있었다.

1656454495293.jpg“의류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데 중국 진출에 성공한 이노패션에 관심을 보이더라구.”

희소식 중의 희소식이었다.

16564544839857.jpg“제가 항상 감사해요, 관장님.”

1656454495293.jpg“별소리를 다 하네. 나 계산 확실한 사람이야. 내가 공짜로 해주는 것도 아닌데.”

쿨한 강 관장의 말에 태령은 조용히 웃었다.

1656454495293.jpg“머스크에서 보낸 제안서 메일로 보내줄게.”

대화한 시간은 3분 남짓. 강 관장이 다시 무리로 돌아갔고 이제 태령은 조용히 사라질 차례였다. 그런데 누군가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 무심코 주변을 훑던 태령의 눈이 어느 남자에게 멈추었다.

16564544839857.jpg“…….”

거리감은 꽤 있지만 분명 진우였다. 훌쩍 솟은 키, 멍뭉미 넘치는 특유의 미소,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태령에게 고정하고 있는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그 눈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그럼 더 의심할 테니까. 담담히 눈을 맞춘 태령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급하지도 않게. 나가기 전 돌아보니, 급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진우가 보였다. 하아, 내가 미쳐. 진우는 순한 댕댕이처럼 생겼지만 한 번 꽂히면 집요해지는 성격이었다. 한 번 문 게 있으면 절대 놓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진우에게 사정 설명을 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보기보다 단순한 성격에 욱하는 면이 있고 무엇보다 표정 관리에 소질이 없다. 다급해진 태령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런데 이놈의 힐이 또 문제였다. 철제 계단의 송송 난 구멍에 굽이 끼면서 부러져버렸다. 덩달아 태령도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16564544839857.jpg“앗!”

스타킹이 나가버린 무릎에서 피가 비쳤다. 하지만 상처를 볼 때가 아니었다. 벗은 힐을 손에 들고 절뚝거리며 빠르게 걷던 태령은 누군가와 부딪쳤다. 튕기듯이 뒤로 밀리며 휘청이는 태령을 잡아준 남자는 남편이었다.

16564544839857.jpg“강준 씨가 왜 여기에…….”

앞은 서강준, 뒤는 김진우.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오늘 왜 이러는 건지. 진퇴양난의 상황에 태령은 울고 싶어졌다.

16564544839862.jpg“내가 데리러 온다고 했을 텐데.”

느리게 말을 하며 강준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16564544839862.jpg“누가 태령 씨 쫓아와요?”

아내의 매무새를 천천히, 그리고 집요하게 훑는다. 떨고 있는 눈동자, 불안한 표정, 손에 들고 있는 굽이 부러진 힐. 찢어진 스타킹과 무릎의 상처, 땅을 딛고 있는 맨발까지. 전혀 유태령답지 않은 모습을.

16564544839862.jpg“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같아서.”

아내가 입술을 달싹거리려는 찰나였다.

16564544980506.jpg“저기요! 잠깐만요!”

머리 위에서 남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강준은 오로지 아내만을 보았다. 핏기가 가시는 창백한 얼굴을. 눈가에 번지는 절망을. 어쩔 줄 몰라 하는 손끝을.

16564544839862.jpg“내가 도와줘요?”

강준의 담담한 질문에 아내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차마 대답을 못 한다. ‘네’라는 그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렵다고. 아니면, 내 도움을 받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 그래서 강준은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듣기 전까진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못됐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강준은 아내의 입에서 기어이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아내가 오늘 참석했던 파티 장소는 청담동 뒷골목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저층 건물이라 엘리베이터 대신 철제 계단이 지그재그로 되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어둑한 골목을 울린다. 다급해진 아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16564544839857.jpg“도와줘요.”

대답을 듣는 순간 강준은 왼손으로 아내의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았다. 손에 들고 있던 힐이 바닥에 떨어지고, 아내의 발끝이 살짝 들렸다. 커다래진 눈가에서 번지는 잔떨림을 보며 강준은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16564544839862.jpg“흉내만 내든지, 진짜 키스를 하든지.”

애정 행각 앞에서 버틸 놈은 없을 테니까.

16564544839862.jpg“선택은 태령 씨가 해요.”

가느다란 팔로 강준의 목을 감싼 아내가 먼저 입술을 맞대어왔다. 해줘요, 진짜 키스. 소리 없는 속삭임은 강준의 입안으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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