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잠들기 전, 잠든 후 자리.2021.07.22.
태령은 강준의 손을 쳐내며 뒷걸음질 쳤다. 손끝이 닿은 목덜미가 덴 것처럼 홧홧했다.
“당신…… 어젯밤 일 기억하는 거예요?”
남편은 대답 대신 태령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그가 어젯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은 아찔함에 태령은 눈을 감았다. 남편이 기억을 못 하는 것과 하는 것. 두 가지를 모두 예상하고 저지른 일탈이었는데도.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남편의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이 태령의 눈꺼풀에 노크를 해왔다. 천천히 눈을 뜨자 밤바다처럼 고요한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우리 부부잖아요.”
그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릿했다. 저 눈동자가 어젯밤 얼마나 뜨겁게 들끓었는지,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뜨겁게 달구어져 조금 멍해졌다.
“그래도 되는 사이 아닌가.”
이어지는 나직한 물음에 태령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 침묵마저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 남편 덕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당신, 어디까지 기억해요?”
“다.”
남편의 짤막한 대답에 뇌와 심장이 고장 난 듯 덜거덕거렸다. 그 밤은 기억해도 괜찮았다. 각오도 했고 그에 대한 대비도 했다. 하지만 새벽은, 내 마지막 속삭임은, 내 이름은…… 안 되는데.
“새벽에 내가 나갈 때도…… 깨어 있었어요?”
심장은 떨릴지언정 목소리만큼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태령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편은 나른한 손길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내가 깨어 있었으면…….”
그 손이 다시 천천히 다가와 태령의 입술에 닿았다.
“태령 씨를 그냥 보냈을 것 같아요?”
긴장감에 혀로 축인 아랫입술을 더듬는다. 마치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듯이. 어젯밤의 그 뜨거운 불길을 다시 예열하듯이.
“그렇게 좋았는데.”
비스듬히 내리뜬 눈동자가 낮고 뜨거웠다. 그 눈으로 태령을 깊게 바라보며 낮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만 좋았나.”
남편은 그 밤만을 기억한다. 서로를 허락했던 첫날밤의 일탈을. 나는 감정을 녹였지만 당신은 욕망을 녹였던 그 밤만을. 나 홀로 일어나 잠이 든 얼굴을 눈에 담고, 가슴에 담던 그 새벽은 모른다. 훗날 아내가 바뀌었음을 알 만큼 기억을 했다면. 내가 그 정도 의미는 당신에게 되었다면. 그럼 된 거 아닐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놀라울 만큼 태령은 차분해졌다. 그리고 뻔뻔해졌다.
“나한테 어디까지 모른 척해주냐고 물었죠?”
당신의 그 배려가 진심인지 또 다른 연기의 시작인지, 난 몰라. 난 당신을 사랑하지만 믿진 않으니까. 당신이 날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처럼. 우린 원래 그런 관계니까.
“다 모른 척해줘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당신도 날 믿지 마.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런데 남편이 거절했다.
“……왜요?”
원망스럽게 되묻는 아내의 말에 강준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지금까지 잘못했던 일들, 앞으로 함께 할 일들, 해주고 싶은 일들도. 희망도 품고 기대도 하고 조금 들떴던 것도 같고. 하지만 모른 척해달라는 말에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강준은 느닷없이 물었다.
“안아봐도 돼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내를 안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안아봐도 되냐고 물었어요.”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쉼 없이 입을 맞추고 싶었다. 첫날밤, 잠이 들 때까지 키스를 나누었던 것처럼.
“당신이 날 왜 안아요?”
“내 아내 내가 안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요?”
입술은 묻고 있지만 이미 강준의 손은 아내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하루 내내 그리웠던 감촉, 체취. 강준은 이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모른 척해줄게요.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연기도 해줄게요.”
주세희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바보 온달이 되어주겠다고.
“하지만 우리끼리는 기억하기로 해요.”
그래야만 우리 관계가 변하니까.
“강준 씨.”
아내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뻐근해진다. 사랑이라서 그러겠지. 이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을 놔 줘.
“그게 내가 모른 척해주는 조건이에요.”
태령은 남편의 품 안에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모르겠다. 약점을 잡힌 것에 대한 걱정의 한숨인지. 남편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된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인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정확했다. 단단한 품, 강인한 심장 소리, 섹슈얼한 체취, 나직한 숨소리. 이 모든 게 오늘 내내 그리웠다는 걸. 남편에 대한 기억이 자신에게 독처럼 남을 거라는 것도.
“그럼 우리 이제…….”
그때 남편이 진지하게 눈을 부딪쳐왔다.
“남보다 못한 부부 사이에서.”
경멸 가득했던 눈동자에 사랑이 감돌고,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가 된 거예요.”
차가웠던 음성은 한없이 다정해졌다. 태령은 덜컥 겁이 났다.
“난…… 강준 씨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요.”
자신이 진짜 유태령이 아니라는 걸 남편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신을 칭칭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감싸주면서. 그래서 확인해야만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약속은 지키는 남자라는 믿음만은 있으니까.
“근데도 정말 모른척해 줄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도,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도, 내가 없는 곳에서도?”
내가 당신을 떠나기 전까지, 날 모른 척해줄 수 있어요?
“날마다 뇌물 주면, 태령 씨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뇌물이요?”
고개를 든 태령의 정수리에 남편이 턱을 올렸다.
“스킨십 뇌물.”
나직한 음성에 희미한 웃음기가 번진다.
“그게 무슨…….”
“걱정하지 말아요. 태령 씨가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한다고 약속할게요.”
그게 뭐든. 남편이 귓가에 속삭여오는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 냉장고에 챙겨온 음식들을 넣으며 연숙이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우리가 갑자기 와서 놀랐지? 근데 너희들이 집에 있다는데 그냥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니.”
1층 보안실에 맡기고 가려고 했는데 집에 사람이 있대서 들른 거라는 말도.
“잘 오셨어요. 저도 어머니 보고 싶었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연락 못 드렸거든요.”
시간은 내라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늘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연숙 때문이었다. 부럽고 욕심이 나서. 태령의 대답에 정리하다 말고 다가온 연숙이 손을 덥석 잡았다.
“어제 아버님이 너 살도 많이 내리고 피곤해 보인다고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니?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음식이랑 보약이라도 챙겨와야지. 며느리 사랑은 시엄마, 알지?”
잔뜩 신난 표정으로 다가오는 연숙의 뒤를 본 태령은 그만 웃어버렸다. 강준의 말대로 연숙은 살림을 안 해본 게 티가 났다. 닫히지 않은 냉장고 안에 음식들이 쑤셔 넣은 수준으로 박혀 있었다.
“대충 넣어왔으니 내일 여사님 오면 정리해주라고 하고. 엄만 너랑 수다 좀 떨다 가도 될까?”
연숙의 손에 이끌려 두 사람은 거실에 나란히 앉았다. 테라스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서 있는 서 회장과 남편이 보였다. 여전히 풍채도 좋고 허리도 꼿꼿한 서 회장은 흰머리만 아니라면 젊은 남자 같았다. 그런 서 회장의 뒷모습에 태령은 이상하게 시선이 박혔다. 먼 미래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같아서. 서 씨 집안 남자 유전자가 우월하단 걸 또다시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태령이 넌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
테라스로 향한 시선을 돌리자 걱정 가득한 연숙의 얼굴이 보였다.
“일이 바빠서 끼니를 못 챙겨 먹는 거야? 아니면 고민 있어? 아무리 일이 좋아도 건강도 챙기면서 해야지.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도 모르니?”
“밥 잘 챙겨 먹었는데도 살이 좀 빠졌나 봐요.”
“너만 괜찮으면 엄마가 점심때마다 도시락 싸갈까? 전주댁 음식 솜씨가 끝내주거든. 너 좋아하는 갈비찜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신사업건만 마무리되면 여유 생기니 그때 더 잘 챙겨 먹을게요.”
“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그게 왜 번거로워?”
연숙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엄마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랬을까. 아니면, 너 같은 게 왜 태어났냐고 저주라도 퍼부었을까. 손녀딸 하나 먹여 살리겠다고 늘 일만 했던 할머니. 구부정한 등을 버릇처럼 두드리던 부르튼 손을. 자는 척할 때마다 숨죽이고 끙끙 앓던 신음을. 늘 괜찮다고 입버릇처럼 하던 그 말을. 태령은 다 기억한다. 못처럼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할머니에게 늘 그랬다. 늘 괜찮은 척, 씩씩한 척, 담담한 척. 그런데 연숙 때문에 처음으로 모성애란 게 궁금해졌다. 모성애 따윈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궁금했던 걸까, 그리웠던 걸까.
“어머닌 참 따뜻하고 좋은 분이세요. 강준 씨도 어머닐 닮아서 따뜻하고 좋은 남자인가 봐요.”
참 이상한 모자였다. 남편은 심장을 자극하고 그 엄마는 눈물샘을 자극하고. 모자가 나란히 태령을 흔들어댄다. 욕심내도 된다고, 이 자리를 네 것으로 만들라고.
“우리 강준이가 따뜻하고 좋은 남자라고?”
절대 못 믿겠다는 연숙의 표정에 태령은 눈을 내리깔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태령이 너 목 상처, 설마 우리 아들이 그런 거니?”
그제야 태령은 자신이 피곤함에 뒷목을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그 바람에 스카프가 조금 흘러내렸고 연숙이 그걸 본 것이다. 태령이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연숙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새끼를 낳았구나!”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하더니 수납장을 뒤져 손에 움켜쥔 게 국자였다.
“지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고 자랐으면서 아내한테 똑같이 그래? 태령아, 엄마만 믿으렴! 내가 이참에 저 녀석 버릇을 제대로 고쳐놓을 테니!”
당장 가서 아들을 매타작할 기세였다. 그 국자가 남편에게 아픔을 줄지는 과연 의문이지만, 우선 태령은 연숙을 말렸다.
“어머니, 전 괜찮아요.”
“남자들은 둔해서 대놓고 말 안 해주면 모른다니까? 아내가 무슨 갈비도 아니고! 왜 이렇게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야!”
연숙의 고집스러운 눈빛에 태령은 오로지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든 연숙을 말려야 한다고.
“저도 강준 씨한테 똑같이 해놨으니 괜찮아요!”
“……뭐?”
아직 확인은 못 했지만 태령도 남편의 등에 흔적을 남긴 것 같긴 했다. 이가 아닌 손톱으로.
“어머나, 태령이 너 보기보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연숙이 얼굴을 붉혔다. 이러려고 한 말은 아닌데. 괜히 민망해진 태령도 같이 얼굴을 붉혔다. *** 갑자기 들이닥친 연숙과 서 회장이 썰물 빠지듯이 사라졌다. 연숙과의 대화는 즐거웠지만 진이 빠진 건 어쩔 수 없었다. 반신욕을 할 마음도 사라진 태령은 2층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참고 있던 피곤함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어떻게 머리를 말렸고 화장까지는 했다. 하지만 1층에 남편이 있을 걸 생각하니 내려가기 싫어졌다.
“오늘은 혼자 자고 싶어.”
아무 생각 안 하고,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화장대에 잠깐만 엎드렸는데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는 손길에 눈을 뜨니 시야가 어둡고 흐리다. 좀 더 눈을 집중하자, 흐릿했던 실루엣이 또렷해진다. 남편이 태령을 안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뺨에 닿는 살결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고막을 쿵쿵 울리는 강인한 심장 소리도 좋았다.
“……강준 씨?”
속삭이듯 부르자 남편이 시선을 내렸다.
“잊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침대에서 같이 자기로 한 거.”
몽롱한 잠기운을 핑계 삼아 태령은 남편의 품에 얌전하게 안겨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일 층 침실에 도착한 남편이 태령을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왜 내 자리에 눕혀주지 않은 거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태령은 침대의 오른쪽을 눈짓했다.
“제 자리는 저긴데요.”
그러자 비스듬히 몸을 튼 남편이 손으로 머리를 괸 채 태령을 마주 보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요?”
옅은 어둠 속에서, 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우리 쭈욱 이렇게 잤는데.”
태령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며 그 말의 의미를 가늠했다.
“그게 무슨…….”
“진짜 미치겠네.”
큭, 울림 좋은 나직한 저음이 귓가를 스쳤다. 그가 얼굴을 숙여왔다.
“잠들기 전 자리는 저기.”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감에 태령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응시해오는 새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린다.
“잠든 후 자리는 내 품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