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어디까지 모른 척해줄까요?2021.07.18.
“사장님,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입니까?”
느긋한 강준의 물음에 윤 실장의 눈이 뒤쪽으로 향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겁니다.”
강준은 매너를 슈트처럼 두르고 웃는 낯으로 정면에 칼을 꽂는 스타일이었다.
‘열심히라는 단어는 쓸 필요 없습니다. 수치로 증명해 보이세요.’
말끔한 얼굴로 웃으며 임원들을 건조기처럼 탈탈 터는 기술이 수준급이었다. 그런데 오늘만은 회의실을 나서는 임원들의 표정이 밝았다. 탈탈 털리긴커녕 채찍 대신 당근을 하사받고 회의가 끝났으니까.
“저녁 6시 이후 일정은 알아서 조정해줘요. 급한 건 나 대신 박 전무랑 윤 실장이 요령껏 쳐내고.”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향하며 강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무서운 속도로 오늘 할당량을 다 했는데도 고작 5시밖에 안 됐다. 시간 참 안 가네. 통창에 선 강준의 발아래 깔린 도심의 뷰는 늘 무채색이었다. 건조하고 지루하고 생기 없고, 늘 같아 보여서. 그런데 지금은 색이 입혀진 뷰가 입체적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고 생기가 느껴지고 바쁜 일상이 느껴지고.
“주세희.”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뜨거워진다. 슈트 아래 갇힌 근육들이 또다시 폭발하고 싶어서 꿈틀거린다. 수줍어하며 대담하게 굴 줄도 알고, 애태우며 예쁜 짓도 할 줄 알고.
“이름도 예쁘네.”
어젯밤을 기억한다. 부드러운 감촉, 다디단 맛, 향긋한 체취, 가느다란 신음. 몸의 대화, 엉켰던 마음, 나누었던 교감, 함께 했던 쾌락.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가 된 첫날밤을. 내 하루는 너로 가득 차서 빛이 나는데 넌 어떨까.
“당신은 아니겠지.”
손끝으로 눈썹을 문지르는 강준의 표정이 씁쓸하다. 눈을 뜸과 동시에 몸 안에서 같이 기상할 녀석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는 척을 했다. 그 덕에 듣게 된 아내의 속내.
“좋아죽겠으면 욕심을 내야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다른 여자에게 양보하겠다니, 첫날밤을 혼자 기억하겠다니. 날 좋아한다면서, 함께 보낸 뜨거운 밤은, 같이 나누었던 교감은 뭔데. 왜 여전히 도망치지 못해 안달인지. 하지만 늦었다. 분명 기회를 줬는데도 가지 않은 아내를 이제는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이런 고민마저도 좋아서 강준은 피식, 웃어버렸다.
“주세희 씨, 잠을 잤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 몸이 워낙 지조 있고 고결해서, 입을 싹 닦기는 힘들 텐데. 이제 강준에게 남은 고민은 하나였다. 아내의 뒷조사를 하냐 마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주세희란 이름으로 모든 걸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망설여졌다.
“그 성격에 곱게 안 넘어갈 테고.”
뒷조사를 한 걸 알면 지금껏 힘들게 쌓아온 게 모두 무너질 수도 있다. 아내가 얼마나 냉정하고 독한 여자인지 몸소 겪었으니까.
“그럼 직접 듣는 게 최선인데.”
하지만 첫날밤을 보내놓고도 도망칠 궁리를 하는 아내였다. 직접 말해줄 리도 없고 물어본다고 대답할 여자도 아니고. 사랑이란 감정이 아내 앞에서 무용지물인 것도 확인했고. 뭘 어떻게 해야 비밀을 털어놓을까. 그만 강준은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사랑은 해도 나는 못 믿는 거겠지.”
이제야 아내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신도 아내를 못 믿으면서, 정작 아내는 자신을 믿길 원하다니. 이기적인 착각이었고 오만한 바람이었다.
“시간이 꽤 걸리겠군.”
아내의 마음을 열려면, 믿음을 얻으려면, 비밀을 털어놓게 하려면. 하지만 강준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생각이다. 자신이 움켜쥐기로 한 이상, 아내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니까. 괜히 조급하게 굴었다가 다 망치는 수가 있으니까. 내가 모른 척하길 원한다면, 비밀을 파헤치길 원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래 줘야겠지.”
하지만 이건 모른 척 못 하겠다. 우리의 첫날밤. 그래야만 진짜 끊을 수 없는 부부 사이가 될 테니까. 강준은 아내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내 일정이 몇 시에 끝나지?”
끙끙거리며 나가던 아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오후 일정 캔슬하고 바로 집으로 가시겠다고 했어요.]
“이유는?”
[잠도 못 자셨고 가벼운 근육통이 있다고 하셨어요. 병원은 당연히 안 가시구요.]
“혹시 오늘이 그 날인가?”
[……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 날.”
담담히 묻는 강준과 달리 당황한 건 김 비서였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은 매달 말이세요.]
그렇다면 침대 위의 그 흔적은. 통화를 끝낸 강준의 눈빛에 만족스러움이 번진다.
“주세희, 내가 책임져줘야겠네.”
서로를 책임져야 할 관계라. 흡족할 만한 부부 사이의 시작이었다. *** 오전 내내 태령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사장님, 몸이 안 좋으세요?”
몸이 안 좋다기보다는 아팠다. 옷에 쓸릴 때마다 피부는 따끔거리고 온몸의 근육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강도 있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아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잠을 못 잤더니 좀 피곤하네.”
“어제 급참석한 한신 회장님 생일 파티 때문에 새벽까지 또 일하신 거죠? 내가 못 살아, 또 감기 걸리신 건 아니구요?”
“가벼운 근육통이니 신경 쓰지 마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날랜 다람쥐처럼 집무실을 나갔다 들어온 김 비서가 발포 비타민을 탄 물병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우선 드세요.”
한 번의 위기를 넘긴 후 김 비서는 태령을 진심으로 따랐다. 문제는 그 진심에 잔소리가 덤으로 따라와서 문제였다. 그래도 그 잔소리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
“빨리 퇴근해서 하루 푹 쉬면 되니까 내 걱정 말고 일해요.”
마지못해 돌아서는 김 비서에게 태령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남편에게 보고할 생각도 하지 말고.”
어떻게 알았냐는 듯 김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치 하나는 빠삭해선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김 비서가 눈치챘다. 완벽한 태령의 편이라고 인식했는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남편에게 보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조 여사의 폭행에서 태령을 구해준 이후로 더더욱. 김 비서가 나가고 혼자 남은 태령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걸까.”
기억을 떠올리면 신기하게도 자신이 한 건 딱히 없었다. 힘을 쏟은 것도, 끊임없이 움직인 것도, 모두 남편이다. 근데 왜 이렇게 내가 힘들지, 죽을 것 같지. 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사장님, 이노 사모님 오셨습니다.]
“들여보내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태령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나왔다. 하필 이때 올 건 뭐람. 오랜만에 보는 조 여사는 여전히 우아하고 교양 있는 사모님이었다. 하지만 태령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변함없이 쌀쌀맞았다.
“도라 쇼핑몰 인수를 추진한다던데, 네 뜻이니?”
“제 뜻이 아니라 주주들 뜻이에요.”
“…….”
“새롭게 분야를 넓히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브랜드를 인수하고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해서 결과를 보여주길 원해요.”
“…….”
“예전에 이노패션이 새로운 분야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매각위기까지 갔었잖아요.”
이미 생각해놓은 대답을 태령은 차분하게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 건으로 엄마에게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겨를이 없었어요.”
응시해오는 조 여사의 눈빛이 갈고리처럼 태령의 머릿속을 긁어내려 했다. 그 눈을 마주 보며 태령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엄마가 나서서 주주들 좀 설득해주세요. 특히 강 관장님이요. 주주들만 설득해주시면 사외 이사는 제가 설득해볼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노패션에서 도라를 인수하면 이 계약이 끝나도 절 또 볼 수도 있어요. 위험하기도 하지만 엄마도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네 돈줄을 움켜쥘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고?”
조 여사는 태령의 예상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일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니까.
“내가 준다는 돈도 마다한 네가 믿는 게 네 친구 말고 더 있겠니? 보나 마나 또 도라에서 일하겠지. 너 같이 한심한 걸 받아줄 데가 거기 말곤 없을 테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이 계약을 하기 전까지, 태령은 도라 쇼핑몰에서 일했다. 그 이유는 일할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태령이 진짜 사장이어서였다. 그걸 모르니 조 여사는 당연히 이렇게 반응하는 게 맞았다.
“제가 아니라 진경이가 곤란해하고 있어요. 단독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데 자꾸 이노에서 인수하려고 귀찮게 연락하니까. 그래서 저도 입장이 곤란해요.”
“이노패션이 도라를 인수하는 게 넌 싫으니 가격을 턱없이 낮게 불러서겠지.”
정곡을 찔린 듯 태령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제시한 금액의 3배를 불러. 그럼 귀찮게 생각 안 하고 오케이 하겠지.”
“엄마!”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조 여사가 태연히 일어났다.
“오늘 그 말 하려고 온 거다. 덜 떨어지는 머리로 얕은수 좀 그만 부리라고.”
조 여사가 찬바람을 날리며 나간 후, 그제야 태령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고마워요, 이모. 내 의도대로 움직여줘서.”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이건 확실했다. 이럴 땐 잘 먹고 푹 쉬어줘야 빨리 회복한다는 것. 윤 실장에게 확인하니 남편은 오늘 퇴근이 늦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집에 빨리 들어왔는데. 거실은 환하고 따뜻한 공기에선 남편의 향기가 묻어났다. 때마침 침실에서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며 남편이 나왔다. 헐벗은 상체에 눈을 어디 둘지 몰라 태령은 시선을 피하며 자그맣게 말했다.
“윤 실장님이 오늘 강준 씨 늦는다고 했는데…….”
내리깐 시야에 남편의 발이 서서히 밀려들었다.
“태령 씨 빨리 들어온다고 해서 나도 빨리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왜요. 태령이 살짝 미간을 좁히자 남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어제 외박했는데 안 혼내요?”
그제야 태령은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무심한 눈동자가 태령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남잔 정말 어젯밤을 기억 못 하는 걸까. 그게 묘하게 안심이 되면서도 서운하다. 참 이상하고 이기적인 양면성이었다.
“저도 같이 외박했어요. 강준 씨가 침실에서 잘 때 저는 거실에서. 할아버님이 부탁한 건데 취한 강준 씨를 두고 갈 수 없어서. 그러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요.”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잤으니 외박이 아니다?”
부드럽게 묻는 어투에 기시감이 든다.
“……네.”
“그럼 외박은 넘어가는 걸로 하고.”
남편의 태연한 모습에 태령은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침실 욕실에 물 받아놨으니 오늘은 1층에서 반신욕 좀 하고 샤워해요.”
“반신욕은 갑자기 왜요?”
“근육통 있다던데.”
괜히 눈가가 뜨거워진 태령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김 비서, 도대체 어디까지 말한 거야.
“반신욕이 근육 풀어주는 데 좋아요.”
그렇게 말을 하는 남편의 눈빛이 한결 짙어졌다.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걱정하면 안 되나?”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부드럽게 웃으며 남편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우리가 그럴 사이가 되려면,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기시감이 드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오늘 남편이 이상하다. 따뜻한 눈, 부드러운 표정, 다정한 말투. 지금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대하는 것 같았다. 마치 우리가 진짜 부부라는 것처럼. 방어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태령은 차분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말 돌리는 거 딱 질색이에요. 할 말이 뭐예요?”
기억하면 기억한다고 대놓고 말하라구. 사람 간 보면서 즐기지 말고. 벌린 만큼 거리를 다시 좁힌 남편과의 간극이 아슬하다.
“할 말은 내가 아니라 부인이 있을 것 같은데.”
남편과 닿지도 않았는데 태령은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어젯밤이 떠올라버렸다. 기억하길 외면하는 머리와 달리 몸이 지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절대 잊지 못하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각인을 새겨넣은 남편 때문에.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하지만 남편이 어젯밤을 기억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 남자에 대한 사랑을 버리려는 결정도, 우리가 곧 남남이 될 거란 진실도.
“없어요.”
태연히 대답하는 순간, 단단한 팔이 태령의 가는 허리를 당겨 안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열기를 가둔 단단한 몸의 낯 뜨거운 감촉을 또렷이 기억하기에.
“그럼 하나만 대답해줘요.”
커다란 손이 뒷목을 감싸고 검지로 목에 두른 스카프를 내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얀 목덜미의 난잡한 흔적이 장미꽃이 번진 것처럼 화려했다. 손끝으로 그 흔적을 어루만지며 남편이 허리를 기울여왔다.
“어젯밤 일, 내가 어디까지 모른 척해줄까요?”
긴 속눈썹에 와닿는 남편의 숨결이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