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첫날밤.2021.07.15.
복도를 걷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다시 내려서 걷고.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고. 그 순간까지 강준은 수도 없이 갈등했다. 지금 하려는 게 진짜 몹쓸 짓이고 쓰레기 짓 같아서. 그래서 보내주려고 했다. 아내가 돌아간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확인도 안 하고, 이혼도 해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고 싫지 않다고 했고 기꺼이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이제 늦었고 돌이킬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다. 보내주려 했음에도 가지 않은 건 당신이니까.
“나 안 가요. 싫지 않다구요. 그러니까…….”
아내를 품에 가두고 집어삼킬 것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강준에겐 이 모든 게 처음이었다. 여자와 스킨십을 하고 키스를 하고, 지금 하는 모든 행위가. 하지만 경험이 없다고 어리숙하진 않았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만들 적에, 남녀를 구분하여 만들 적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무지해도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서툴고 서툴렀다.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그런데도 아내는 붉은 장미처럼 반응해주었다. 찰나의 미세한 반응에도 심장이 멈추었다가 강렬하게 뛰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고, 더 뜨겁게 예열되었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감각에 뇌까지 잠식당하고 있었다. 후아. 입술을 뗀 강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뜨거운 뇌를 식히려 애써보았다. 내리뜬 시야에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여자가 보였다. 젖은 눈가, 부풀어 오른 도톰한 입술, 발그레한 뺨. 늘 단정하던 눈빛과 얼굴이 흐트러지니 그게 또 지독히도 야해 보였다. 이러니 내가 미치지. 정신을 못 차리지.
“싫으면 말해요.”
강준이 스스로 아내에게 내어준 고삐였다. 날뛰는 짐승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이 여자뿐이니까.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지 않도록. 이 여잘 힘들게 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도록.
“멈추려고 노력해볼게.”
장담은 못 하겠지만. 이번에도 아내는 입술 대신 손으로 대답을 해왔다. 그것도 아주 꽤 대담하게. 재킷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고.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자 아내가 수줍게 웃으며 손을 밑으로 내린다. 바지 버클까지 내려온 작은 손을 잡은 강준은 그만 웃어버렸다. 이 요망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순식간에 상의를 탈의한 강준은 침대에 앉으면서 아내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얼떨결에 강준의 다리 위에 앉은 아내의 가녀린 팔이 목을 감싸왔다. 입술을 맞댄 채 강준은 속삭였다.
“이젠 못 멈춰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해도. 허경수도, 양심의 가책도, 절제도, 이성도. 마녀 같은 당신이 모조리 산산조각냈으니까.
“쓸데없이 왜 이렇게 예뻐서.”
지금 아내를 집어삼키고 있는 이 순간조차 그는 미치도록 갈증이 났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이, 온몸을 달구는 감촉이, 짙은 살 냄새가, 달고 또 달았다.
“나를 짐승으로 만들어.”
가녀린 등줄기를 타고 오른손이 아내의 머리를 풀어버렸다. 풍성하게 흘러내린 머리칼이 물풀처럼 부드럽고 향기롭다. 머리 푸니까 더 예쁘네.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원피스 지퍼를 내리고 팔을 뺐다. 스르륵 흘러내린 원피스가 가느다란 허리에 걸리자 강준은 그대로 다시 아내를 눕혔다. 옅은 어둠 속에서도 우유처럼 뽀얀 아내는 눈이 부셨다. 몇 번이고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보아도 잡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번진 울림이 뇌까지 울리고 있었다. 이 여잔 알리샤 바튼이 아니라고, 유태령이 아니라고. 그럼 넌 대체 누구지. 정체가 뭐야, 목적은 뭐고. 교차되는 안도감과 혼란스러움이 달구어진 가슴에 찬물처럼 끼얹어졌다. 뜨겁게 차오르는 공기 속으로 서늘한 침묵이 번져 나간다.
“…….”
“…….”
빤히 쳐다보는 남편의 눈에서 열감이 빠져나가는 걸 보는 건 태령에게 고통이었다. 난 싫어. 당신의 그 망설임이, 돌아오는 이성이, 차가워지는 눈이. 태령은 건조한 뺨을 감싸 끌어내려 입술을 맞댔다. 이 남자의 망설임을 지우고 본능을 되돌리고 식은 눈을 다시 달구려고.
“멈추지 마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낸 용기인데, 일탈인데. 그러니까 날 외면하지 말아요. 이 밤만큼은 나도 욕심내게 해줘요. 물기 젖은 눈으로 남편의 눈을 바라보며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반듯한 이마, 오만하게 뻗은 콧날, 날렵한 뺨, 부드러운 입술. 어설프고 서툰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날 놓지 말아요. 안아줘요. 이 밤만큼은 뜨겁게. 건조해진 눈동자에 다시 열기가 차오른다. 그 열기가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순간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으며 태령은 눈을 감았다. 이제 알 것 같았다. 결혼식장에서부터 남편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를.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몰래 훔쳐보고, 차갑지만 타는 듯한 그 눈을 가슴에 각인시킨 이유를. 다정하지 않은 이 남자를 처음으로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처럼, 조심스럽고 조용히 서서히 밀려들어 눈치도 못 채게.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다면 모르고 끝났을 사랑이었을 텐데. 돌아온 당신이 밉고 원망스러워. 그런데도 사랑해. 목덜미에 닿는 더운 숨을 느끼며 태령은 아득하게 속삭였다.
“강준 씨를 원해요.”
지금 이 순간을, 당신을, 내 마음에 평생 기억할 수 있게. 나도 이토록 뜨거운 사랑이란 걸 했다는 걸 잊지 않게.
“그러니까 사랑해줘요.”
남편이 얼굴을 들었다. 강렬한 빛을 뿜는 눈동자, 정제되지 않은 날숨에 밴 진득한 욕망. 태령은 자신 때문에 흐트러진 남편의 모습을 한껏 눈에 담았다. 긴 손끝이 다가와 젖은 입술을 벌리고 속삭임을 불어넣는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내 여자야.”
온몸 곳곳의 세포에 각인을 새겨넣듯.
“절대 잊지 말아요.”
순식간이었다. 남은 옷가지들이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 뜨겁고 단단한 몸이 압박해온 건. 빠듯하게 밀려드는 강준을 아내는 온몸으로 꼭 끌어안았다. 놓치기 싫다는 듯, 멈추지 말라는 듯. 젖어 있는 붉은 눈동자, 달콤한 숨결, 짙은 향기,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 아내의 모든 것들이 폭우처럼 강준을 덮치며 온몸의 세포에 각인을 새겨넣는다. 파고드는 건 자신인데 아내로 인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 또한 자신이었다. 사랑스럽다 못해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아내를 포악스럽게 집어삼키고 싶다. 동시에 유리 다루듯 소중하게 다뤄주며 온몸에 각인을 새겨놓고도 싶다. 넌 내 여자라고. 양면적인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강준은 아내의 붉은 입술을 집어삼켰다.
비명 같은 신음마저도 빨아당기는 강준의 등에 아내는 손톱을 세워 흔적을 남겼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는 근육들이 도드라지며 힘줄이 곤두섰다. 날렵한 턱선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 땀방울이 태령을 적셨다. 이 남자의 모든 게 좋다. 이 거침도, 투박함도, 뜨거움도,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운 이 욕망도. 어둠이 가고 미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뜨겁고 달뜬 두 사람의 첫날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파티가 서서히 마무리되어가는 때였다. 비서실장 영만이 다가와 속닥거리자 서 회장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니. 옳거니, 내 작전이 먹혔구먼. 그때 연숙이 투덜거리면서 서 회장에게 다가왔다.
“다들 보는 눈은 있어선. 왜 자꾸 우리 아가를 며느리 삼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아들이 정·재계 통틀어 최고의 신랑감이란 것은 모두가 인정한다. 친가가 재계를 주름잡고 외가가 정계를 주름잡고. 배경도 완벽한데 외모도 좋고 능력도 좋고. 독보적인 그 완벽함은 아들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사위로 탐을 내면서도 감히 함부로 딸을 들이밀지 못하니까. 하지만 만만한 이노그룹의 손녀인 태령은 말이 달라진다. 적당한 집안에 외모 좋고 일 잘하고 성격 야무지고. 모두가 며느릿감으로 대놓고 탐을 내니 속이 탈 수밖에.
“아버님, 친분 있는 언론사에 강준이 결혼 소식 살짝 흘리면 안 될까요? 결혼한 건 맞으니 부정 안 할 거고 태령이한테 마음 있으니 강준이도 인정할 걸요?”
그래서 연숙은 안달이 났다. 며느리 자랑도 하고 싶고, 며느리에게 잘해주고도 싶어서.
“태령이한테 잘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가 없다구요. 돈이 넘쳐나면 뭐 해, 쓸데가 없는데.”
다른 집안은 상속해줄 재산으로 자식들의 고삐를 틀어쥔다는데. 제 아들은 어릴 적부터 주식에 부동산에 머리가 트여서 연숙보다 더 부자였다. 딱히 사치를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거라. 조만간 그 녀석이 애가 달아 먼저 밝힐 테니.”
잠시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연숙이 이내 해맑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근데 태령이는 어딨어요? 걔가 날 안 보고 갔을 리가 없는데. 아버님도 아시죠? 걔랑 나랑 모녀 사이처럼 지내기로 한 거.”
모임 멤버들끼리 모여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안 되겠다, 전화해봐야지.”
“전화는 내일 해라. 두 아이 지금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테니 방해하지 말고.”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연숙에게 이번엔 서 회장이 속닥거렸다.
“두 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렇게 뻔하게 보이는 작전에 넘어갔다구요?”
그래도 연숙이 의심하자 서 회장이 허허 웃는다.
“못 믿겠으면 내일 신혼집에 보약 들고 쳐들어가면 알 거 아니냐.”
***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5시. 태령은 처음으로 남편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잠을 아예 못 잤다는 표현이 옳았다. 온몸은 쑤시고 아픈데 심장은 두근거려서. 혼란스러운데도 따뜻한 봄바람이 번진 마음은 자꾸만 설레서. 서강준이란 거대한 폭풍이 밤 내내 그녀를 휩쓸고 또 휩쓸었다. 아픈데 기분 좋고 기분 좋은데 힘들고, 힘든데 또 이상하게 좋고. 그 폭풍에 몸을 맡긴 하룻밤의 결과는 처참했다. 당장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 걸 알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 남편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중한 매너와 우아한 얼굴은 그저 가면일 뿐. 폭주해서 멈출 줄 모르는 한 마리 수컷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밤부터 새벽까지 지치지 않고 달려들던 남편을 떠올리며 태령은 중얼거렸다.
“몸이 괜히 좋은 게 아니었어.”
도망치려는 태령을 어르고 달래서 기어이 또 안는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건지. 밤 내내 폭풍처럼 덮쳤던 남편은 이제 잔잔한 호수처럼 태령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절대 놔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한 팔다리로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남편의 품이 싫지 않다. 낯부끄럽지만 이렇게 안겨 있는 것도. 살을 맞대고 얽혀 있는 서로의 팔다리도. 온기가 좋고 감촉이 좋고 향기가 좋고. 남편의 모든 게 좋다. 하지만 마법의 시간은 끝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 태령이 조심히 품에서 빠져나왔는데도 남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안 피곤하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지. 태령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 짐승 맞아요.”
잡아먹히다가 죽는 줄 알았다구요.
“근데도 좋아죽겠어. 아니, 더 좋아진 것 같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에게 사랑은 사치인데, 당신은 더더욱. 조심스러운 손끝이 흘러내린 남편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좋은 추억을 내게 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당신은 욕심 안 낼 거야.”
사랑받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게 해줘서. 나도 뜨거운 사랑을 한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하게 해줘서. 당신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감정이니까. 그에 대한 보답으로 태령은 강준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여잘 만나도 되고 사랑해도 돼요.”
남편 덕분에 진짜 사랑이 뭔지 알게 되었다. 나는 행복하지 못해도 당신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평범한 결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대신, 내 몫만큼.
“대신, 나보다는 조금 덜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덜 다정하고 덜 배려하고. 키스도 조금만 해주고.”
어젯밤 가장 많이 한 게 키스 같았다. 키스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린 만큼. 입술이 떨어지면 서로를 애타게 찾았다. 결국 키스를 하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진 지금도 모른다. 그냥 좋았고 그러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첫날밤을 강준 씨는 기억하지 말아줄래요.”
기억을 하고 있는 당신이 날 또 흔들까 봐.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알아낼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틀어질까 봐. 이렇게 나약해지니까 사랑 같은 건 안 하려고 했는데, 딱 질색이었는데.
“나만 기억할게.”
당신을 사랑하지만 난 내 인생이 더 소중해. 할머니, 복수, 내 계획. 이 사랑이 장애물이라면 난 기꺼이 부수고 버릴 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태령은 남편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주세희라고 해요.”
말해버렸다, 진짜 이름을. 잠이 든 그는 못 들을 테니까. 그래서 알려주는 거였다. 나만 기억하는 이 밤만큼은 유태령이고 싶지 않아서.
“잘 자요, 내 사랑.”
남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태령은 몸을 일으켰다. 뜨거웠던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또다시 유태령으로 돌아갈 때였다. 문이 조심히 열렸다 닫힌 후 침실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
그제야 강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얇은 눈꺼풀 아래 반쯤 잠긴 검은 눈동자에 잠기운이라곤 없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시트가 흘러내리며 근육이 도드라지는 완벽한 상체가 드러났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올리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주세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