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이 밤 날 안아요.2021.07.11.
환갑 이후로 서 회장은 평창동 본가에서 소박하게 생일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 팔순 생일은 팰리스 호텔 연회장에서 규모 있게 열기로 급하게 결정했다. 이유는 바로 속을 바싹 태우는 손자 부부 때문이었다. 저번 주 한신 계열사 사장단 회의가 끝난 후, 서 회장은 손자와 점심을 하며 손자 부부의 사이를 슬그머니 떠보았다. 하지만 대답 대신 손자가 짙게 풍기는 어둠의 아우라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제자리는커녕 더 악화되었다고. 이러다 하늘은 언제 보고 별은 언제 따고 증손주는 언제 안겨줄 건지. 결국 인생 경험 많은 이 몸이 나설 수밖에. 슬그머니 튼 시야에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손자며느리가 보였다.
“잘 지내셨어요, 회장님. 제가 많이 늦어서 죄송해요.”
손을 내저으며 태령을 바라보는 서 회장의 눈빛이 흐뭇하다.
“갑자기 하기로 한 건데, 이렇게 다들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당연히 와야죠. 생신 축하드려요, 회장님.”
건조하지만 세련된 말투가 나긋나긋했다. 예쁘고 세련되고 단정하고, 그만큼 고집도 세고 도도하고 차갑고. 둘 다 너무 똑똑하고 자존심이 세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혜순이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홈쇼핑 론칭도 성공적이라고 들었네. 일 잘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 관리도 잘해야지.”
“그럴게요.”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태령의 시선이 어딘가에 잠시 머물렀다 무심히 돌아왔다. 그걸 본 서 회장이 눈을 빛냈다. 무심한 척해도 태령이 손자를 신경 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귀신은 속여도 80년 된 늙은 호랑이는 못 속이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 회장은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이런. 나 대신 술을 넙죽넙죽 받아마시더니 내 손자가 많이 취했어.”
얼큰하게 취한 척하니 보디가드처럼 옆을 지키던 손자가 서 회장 대신 술을 받아마셨다. 네 녀석이 대신 안 마시면 기어이 다 마시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물론 서 회장의 계략이었다. 손자가 좀 취해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니. 그런데도 태령의 무심한 눈빛은 서 회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무리 중에서 가장 키 크고 덩치 크고 얼굴 잘생긴 놈이 내 손자 녀석인데. 그래 보이지 않나, 유 사장?”
그제야 태령의 시선이 마지못해 느릿느릿 향했다. 꽤 취해 있는 데다 하필 경진의 사촌 여동생이 파트너처럼 옆에 있는 강준에게.
“회장님, 손자분은 지인과 파트너가 지켜주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파트너는 무슨! 저 아가씬 경진이란 친구 사촌 여동생이야. 내 손자에게 술을 더 안 권하면 다행이지. 저 집안이 죄다 술 좋아하고 노는 걸 좋아하니, 원.”
“……경진 씨 사촌 여동생이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은 다시 단정한 얼굴 아래로 사라졌다.
“유 사장,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이리. 조용한 손짓에 조심히 다가온 태령에게 서 회장이 귓속말을 했다.
“네가 저 녀석 좀 구출해서 1003호에 던져놓아라.”
진짜 던져두고 가지 말고 같이 있어주면 좋고.
“윤 실장 말이 아내 때문에 귀소본능이 뼛속까지 박혀서 한 시간을 자더라도 집에 기어이 들어간다던데.”
“…….”
“아가가 데려다줘야 강준이가 맘 편히 푹 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푹 쉬다 잠들면 거기서 출근하게 해줘도 되고.”
같이 푹 쉬면서 알콩달콩하게 시간 좀 보내다 좋은 밤을 보내면 더 좋고. 태령에게 속살거리는 건 주위에서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이 아가씬 내가 찜했으니 넘보지 말라고.
“저 녀석이 술을 워낙 못 해서, 여기서 기절이라도 하면 한신 체면이 말이 아닐 거다.”
긴 속눈썹 아래 눈동자를 숨긴 태령의 속을 서 회장조차 지금은 읽을 수가 없다. 이러니 손자 녀석이 안달이 나고 제자리걸음인 거겠지. 혜순이보다 더 차갑고 도도한 것도 같고. 마지막 방법도 안 먹히면 할아비도 포기다, 이 녀석아.
“친구들한테 부탁하면 1003호에서 술 파티를 벌일 게 뻔하고. 아가가 정 곤란하면 경진이 사촌 여동생……?”
“강준 씨, 1003호에 고이 데려다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서 회장의 귓가에 담담히 속삭인 태령이 몸을 돌렸다. 그제야 서 회장은 실실 웃었다. 놓고 오긴 뭘 놓고 와, 같이 있어야지. 스위트룸 분위기는 좋고 아내는 환장하게 예쁘고 술도 좀 마셨으니 용기도 날 테고. 이렇게 돗자리를 깔아줬는데도 성공 못 하면 손자 녀석을 호적에서 파버리고 말 테다. 그런데 주변의 대화 소리에 서 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노그룹 손녀를 서 회장님이 손자며느리로 찜하셨나 봅니다?”
“어헛, 이 사람아. 회장님 손자가 비혼주의인데 무슨 소리를. 이참에 내가 이노에 선이나 넣어봐야겠어. 이노 사모님을 닮아서인지 아주 참하고 똑 부러져.”
“임 전무 아들은 좀 아니지 않나. 여성 편력이 그리 심하다며.”
“최 사장, 그러니까 며느리를 잘 들여야지. 내 아들 확 후려잡아서 정신 차리게!”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대놓고 관심 끄라고 보여줬더니 오히려 탐을 내?
“내가 이미 이노의 유 회장이랑 만나서 이야기 나눴으니 모두 넘보지 말게나!”
저 아이는 이미 내 손자며느리라고 밝히고 싶어 서 회장은 입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손자 녀석이 결혼 전부터 단단히 못 박았다. 자신이 밝히기 전까지 이 결혼을 외부에 알려서도 안 되고 태령을 타인처럼 대하라고. 그래서 결혼식 때도 가까운 지인과 친인척만 소수로 불렀고 오늘 이 자리엔 초대도 안 했다. 하지만 오늘 일이 잘 풀리면 이참에 강준이게 강력하게 피력해야겠다. 네 아내 노리는 곳이 많으니 이만 결혼 공표하는 게 어떻겠냐고.
*** 연회장에서 남편의 곁에 있는 여잘 본 순간, 사실 태령은 속이 뒤집혔다. 세 번이나 남편과 같이 있는 걸 보면 꽤 깊은 사이인 것 같아서. 그런데 경진의 사촌 여동생이라니. 이걸 화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 회장님 대신 자네가 한 잔 받게나. 한신의 미래를 위하여! 회장님의 건강을 위하여!”
사람은 한 명인데 남편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은 서너 명이었다.
“서 사장님이 많이 취한 것 같으니 제가 대신 흑장미를 해도 될까요?”
조용히 다가온 태령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경진과 재우만이 소리 없이 손으로 입을 막을 뿐. 쏠리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서 회장님께서 손자분을 제게 부탁하셔서요.”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도 자신에게 부탁한 서 회장이 뒷감당은 해줄 거라 믿으며.
“이노패션 유태령이라고 합니다.”
세련된 어투로 자기소개를 하자 반응이 뜨겁다.
“아, 요즘 아주 핫한 유 사장! 이노패션과 아름다운 유태령 사장. 반가워요!”
곧이어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을 태령은 거부하지 않고 깔끔하게 원샷했다. 그런 태령을 사람들은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그 중에선 강준도 포함이었다. 뿌옇게 흐려지던 시야가 아내로 인해 다시 환해지고 또렷해진다. 술 마시는 모습도 이렇게 예쁘면 반칙 아닌가. 여럿의 남자들이 권하는 술을 차례대로 받아 원샷하는 당당함은 멋있기까지 했다.
“회장님이 걱정 많이 하세요. 객실 가서 쉬라고 하셨고 제가 엘리베이터까지 부축해줄게요.”
나긋나긋한 팔로 부축을 해오는 아내에게 강준은 투덜거리듯 물었다.
“정말 회장님이 보냈어요?”
“네. 회장님 부탁이 아니면 제가 이럴 이유가 있을까요?”
아내의 깔끔한 대답에 강준은 쓰게 웃었다. 저번 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서 회장의 속내를 이제 알 것 같아서. 좋은 장소를 두고 팰리스 호텔에서 갑자기 팔순 잔치를 하겠다는 것도. 기어이 자신이 취할 만큼 술을 마시게 한 것도. 그래도 이런 기회를 만들어줬으니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
“엘리베이터까지 걸을 수 있겠어요?”
아내가 다시 묻자 강준의 시선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사람 미치게 하는 말랑말랑한 눈동자에서, 다디단 맛이 날 것 같은 입술로, 희고 깨끗한 목덜미로. 내가 과연 이 여자를 놓을 수 있을까.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숨 쉬고 살 수 있을까. 술에 취하긴 했나 보다. 감정이 주체 못 하게 터져 나오는 거 보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난 손끝이 저릿할 정도인데. 그건 곧 심장에서 제게 보내는 새빨간 위험신호였다. 여기서 더 감정이 깊어지면 절대 끊어내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지금 당장 아내를 향한 이 감정을 끊어내라고.
“태령 씨가 도와주면.”
태령의 부축을 받고 멀어지는 강준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생각했다. 한신 서 회장이 이노패션 유태령을 손자며느리로 찍은 게 분명하다고.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편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대로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태령 씬 이만 가줘요.”
하는 수 없이 태령은 남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마주 앉았다. 무겁게 감긴 눈꺼풀을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객실까지 데려다주고 갈 테니 좀 일어나 봐요.”
“…….”
“몇 걸음만 더 걸어줘요, 네?”
엘리베이터까진 나름 잘 걸어와서 괜찮은 줄 알았다. 술기운이 뒤늦게 확 올라왔나 싶은 그때 남편이 중얼거렸다.
“같이 들어가면 내가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서 그래요.”
태령은 알 것 같았다. 마지막 경고를 하기 위해, 남편이 절제와 이성을 얼마나 쥐어짜고 있을지. 그런 남편의 마음이 태령의 심장을 잡고 제대로 흔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좀 가지.”
한숨처럼 흘러나온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태령은 생각했다. 이미 늦었다고. 가슴 안에서, 봇물 터지듯이 감정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싫어.”
그 한마디에 남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섭도록 낮게 가라앉은 눈빛이 불길처럼 뜨겁다.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태령은 다시 한번 말했다.
“안 갈 거라구요.”
못되고 냉정하게 굴면서도 마지막엔 늘 배려해주는 남편을 기억한다. 무심한 척 편들어주고, 민망할까 봐 못 먹는 요구르트도 같이 마셔주고. 정말 힘들 땐 품도 내어주고, 마지막은 늘 그렇게 맞춰주고 져주는 당신을. 그런데 내가 왜 도망가. 오늘도 결국 당신은 내게 그럴 텐데.
“뭐든지 해줄 테니까, 우선 일어나서 걸어봐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커다란 몸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기대어 왔다. 남편을 악착같이 부축해서 방에 들어오는 것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불을 켤 여유도 없이 침실로 바로 직행했다. 예전에 한 번 와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 만큼. 풀썩-. 널찍한 침대에 남편을 내동댕이치는 순간 덩달아 태령도 같이 내동댕이쳐졌다. 제 몸도 못 가누던 남편이 태령을 품에 끌어안은 바람에.
“……!”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묻혔다. 짙은 체취와 강렬한 심장박동 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황해서 일어나려던 태령의 몸은 남편의 품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듯 안겼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그대로 몸이 회전했다. 이젠 태령이 아래, 남편이 위. 천천히 내려오는 아찔한 얼굴을 올려다보는 태령의 눈동자가 떨린다.
“난 분명 경고했고.”
지독히도 허스키한 음성을 쏟아내는 젖은 입술이 귓가에 바짝 붙었다.
“그런데도 뭐든 해준다고 한 건 태령 씨고.”
뺨을 데우며 가까워지는 숨결이 느리고 느리다. 지금이라도 피하고 싶으면 피하라는 듯이.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어요.”
같이 있자는 의미를 모를 만큼 태령도 어리숙하지 않다. 피해야 한다는 것쯤도 안다. 이 남잔 취했으니까, 기억을 못 하면 의미도 없으니까. 피하려면 피할 수 있고 잡을 남자가 아니란 것도 알고.
“싫으면, 문은 저쪽.”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 절제된 욕망이 느껴지는 더운 숨. 닿지 않으려고 침대를 짚고 있는 단단한 팔. 남편이 또다시 준 마지막 기회에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안다. 이렇게 취한 남편은 또 기억을 못 할 테니까. 분명 계획에 어긋나는 짓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태령은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탈, 비겁한 현실도피. 나는 왜 하면 안 돼. 이 남자를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 하루 욕심내는 것뿐인데. 그것도 안 된다면 나한테 너무 가혹하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합리화를 끝낸 태령은 떨리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나 안 가요.”
몇 번을 말해.
“싫지 않다구요.”
몇 번을 고백하고. 옅은 어둠 속에서도 가만히 내려다보는 남편의 눈에 차오르는 열감이 느껴졌다. 그 열감이 고스란히 번져와 태령을 대담하게 했다. 천천히 뻗은 손이 건조하고 날렵한 남편의 뺨을 감싸 끌어내렸다. 유난히 달뜬 날숨이 입술에 닿는 순간 태령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니까…….”
이 밤 날 안아요. 뜨겁게, 오래도록. 하지만 태령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갑자기 부딪쳐온 남편의 입술이 모조리 집어삼켜버렸다. 절절한 속삭임도, 떨리는 숨결도, 부드러운 입술도. 또르륵,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태령의 감은 눈꼬리를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어둠이 이 눈물을, 이 마음을, 제발 숨겨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