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유혹한 거 맞는데.2021.07.08.
“어제 전화로 했던 말 다시 해보렴.”
알리샤 앞에 우아한 자태로 앉은 조 여사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독일 좀 다녀오고 싶어.”
“……다시.”
“독일 가고 싶다고.”
“……다시.”
“나 독일 갈 거야.”
“……다시.”
조 여사가 똑같은 말을 태연히 반복할 때마다 알리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독일 갈…… 악!”
갑자기 일어난 조 여사가 클러치로 알리샤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정신 못 차려, 이것아! 몸 아픈 게 뭐 대수라고 이리 한심하게 굴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결국 알리샤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울먹이며 대들었다.
“흐윽, 말은 똑바로 해! 엄만 날 키운 게 아니라, 흑! 사육한 거잖아! 엄마 입맛에 맞게, 취향에 맞게!”
“뒷감당할 자신 없으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렴.”
조 여사의 섬뜩한 눈빛에 알리샤는 후다닥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애초에 엄마를 이기려고 했던 게 판단 미스였다. 차라리 사정을 하는 게 통할지도 몰라.
“나 지금까지 엄마가 시킨 거 독하게 다 했어.”
“…….”
“전교 1등 놓친 적 없고 외모에 몸매, 몸무게 뒷자리 수까지 완벽하게 관리했잖아. 엄마가 원하는 명문대도 보란 듯이 졸업했고. 한신 후계자랑 선도 잘 봤잖아.”
“…….”
“30년 동안 엄마 꼭두각시 노릇 잘 했다구. 그러니까 이제 나 좀 놔주면 안 돼?”
제발. 하지만 딸의 간절한 부탁에도 조 여사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구질구질한 사랑이라도 해보겠다는 거야? 뼛속까지 사치에 찌든 네가 무슨. 자살해서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놈이랑 뭘 하겠다고.”
알리샤에게 엄마는 늘 무섭고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그러했다. 허경수를 만나면서도 다른 남자를 계속 만난 건 조 여사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흔적을 남기지 말 것, 한 남자와 길게 만나지 말 것. 귀국을 지시하면 바로 와서 조영희의 딸로 최선을 다할 것. 그게 독일에서 알리샤 바튼이란 이름으로 자유를 누리는 조건이었으니까.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그 남자가 복수하려고 나랑 결혼한 것도 알고 있어?”
“알면 어쩔 거니?”
“엄마!”
“이 멍청한 것아! 서강준은 네가 알리샤 바튼이란 걸 몰라. 안다고 해도 복수는 무슨.”
그 남잔 의심하고 있어, 그 애가 그렇게 말했다구! 하지만 알리샤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애와 몰래 만나서 의논한 걸 조 여사가 알면 난리 칠 테니까.
“네 흔적은 내가 깨끗이 지웠어. 고작 해봤자 의심이고 그깟 의심으로 뭘 할 건데.”
무서워서 벌벌 떠는 딸을 보며 조 여사는 혀를 찼다.
“머리로 생각이란 걸 좀 하렴. 한신의 후계자가 그깟 사생아 자식 복수하려고 결혼을 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맹랑한 것이 딸과 서강준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치밀한 성격인지라 흘려듣지 않고 바로 뒷조사를 시켜서 알아냈다. 하지만 서강준에게 허경수는 충실하고 일 잘하는 비서일 뿐이었다. 죽음 앞에서 태연했고 원래 패턴대로 잘 지내며 시체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지금 하는 걸 봐도 복수를 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맹랑한 것이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순종적이고 조신한 여자가 취향인 건지. 어찌 되었든 서강준은 아내에게 꽤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싸고돌며 방패 노릇을 해주지. 처음엔 그게 불안했지만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독일 가고 싶으면 갔다 오렴. 1년 정도 머리 식히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알리샤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바로 제자리로 보낼 생각은 안 했어. 공백기를 좀 가져야 아내가 바뀐 것도 눈치 못 채지. 내가 미리 작업해놨으니 넌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조 여사는 둘의 감정이 더 차오르면 그때 업무를 핑계로 모든 걸 되돌릴 계획이었다. 한신 후계자 절차를 밟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서강준이다. 그 냉철한 성격에 스케줄까지 취소하며 외국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갈 리도 없을 테고. 1년 정도면 적당하겠지. 미묘하게 달라진 변화를 의심 못 할, 애틋한 감정이 식기 전, 약간의 변화를 신선함으로 받아들일, 적당한 공백.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하면서 조 여사는 딸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한신은 경쟁 구도 없이 서강준이 유일한 후계자야. 차분히 잘 버티면 네가 이노의 사모가 되는 건 시간 문제고.”
아들만 셋인, 주변 친척들까지 죄다 달려드는, 이노의 경쟁 구도와는 전혀 다른 확고한 자리.
“손이 귀한 집안이라 증손주 하나만 낳아주면 회장님이 네가 달라는 건 다 줄 거다.”
재계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손자가 태어나자마자 한신 서 회장이 후계자로 선언하고 경쟁 구도를 바로 정리한 건. 손자를 낳아준 며느리 앞으로 잘 나가는 한신 계열사 한 곳의 주식을 몰아준 것도. 며느리 집안에 막대하게 쏟아부은 재력도.
“엄만 도대체 어디까지 욕심내는 거야? 아니, 날 언제까지 이용할 셈이야? 아이만 낳으면 된다며! 아니, 몇 년만 버티면 된다고 했잖아! 왜 말이 틀려?”
그 손을 뿌리치는 알리샤의 앙상한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껏 부모덕 봤으니 이젠 죽을 때까지 효도해야지, 우리 딸?”
“싫어! 안 해! 죽어도 싫어!”
하지만 조 여사는 태연하게 일어나서 우아하게 웃었다.
“싫으면 안 해도 된단다. 대신, 지금 당장 다 내려놓고 병원을 나가렴.”
모든 지원을 당장 끊겠다는 의미였다. 하다못해 병원비조차도.
“기꺼이 호적에서 파줄 테니.”
조 여사는 자신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 태령은 떨리는 눈동자로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했다. 과감하게 몸을 노출해주는 디자인의 실크 슬립. 검은 슬립 때문에 더욱 도드라지는 우유처럼 뽀얀 피부. 늘 높이 묶어 올렸던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었다. 조금이라도 드러난 피부를 가려주길 바라면서.
“하아,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태령은 일주일 내내 나름대로 열심히 시그널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 방면에 재주가 없는 건지, 이 남자가 둔한 건지, 아니면 금욕적인 건지. 늘 태연하고 뻔뻔하던 남자가 눈이 마주치면 피하고 손끝이라도 닿으면 질색한다. 그런데 어떻게 유혹을 하고 같이 자자는 말을 해.
“오늘은 성공해야 하는데.”
한숨처럼 중얼거린 태령은 1층 침실로 향했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뛴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마저 예민하게 느껴진다. 침실에 꼿꼿한 자세로 얼마나 서 있었을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 옆 복도로 향하자 파우더 룸 앞에 강준이 있었다. 이마에서 찰랑거리는 물기 젖은 머리칼. 검은 머리칼 사이를 관통하는 짙고 위험한 눈. 슬림한 근육으로 다져진 아찔한 상체. 골반에 아슬하게 두르고 있는 타월. 누가 유혹을 하고 누가 유혹을 당하는 건지, 혼란만 잔뜩 주는 모습으로. 태령을 조금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
“…….”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는 눈빛에 뜨거운 기운이 몸 안에서 번졌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남편에게 어떻게 비칠지. 하지만 남편보다 태령이 더 낯설다. 지금 이 모습도, 어설픈 유혹도. 떨리는 눈을 내리깔며 태령은 천천히 남편에게 다가갔다.
“여기 앉을래요? 머리 말려줄게요.”
“갑자기?”
잘 다듬어진 남편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올라섰다.
“항상 안 말리니까,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얌전하게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하필 거울을 등지고 앉아 태령을 가만히 바라본다. 머리 안 말려주고 뭐 하냐고 채근하는 듯한 눈빛으로, 두 다리 사이를 벌리고선. 입술을 깨물면서 남편의 다리 사이에 선 태령은 드라이기를 들었다. 그런데 마주 보는 자세라서 하필 남편의 눈높이가 태령의 가슴 부근이었다. 무심하면서도 미묘한 열감을 품은 눈이 심장에 창처럼 박히는 기분이었다. 쿵쿵, 고막을 울리는 이 심장 소리가 남편에게 들리지 않기를.
“오늘 태령 씨, 좀 낯선 거 알아요?”
부드러운 숨결이 드러난 살결을 어루만지듯 간지럽힌다. 그만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입술을 꾹 깨문 태령은 말없이 남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사실 태령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오고 재회하고 같이 살게 되었다. 방어하고 경계하고 독하게 버텼는데도 결국 이렇게. 거지 같은 이 상황에, 사랑은 사치인 이 처지에, 남편을 가슴에 품어버렸다.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고 욕심내선 안 되는 남자인데. 그래서 태령은 사랑도 안 할 생각이고 욕심도 안 낼 생각이다. 하지만 이 결혼이 잘되는 꼴도 못 보겠다. 그래서 뒤늦게 또 다른 복수를 계획했다. 조 여사가 이 결혼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마지막 목표가 뭔지 아니까.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간 후, 남편이 이 결혼을 깨주길 바라며.
“내가 또 오해할 것 같은데.”
느릿한 음성이 나른하게 귓바퀴를 훑었다. 커다란 손이 가는 허리를 천천히 당겨 안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태령 씨가 날 유혹하는 것 같다고.”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검은 눈이 속내를 읽으려는 듯 빤히 올려다본다. 다 알면서도 묻는 것 같은 여유와 자신감이 넘치는 눈동자가 얄밉다. 그런데도 허리를 감은 팔과 밀착된 단단한 몸의 열기가 뜨겁다. 드디어 유혹이 통한 걸까.
떨리는 숨을 꼴깍 삼킨 태령은 긴장과 간절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남편을 보았다. 유혹이란 걸 알면 어떻게 좀 해줘요, 제발. 야릇한 긴장감 때문인지 가녀린 몸이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감당 못 할 거면 건들지 말라고 경고한 것 같은데.”
느릿하게 말을 한 남편이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고 천천히 일어났다.
“먼저 자요, 바람 좀 쐬고 와야겠으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침실을 나가버렸다. 차라리 공부가 쉽고 일하는 게 쉽고 조 여사를 상대하는 게 낫지. 지금 태령에게 가장 어려운 건 바로 남편 유혹하기였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침대로 와 털썩 앉으며 태령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유혹한 거 맞는데.”
***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강준은 인상을 팍 썼다. 잔뜩 달구어진 몸을 식혀야겠는데, 오늘따라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또 샤워한다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혼하고 싶다는 속삭임을 흘린 후로, 늘 경계하고 벽을 세우던 아내가 달라졌다. 어설픈 유혹의 눈빛을 보내고 살금살금 스킨십도 해오고. 오늘은 늘 입던 단정한 잠옷 대신 아찔한 슬립 차림으로 머리까지 풀었다. 마치 강준을 대놓고 유혹하려는 것처럼. 사람 돌아버리게. 눈앞의 뽀얀 살결에, 다디단 살 냄새에 하마터면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 품에 안긴 아내가 몸을 떨지 않았다면.
“하아.”
답답함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내 잘 연기해오다가 왜 갑자기 청개구리처럼 구는 건지. 알리샤 바튼의 본색을 드러내는 건지. 그런데 그 유혹조차 강준에겐 억지로 하는 것처럼 아내는 참아내고 있었다. 좋아죽겠다고 입 맞추질 말든지. 입안은 쓰고 자꾸만 헛웃음이 터졌다.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하지.”
이혼하고 싶다고.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 비참하게 하지 말고.
“사람 더 미치게 하지 말고.”
강준도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을 질질 끌어봤자 답이 없다는 것을. 아내를 보고 있으면 경수가 떠오르면서 감정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양심의 가책이 뜨겁게 고개를 들이밀며 속삭였다. 동생의 여자와 뭘 하려는 거냐고. 이젠 첫사랑이 되어버린 여자에게 복수도 할 거면서. 그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고 보지 말라고. 지금 강준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대단해, 유태령.”
자신을 잔뜩 흔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기어이 이혼까지 끌어낸 걸 보면. 하지만 이혼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아내에게 흔들릴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아내는 유태령도 아니고 알리샤 바튼도 아닐 거라는. 그건 가슴 아래 있다는 쌍둥이 홍점을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어떻게 확인을 한다.”
샤워할 때나 옷을 갈아입을 때 불쑥 문을 열면 변태로 보일 테고. 벗어보라고 하면 쓰레기 같고. 자연스러운 잠자리밖에 답이 없었다. 이혼을 원하는 아내가 오늘처럼 어설픈 유혹을 해올 때. 알리샤가 맞다면 어떻게든 멈추겠지. 동생의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잠자리까지 할 만큼 쓰레기는 아니니까. 그다음은 당연히.
“……이혼이겠지.”
하지만 희박한 확률로 홍점이 없다면. 아내가 알리샤도 유태령도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느리게 감았다 뜬 눈꺼풀 아래 드러난 검은 눈동자에서 강한 빛이 섬광처럼 뻗어 나왔다.
“절대 가만 안 둬.”
뜨거운 이 욕망도, 짓밟아 구겨 넣은 이 감정도. 그 밤, 마음껏 폭발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