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네가 나 대신 그 남자랑 자.2021.07.04.
어쩌지. 어떡해. 어떡하냐구!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이젠 물어뜯을 손톱조차 없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난 알리샤의 눈가에 핏발이 가득했다. 허경수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죽었다는 말에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저도 모르게 삶을 포기할 뻔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네 사랑은 날 감당하겠지만 네 능력은 날 감당 못 하니까. 그렇게 날 사랑하면 죽을 각오로 기다렸어야지. 늘 내 마음을 들여다본 네가 왜 그건 못 본 건데. 바보 등신, 멍청이. 허경수는 이 결혼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갈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일이 틀어지면 화를 낼 조 여사도 무섭지만 복수를 마음먹은 그 남자가 미치도록 두려웠다. 엄마도 견뎌내는 독한 계집애가 오죽하면 힘들다는 말까지 했을까.
“난 못 해. 절대 감당 못 해.”
이 결혼도, 그 남자도. 제자리에 돌아갈 상상만으로도 알리샤는 몸이 덜덜 떨렸다. 한국에서 단 두 번 보았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배경, 재력, 스펙, 외모, 성격, 모든 게 너무 완벽해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이노그룹도 쓸어버릴 잔인한 남자가. 엄마에게 털어놓았다간 모두 네 탓이라고 오히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그 애였다. 시궁창에서도 잘 견뎌내는, 뼛속까지 영악하고 독한 계집애.
“언니, 저 왔어요.”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고 그 애가 들어왔다. 제 몸을 올라타고 제압해서 반말하며 협박한 주제에. 지금은 또 순한 양처럼 구는 모습이 역겨웠다. 분명 자신과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할 텐데도 여전히 생기 넘치고 예쁜 모습도.
“왜 이제 와!”
“차가 좀 막혔어요.”
그 애의 단정한 얼굴과 너무도 태연한 대답에 알리샤는 속이 뒤집혔다. 그 남자의 의심을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무서웠는데! 마음 같아선 따지고 싶지만,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기에 최대한 차분히 물었다.
“네가 그때 했던 말 확실해? 그 남자가 확신하는 게 아니라 의심한다는 거.”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꾸 언니 뒤를 캐고 저를 떠보듯이 이것저것 캐묻죠.”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태령은 이젠 싫다. 아내가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 못 하는 남편이. 그건 곧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 남편이 이 결혼을 유지할 거란 의미니까.
“어떻게 하면 그 남자가 날 의심 안 하고 복수를 관둘지 네가 말해 봐.”
“그건 이모랑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미쳤어? 그걸 말했다가 무슨 꼴 나라고!”
알리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조 여사가 아니다 싶으면 딸까지 버릴 여자라는 걸.
“그럼 저처럼 연기하면서 아닌 척 버티는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 언니 자리로 돌아오면 몸으로도 연기하구요.”
그럼 더 가증스럽게 생각하겠지. 남편에겐 이미 허경수를 안다고 인정한 걸 알리샤는 모르니까.
“저는 일을 핑계로 잘 피하고 있지만, 언닌 잠자리도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이 정도면 알아들을 법한데. 알리샤는 아직도 눈치를 못 챈 듯 커다란 눈만 깜빡거린다.
“침대에서도 순진한 척 굴라는 뜻이에요. 그럼 강준 씨가 의심을 접을지 누가 알아요?”
독일에서 알리샤 바튼의 남성 편력은 유명했으니까. 그제야 감이 잡혔는지 알리샤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지만 태령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알리샤가 먼저 말하기를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너 지금까지 남자랑 키스는커녕 손도 안 잡아봤지?”
“……손은 잡아봤는데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조금은 부끄럽게 대답하는 태령의 손을 알리샤가 덥석 잡았다.
“네가 나 대신 그 남자랑 자. 그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어?”
태령은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임신해서 애까지 낳으면 더 좋고. 한신은 손이 귀하다던데 자기 아일 임신한 아내를 남편이 미워할 리 없잖아. 그치? 난 의심을 지워서 좋고 너는…….”
임신에 아이까진 너무 나간 것 같지만. 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걸 보면 모녀가 정말 쌍으로 못됐다.
“얼마를 원해?”
태령은 대답 대신 알리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목적은 돈도 서강준도 아니니까. 남편에게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내가 알리샤도 유태령도 아닌 전혀 다른 여자라는. 알리샤처럼 멍청하지 않은 이상, 남편은 그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 결론을 끌어내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그럼 남편 쪽에서 이 결혼을 먼저 깰 것이다. 자신을 찾으려고 하면 머리가 좀 아프겠지만 그건 희박한 확률이니까. 어른들에게 왈가왈부 고자질할 남자가 아니니 조 여사도 의심 안 할 것이다. 알리샤는 공범이니 말 못 할 테고.
“이모가 강준 씨한테 손끝 하나 대지 말랬어요. 잠자리도 그렇고 아이까지 임신하면 이모가 절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
조 여사는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제 동생이 한 짓을 그 딸이 똑같이 했으니까. 그것도 자신의 딸에게.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 둘이 비밀로 할 텐데 엄마가 어떻게 알아? 임신하고 나면 이미 게임 끝인데.”
“우리 둘만 알고 이모한테 비밀로 하자구요?”
“당연한 거 아니야?”
태령의 또 다른 목적이었다. 조 여사가 모르는 비밀을 만들어서 모녀 사이를 벌려놓는 것.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언닌 나한테 뭘 해줄 건데요?”
“남편과 자주면 3억, 아이까지 낳으면 10억. 분에 넘치는 거래지?”
“언니한테 그만한 여유자금 없잖아요.”
사치스러운 알리샤를 움켜쥔 조 여사의 유일한 무기가 바로 돈줄이었다.
“이노패션 주식 꽤 올랐다며? 내 몫 주식 다 팔면 그 정도는 충분히 나올걸?”
“난 원래 사람 말 안 믿어요. 그러니까 계약서로 적어줘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태령은 브리프 케이프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 집무실에서 윤 실장이 보고를 했다.
“인도네시아 기업부 장관과 투자청장이 전용기로 내일 오전 중에 서울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야트 호텔 루비 컨벤션 홀 오후 2시로 미팅 잡아놨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이 주력하는 전기자동차의 판매를 좌지우지하는 게 바로 배터리다. 독일과 중국이 사업적인 협약을 진행하는 동안 강준은 인도네시아를 꾸준히 공략해왔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 공장 설립 계획을 코앞에 둔 지금. 광산업까지 연관된 이 사업에 인도네시아 대통령까지 적극 지지를 하고 나섰다. 경수와 함께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지금 그 녀석은 죽고 없지만.
“네가 살아 있었다면 날 비웃었겠지.”
동생은 복수를 부탁했는데 정작 자신은 그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으니. 미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고 밀어낸 건 오히려 아내였다. 그래서 강준도 이 마음을 끊어내려 했다. 이 감정이 더 깊고 날카롭게 심장에 박히기 전에. 그런데 아내가 또다시 그를 흔들어버렸다. 하루 내내 집요할 만큼 그의 머릿속에 잔류하면서 끊임없이.
‘나는 당신이 미워요. 그것도 아주 많이.’
입으론 밉다면서 애틋하게 얼굴을 어루만지고.
‘그런데도 좋아. 서강준 당신이 좋아 죽겠다구.’
그 입으로 좋아죽겠다고 고백하고.
‘당신에게 키스할 거니까.’
너무도 선명했다. 떨리는 입술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던 어젯밤의 아내가. 부드러운 감촉과 다디단 향기와 떨리는 속삭임이. 서로의 심장을 움켜쥐었던, 마음까지 얽혀버렸던, 숨 막히고 애틋했던 그 순간이. 하지만 강준은 그 순간조차 취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떨리는 입술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서.
“도대체 뭐지.”
아내가 끝끝내 가면을 벗지 못하도록 하는 게. 집에 도착해서 속을 게워내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술이 반쯤은 깼다. 정신이 좀 맑아지니 침대에 누워서 또 고민했다. 내일부터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나를, 그리고 너를. 그런데 강준이 잠이 든 줄 안 아내는 또다시 그에게 고백을 해왔다.
‘난 당신이 6개월 후에 이혼해주면 좋겠어요.’
좋다고 고백하고 키스까지 해놓고, 이혼해달라니. 아내를 떠올릴수록 강준은 늪에 서서히 잠기는 아득한 기분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거부를 할 게 뻔하고. 좋다고 다가가면 거부할 게 뻔하니 못 하겠고. 차갑게 굴면 상처받은 눈을 할 게 뻔하고, 그건 또 못 보겠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그때 사적인 용도의 핸드폰이 울렸다.
“보고해요.”
다른 사람이라는 가정 하에 아내의 뒷조사를 의뢰했던 사설탐정이었다. 그는 작은 가능성도 무시하지 않았고 그래서 몇 가지를 추가로 알아냈다고 했다. 통화를 끝낸 강준은 통유리창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위가 안 좋아서 병원을 방문했고 조직검사 권유까지 받았다…….”
훅 불면 날아갈 몸으로 다이어트를 한다고 음식을 멀리한 이유가 그래서였나. 이건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탐정의 다음 말을 떠올린 강준은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오른쪽 가슴 바로 밑에 쌍둥이 홍점이 있다더군요. 알리샤가 만난 남자들 중 열 명 모두 같은 증언을 했으니 확실합니다.’
누가 탐정 아니랄까 봐, 지나치게 깊이 파고든 것 같아서. 아내의 몸을 다른 남자가 보고 만졌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진다.
“붉은 점은 못 본 것 같은데.”
등에 연고를 발라줄 때 아내가 돌아섰고 반쯤 헐벗은 모습을 보긴 했다. 그땐 너무 당황해서 뭘 보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흐렸다. 어찌 되었든, 이것도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지. *** 왜 늘 타이밍이 이럴까. 태령이 침실에 들어오니 남편도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분명 나보다 먼저 샤워하고 있었는데 왜 이제 나오는 건지. 여자보다 샤워를 더 오래 하는 남편의 문제인 것 같다.
“샤워하고 있길래 인사를 못 하고 2층으로 올라갔어요.”
눈을 내리깔며 태령이 조심히 입을 열자 남편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도 눈 호강하라고 남편은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모습에 남편을 볼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특히 오늘은 알리샤와 나눈 대화가 자꾸만 떠올라서 그 증상이 더 심했다. 얼굴에서 열이 나고 심장은 두근거리고.
“오늘도 일이 많았나 봐요.”
남편이 예의상 건넨 말에 태령도 예의상 대답했다.
“늘 똑같죠, 뭐.”
알리샤의 입에서 남편과 자달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남편을 보니 자신의 판단 미스였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헐벗은 상체만 봐도 이 정도인데 저 남자랑 어떻게 잠을 자.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큰 문제는 같이 자자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였다. 이 방면에선 알리샤가 자신보다 나으니 유혹의 기술이라도 전수해달라고 할까. 아니면, 이 계획은 그냥 수정할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을 쉬며 태령은 남편을 보았다. 그런데 남편도 생각에 잠긴 얼굴로 태령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얼굴이 아닌 좀 더 아래 어딘가를. 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거지? 그 시선을 따라가려는데 남편의 눈이 천천히 올라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태령은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쌌고 강준은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렸다.
“…….”
“…….”
침실에서 마주칠 때면 태령은 늘 그랬었다. 얼굴을 붉히고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심장은 괜히 두근거리고. 그럴 때마다 더 빤히 바라보며 민망하게 하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왜 저러지? 오늘따라 침실 분위기가 미묘하고 야릇하게 느껴졌다. 은은한 조명이 번진 침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그 바람에 일렁이는 새하얀 커튼. 적당히 달아오른 침실의 공기와 넓고 푹신한 침대까지.
‘네가 나 대신 그 남자랑 자.’
알리샤의 말이 떠오르자 태령은 시트를 가슴까지 끌어올리며 남편을 등지고 누웠다. 처음으로 느낀 열감에 얼굴에 손부채질까지 하면서. 왠지 잠을 설칠 것 같은 밤, 남편이 인사를 해왔다.
“잘 자요, 태령 씨.”
“……강준 씨도요.”
미묘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 속, 침실 불이 꺼졌다. 아내를 등지고 누운 강준도 잠이 안 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보자마자 시선이 무심코 얼굴 아래로 내려갔던 것 같다. 아내의 가슴 아래 쌍둥이 홍점이 있나 없나 궁금한 마음에. 분명 건전한 마음으로 바라본 거였다. 그런데 시선을 오래 둘수록 서서히 열이 오르면서 근육이 뻐근해졌다. 하필 그때 아내와 눈이 마주쳤고 침대에 누우니 증상은 더 심해졌다. 처음 겪어본 신체적인 증상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뭔지 알 것 같았다. 편히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강준은 간절히 바랐다. 오늘 밤은 제발 아내가 품을 파고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