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오늘은 우리 안고 자요.2021.07.01.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빨려 들어가는 순간, 비스듬히 내리뜬 남편과 눈이 마주친 순간. 태령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뜨겁고 다정한 입술이, 취기가 짙은 숨결이, 고요한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들었다. 키스는 태령이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남편이 리드하고 있었다. 어르듯이 달래듯이 조심스럽게 파고들어 할딱거리는 숨까지 모조리 앗아가면서. 고요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남편이 버거워서 얼굴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뒷목을 감싸고 지그시 압박감을 높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한껏 벌어졌다.
“으음.”
더 깊숙이 파고드는 감각에 메마른 뺨을 감싸고 있던 작은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단단한 어깨에 잠시 머물렀던 손이 슈트 깃을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머릿속에서, 가슴에서, 온몸에서, 쿵쿵 뜨거운 메아리가 울린다. 이 남잘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욕심나고 질투 나고 갖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고. ……어떡해. 꾸역꾸역 외면했던 감정들이 폭발한 순간, 태령은 고개를 틀어버렸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입술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충분해요.”
더는 안 된다. 마음도 이렇게 원하는데 몸까지 이 남잘 원하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잖아.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해요.
“부족해.”
하지만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편이 다시 입술을 부딪쳐왔다.
“싫어요.”
어깨를 밀어내며 피하려는 태령의 입술 위에서 남편이 달래듯이 말했다.
“……꿈이라며.”
그러니까 해도 되잖아. 남편의 다음 말은 태령의 입안으로 녹아들었다. 뜨거운 입술이 맞물리고 더운 숨이 입안으로 번지고. 남편이 또다시 뜨겁게 밀려든다. 아릿하게 가슴을 파고들고, 빠듯하게 머리를 채우며, 온몸의 세포들을 일깨우며. 그때 주차장을 울리는 굉음에 태령은 가까스로 남편의 품에서 벗어났다. 미쳤어, 어떻게 공공장소에서!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령을 남편이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리 와요.”
남편의 품에 안겨 강렬한 심장 소리를 듣자 서서히 진정이 된다. 정말 싫다. 이 품에서 안심하고 쉴 수 있는 내가. 차의 시동이 꺼지고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게 등장한 낯선 이가 그렇게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다.
“박경진? 장재우? 니들 거기 숨어서 뭐 하냐?”
익숙한 이름이 귀에 들리기 전까진. 입구에서 남자들끼리 얼마간의 대화가 이어진 후 끊겼다. 조심히 얼굴을 들자 남편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태령은 일어나서 입구로 향했다.
“두 분 숨지 말고 나와요.”
차분한 음성에 두 남자가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지켜봤어요?”
서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찌르더니 결국은 재우가 총대를 짊어졌다.
“음, 아까 그 여자분이 화낼 때부터?”
다 봤다는 소리다. 태령이 눈을 가늘게 뜨자 재우가 기겁하며 변명을 했다.
“강준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찾으러 나온 겁니다! 직원 말이 강준이가 많이 취해서 나갔는데 어떤 숙녀분이 따라갔다고 해서.”
“…….”
“강준이 노리는 여자들이 워낙 많아서요. 그래서 강준일 구출해서 태령 씨한테 바치려고 했다면 믿어주실까요?”
두 남자가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믿어달라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령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저랑 강준 씨가 키스하는 것도 다 봤겠네요.”
두 남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 마이 갓, 맙소사. 역시 유태령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입술 대신 표정으로 온갖 말들을 쏟아내는 두 사람에게 태령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본 거 강준 씨한테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두 분만 모른 척해주면 강준 씬 기억 못 할 테니까.”
“강준이가 기억을 못 한다니요?”
그러자 경진이 조심히 물어왔다.
“오늘처럼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겨요.”
두 남자의 미묘한 표정을 읽은 태령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는 경진 대신 재우가 얼른 대답했다.
“맞습니다! 강준이가 비밀로 해주래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이미 알고 계셨구나.”
“태령 씨도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워낙 빈틈없는 녀석이라 쪽팔려할 것 같은데.”
그제야 태령은 다시 차분히 물었다.
“전 당연히 비밀로 할 거예요. 그럼 두 분도 제 부탁 들어주시는 거죠?”
“누구 부탁이라고 감히 거절할까요? 저희는 강준이가 아니라 태령 씨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연락을 드렸고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겁니다”
“암, 그럼요!”
재우의 말에 경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더 부탁드릴게요. 강준 씨 좀 차에 태워주실 수 있을까요?”
태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남자는 이미 강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188센티에 78킬로의 강준이 추욱 늘어지니, 두 남자도 끙끙거리며 겨우 조수석에 태웠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태령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훅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냘픈 여자가 롤스로이스 컬리넌을 매끄럽게 몰고 사라졌다. 그제야 경진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재우, 서강준 저 새끼가 술 마시고 필름 끊길 놈이냐?”
“당연히 아니지. 화생방 독가스도 이겨낸 독종 새끼가 알코올에 굴복했으려고.”
“새끼, 쓸데없는 연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연기도 할 줄 아네.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곧이어 대화는 끊겼지만 두 남자는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둘이 좋아죽는 게 보이는데 왜 시간 낭비를 하는 건지. 사랑이 어려운 건지, 결혼이 어려운 건지.
*** 늦은 밤이 되어서야 화보 촬영이 끝났다. 식스팩을 위해 하루종일 물 한 잔 마시지 않은 공복에 중간중간 푸시업까지 했다. 그런데도 스튜디오 안을 누비며 인사를 일일이 건네는 진우의 표정은 해맑았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부드럽게 웨이브가 진 다갈색 머리칼. 한쪽만 쌍꺼풀이 진 길쭉한 눈매와 오뚝 솟은 콧날, 시원스러운 입매. 웃을 때마다 움푹 패는 보조개와 부드러운 눈웃음. 국민 댕댕이라는 별명을 가져온 진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선배님, 같이 촬영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진우의 인사에 광고를 같이 촬영한 서진이 생긋 웃었다. 국내 탑 3위 안에 드는 명품 모델답게 서늘한 페이스와 관리가 잘된 몸매가 아찔하다. 그런 서진마저도 진우의 멍뭉미한 매력 앞에선 무기력했다.
“진우 씨.”
돌아서려는데 서진이 불러세웠다.
“나 30분 정도 여유 있는데 커피 한잔할래?”
“제가 바로 이동해야 하는데 눈물 나도록 아쉬워서 어떡하죠? 대신 선배님이 말씀하신 그 커피, 제 심장에 킵 완료! 다음에 시간 되면 제가 커피 말고 다른 걸로 한 턱 크게 쏠게요!”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손 하트까지 날리니 천하의 정서진도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럼 연락처……?”
“어?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말과 달리 다른 감독에게 인사를 하러 돌아서는 진우의 표정에 아쉬움은 조금도 없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밴에 오르자 그제야 피곤함을 드러냈다.
“하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그런데도 핸드폰 사진을 바라보는 진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 꼬맹이 딱 기다려. 오빠 지금 돈 왕창 벌고 있으니까.”
활짝 웃는 동생 옆에 있는 무표정한 소녀를 진우는 13년째 짝사랑 중이었다. 돈밖에 모르는 독기로 똘똘 뭉친 꼬맹이가 뭐 좋다고. 늦게 시작한 첫사랑인 만큼 진우는 조심스럽고 서툴렀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책임감 있게 고백하려고 꾹 참았더니, 나라에서 군대를 가란다. 기다려 달라고 하면 염치없을 것 같아, 제대 후에 고백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꼬맹이가 잘나가는 쇼핑몰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진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쪼그만 게 사업 수완이 왜 이렇게 좋아서는.”
과열된 온라인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데, 월 순이익이 5백만 원이 넘는다 했다. 그러니 또 고백을 미룰 수밖에. 사나이 자존심에 짝사랑하는 여자보단 많이 벌어야 고백할 거 아닌가. 하지만 진우가 감히 따라잡을 수 없게 꼬맹이 수익은 해년마다 뛰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꼴이었다. 최근에 모델 일이 잘 풀려서 고백 좀 해볼까 했더니 이번엔 꼬맹이가 사라졌다. 진경을 다그쳐도 개인 사정이라는 말만 해대니, 미칠 노릇이었는데. 최근에 꼬맹이와 비슷한 여잘 두 번 보았다.
“아무리 봐도 내 꼬맹인데.”
스타일은 달라져도 꼬맹이 특유의 분위기는 변하지 않으니까. 패션쇼 뒤풀이에서 보았던 그 여잘 또 본 건 이노패션 로비였다. 그 여자는 세련된 스타일의 여자들 틈에 있었고 매니저가 비서팀이라고 넌지시 귀띔해줬다.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싶다는 핑계로 비서실에 겨우 입성했는데. 갑자기 등장한 뒷테 미남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다시 쫓겨났다. 이제야 시간 여유가 생긴 진우는 복잡했던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자. 이노에서 도라 쇼핑몰을 막대한 자금을 주고 인수할 거라고 했는데.”
갑자기 사라진 꼬맹이와 쓰레기가 될 뻔했던 이노패션 주식이 급등한 시기. 타고난 사업 수완과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 이노패션 비서, 사장의 절대적인 신임. 도라 쇼핑몰을 인수하려는 이노패션. 차례차례 떠올려 보니 보이지 않는 흐름이 서서히 짙어지며 접점이 드러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머리 좋은 꼬맹이의 빅 픽처일지도 모른다는. 이제 남은 건 확인을 위해 이노패션 비서실을 다시 가보는 것뿐.
“김진경, 네가 말 안 해준다고 내가 꼬맹이를 못 찾아낼 줄 아냐?”
난 이미 감 잡았다고. 진우는 씨익 웃었다. *** 집에 도착하자 강준은 제 발로 집에 들어와 욕실로 향했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도움을 거절해서 심장을 몇 번이나 철렁하게 했지만. 남편이 들어간 욕실 문에 태령은 귀를 바짝 대었다. 우당탕 소리라도 나면 당장 뛰어들어갈 생각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어이가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속에 있는 걸 모두 토해낸 후 변기 물을 내리고. 잠시의 정적 후 샤워 부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태령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2층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끝내고 내려오자 남편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조심히 침대 위로 올라간 태령은 남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는 것도 잘생겼어.”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아도 될 것 같아. 잠이 든 남편의 얼굴을 맘껏 구경하던 태령은 피식 웃어버렸다. 술 취했을 때 고백하고 잠들었을 때 훔쳐나 보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태령은 잠이 든 남편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여주었다. 이제 막 생긴 간절한 바람을.
“난 당신이 6개월 후에 이혼해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당신이 알리샤 바튼의 남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질투가 날 만큼 좋은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감히 당신을 욕심 못 내게. 가늘게 한숨을 내쉰 태령이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아 당기고 따스한 체온이 태령을 포옥 감싸왔다.
“당신 몸이 너무 차.”
한숨 같은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이고.
“난 더워죽겠고.”
낮은 중얼거림이 태령의 몸을 울린다.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 안고 자요.”
나른하고 무거운 음성이었다. 술이 덜 깬 건지, 잠에 취한 건지, 잠버릇인지, 술버릇인지. 혼란스러움에 조심히 얼굴을 들자, 남편은 여전히 잠이 든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다. 그게 혼란스러워 태령은 속삭이듯 물었다.
“당신 혹시, 지금도 취했어요?”
“…….”
“강준 씨?”
얇은 눈꺼풀 아래 반쯤 잠긴 새까만 눈동자가 태령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면.”
그 눈이 깊어서 저도 모르게 태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취했다고 합시다.”
태령은 남편에게 얌전히 안겨서 눈만 느리게 깜빡거렸다. 지금 벗어나려고 해서 남편의 잠을 깨우느니, 잠이 든 후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잠들지만 않으면 돼. 그런데 거짓말처럼 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몸이 뿜어내는 온기에, 품이 내어주는 아늑함에. 너무 따뜻하고 편해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남편이 몸을 움직이는 기척에 태령은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하지만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태령을 안아서 원래 자리에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남편의 손길이 조심스러워서. 그때 서툰 손끝이 태령의 머리에 닿았다.
“……!”
어색하지만 다정하게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남편의 손끝에서 미묘한 떨림이 번지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귓가로 묵직한 음성이 잔잔히 스며든다. 한숨처럼, 숨결처럼.
“나도 접으려고 노력 중인데, 그게 잘 안 되네.”
설마 아직도 취중 진담인 걸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꾸는 걸까. 다정한 손끝이 멀어지고 남편이 멀어지고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일어나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는 태령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AM 5:30. 태령이 꿈을 꿀 시간도, 남편이 취해 있을 시간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