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지금 이 순간이, 이 고백이, 이 키스가.2021.06.27.
이노패션까지 15분. 공유받은 일정표엔 아내가 회사에 있을 시간. 강준의 긴 손가락이 부드러운 차의 가죽 시트를 툭툭, 일정하게 두드린다. 외박을 했고 약속을 어겼고 잘못을 했고. 모른 척할까, 사과를 할까.
“이노패션에 잠깐 들릅시다.”
강준의 지시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윤 실장이 곤란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스케줄이 국제 그린 에너지 콘퍼런스였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정책과 다양한 시장 트렌드 및 정보가 공유되는 자립니다. 그러니 제시간에 참석하시는 게…….”
“20분이면 됩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화상으로 지켜보면 놓치는 내용 없을 테고.”
강준이 그 곤란함을 깨끗하게 정리해버리자, 결국 윤 실장도 입을 다물었다. 한신자동차 서강준은 프리 패스. 그게 이노패션 비서실의 비밀스러운 불문율이었다. 이노패션 사옥 9층에 도착하자 막 집무실에서 나오는 아내가 보였다.
“…….”
“…….”
멈추어 서서 강준을 보는 아내의 눈빛이 앙칼지다. 그런데도 강준은 아내에게 태연히 다가갔다. 마주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아내도 지지 않고 강준을 올려다보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앙칼진 눈도, 잔뜩 화난 표정도, 고집스럽게 꾹 다물린 입술도, 죄다 예뻐 보이니. 아니면, 하루 사이에 더 예뻐진 건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강준은 느긋하게 눈앞의 아내를 감상했다. 뻔한 눈빛과 침묵에 아내가 드디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당신…….”
그런데 말을 멈춘 아내가 꽤 놀란 눈으로 강준의 뒤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뒤에 뭐가 있길래, 강준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허리를 파고드는 손길에 이번엔 강준이 놀란 눈을 내렸다. 품에 포옥 안겨든 아내의 행동도 놀랄 일인데 하는 말이 더 놀라웠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강준은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화가 났다는 건지 걱정했다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가. 알다가도 모르는 게 여자라고 생각하며 우선 강준은 아내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내가 더 품을 파고들었다. 안고 있으니까 뭐, 좋긴 하네. 두 사람의 뒤로 들려오는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집무실 복도는 텅텅 비어 있었다. *** 강준은 일부러 맞은 편이 아닌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깊숙이 등을 대고 긴 다리를 교차하며 편히 앉은 강준과 달리 아내는 꼿꼿한 자태였다. 자신의 집무실에서조차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자세는 버릇인 건지, 긴장인 건지. 품에서 빠져나갈 때 발그레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도자기처럼 희다.
“어젯밤 내가 외박 아닌 외박을 했어요.”
오전 내내 신경이 곤두섰던 이유였다. 아내에게 쓰레기만도 못한 남편에 약속까지 안 지키는 남편이 된 것 같아서. 무시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관심도 없는 남편의 외박 따위 아내는 신경도 안 쓸 테니까.
“잘못한 거 인정해요. 약속을 어긴 것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런데도 기어이 찾아와서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화났을지도 모를 아내의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보겠다고.
“고의는 아니었어요. 우리 집 주차장에서, 내 차 뒷좌석에서 잠이 든 거니까. 물론 나 혼자.”
마지막 말엔 넌지시 힘을 주었다. 차에서 이상한 짓을 했다고 오해받기 싫어서였다. 어젯밤 집을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 가는 것도 귀찮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건 더 귀찮고. 차의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할수록 뇌가 아려왔다. 몹쓸 형이 될 각오까지 했었다. 동생의 여자였던 아내를 사랑하게 된 죄책감도 기꺼이 감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차 없이 차였다.
‘난 사랑 같은 건 할 수 없는 여자예요.’
그 말은 곧 강준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 결혼의 목적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니 깔끔하게 접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고 포기가 안 되는지. 어쩌다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아침이고 차 안이었다.
“못 믿겠으면 차 블랙박스 영상 보여주고.”
“아니요, 괜찮아요.”
무심한 듯 빠르게 대답하는 태령의 속마음은 달랐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고 이대로 오해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 외박을 하고 약속을 어긴 남편을 진짜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걱정했다면서. 그럼 봐야지.”
안 봐요, 안 본다구요.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한껏 고집이 들어찬 얼굴을 보더니 남편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걱정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갑자기 밀려드는 피곤함에 태령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차분한 음성에 피곤함이 옅게 뱄다.
“약속 하난 잘 지키는 강준 씨니까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걱정했어요.”
“다른 여자랑 있을까 걱정하진 않았고?”
순간 울컥한 태령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며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들었다. 속을 꿰뚫을 것처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로 남편이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내가 남자로 느껴지긴 합니까?”
“강준 씨는 나에게…… 남자가 아니라 남편이에요.”
적당히 유지하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하는 관계. 그게 맞는 거니까. 그때 눈빛이 돌변한 남편이 덮칠 것처럼 몸을 기울여왔다.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느라 태령의 등이 소파에 닿았다. 하지만 손으로 소파를 짚어서 완전히 눕진 않았다.
“그럼 안기지 말았어야지.”
남편이 짙어진 눈동자 아래 태령을 가두었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로 속삭이며.
“감당할 자신 없으면 흔들지도 말고.”
뜨겁게 예열된 숨결로 태령의 머릿속을 뜨겁게 달궜다. 그런 후에야 남편은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일어났다.
“난 분명 경고했습니다.”
찬바람을 날리며 남편이 사라진 후, 태령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 운동에 미쳐 있는 서강준이 이번 주 내내 운동을 빠졌다. 그것도 기함할 일인데 카페가 아닌 바(BAR)로 노선까지 변경했다. 운동 빠지고 노선 변경하고, 그래 그건 좋다. 하지만 술은 입에도 안 대던 녀석이, 와인 대신 위스키를 시키고, 안주 없이 연달아 드링킹을 하는 건 문제였다.
“대체 뭘까, 서강준이 술을 저렇게 들이붓는 이유가.”
“저 녀석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태령 씨 말고 또 있겠냐.”
재우의 말에 경진이 뻔하다는 듯 대답했다.
“며칠 전에 헬리 강 패션쇼에서 태령 씨 봤는데 완전 멀쩡하던데?”
“와, 너무하네! 나도 태령 씨 때문에 지나랑 헤어졌는데!”
경진이 발끈했다. 처음으로 몇 주 동안 공들인 여자가 모델 윤지나였다. 그런데 패션쇼 뒤풀이로 열린 소규모 파티에서 여자들과 끈적하게 어울리다가 걸린 것이다. 그날 분명 참석자 명단에 지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놀던 그 파티에 윤지나를 데려온 건 태령이었다.
‘지나 씨는 제 동행자로 왔어요. 경진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남편과 저를 만나게 해준 배려에 대한 작은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주세요.’
강준의 귀국 파티에 엿 먹으라고 초대한 일. 그 후 몇몇 파티에서 태령을 볼 때마다 강준에게 보고한 일. 태령이 한꺼번에 되갚아준 셈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 내린다더니. 근데 왜 저 녀석이 아니라 내가 맞냐고.”
잔뜩 억울한 눈빛으로 강준을 노려보는 경진에게 재우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래서 난 앞으로 태령 씨 편이 될까 생각 중이다.”
“아무리 그래도 새끼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우정을 지켜야지!”
“나라고 뭘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아냐? 내가 쪽팔려서 말 안할랬는데…….”
그제야 재우도 태령과의 일을 털어놓았다. 집이 꽤 엄한 편이어서 놀긴 놀되 조용하고 신중하게 놀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재우를 착실한 자식으로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과 있는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태령이 인사를 명목으로 다가왔다. 재우의 행실을 말할 듯 말 듯 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데, 사람 미치는 줄 알았다.
“와, 태령 씨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뒤끝 장난 아니네.”
“이 바닥이 은근히 좁잖냐. 그리고 태령 씨 평판이 꽤 좋더라고. 우리 부모님까지 며느리감으로 탐내더라.”
“맙소사, 너도?”
두 남자는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태령은 친구인 강준의 아내였다. 하지만 친구의 아내가 아니라고 해도 유태령은 아니었다. 서강준도 저렇게 만신창인데. 감히 우리가 그런 여자를 어떻게 감당할까 싶어서.
“근데 태령 씨도 강준이한테 마음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닐까?”
재우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경진은 친구를 보았다. 하긴, 저런 남자를 싫다 할 여자가 없긴 하지. 그런데도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 강준이 밀당을 못해서 그런 걸 테고.
“재우야, 강준이 대신 우리가 태령 씨 마음 좀 확인해 볼까?”
“어떻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재우가 바라보자 경진이 씩 웃는다.
“오늘 서강준을 태령 씨한테 뇌물로 바치는 거지.”
“오홀, 굿 아이디어!”
친구 아내에게 점수도 따고 불쌍한 친구도 돕고, 꿩 먹고 알 먹고. 강준의 사진을 찍으며 경진이 피식 웃는다. 뒷 테이블에서 강준을 훔쳐보는 여자들까지 제대로 찍혔다.
“룸에 안 들어가길 잘했네.”
메시지를 전송한 경진이 재우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 강준이 비틀거리면서 입구로 향했다. 그 뒤를 한 여자가 조용히 따라 나갔다. ***
[박경진입니다. 청담동 바인데 강준이가 좀 많이 취해서요. 저희도 술을 마셔서 대리 불러준다는데 죽어도 싫답니다. 태령 씨가 와주실 수 있을까요?]
태령에게 메시지와 함께 전송된 사진 한 장. 무시하면 될 일이고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이건 사생활을 간섭하는 게 아니라고. 남편의 친구들이 부탁했고 남편의 외박을 관리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남편에게 가도 된다고. 합리화를 끝낸 태령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차를 타고, 운전대를 직접 잡고, 아슬하게 제한 속도를 지키고. 주차장에서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태령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
롤스로이스 컬리넌 블랙 배지, 남편이 사적인 용도로 타는 차가 보였다. 그 차에 주저앉아 있는 남편과 남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여자도. 다음이 뻔하게 예상되는 상황. 눈빛이 싸늘해진 태령이 차 문을 다시 여는 순간이었다.
“잘생기고 돈 많으면 다야? 어디서 재수 없게 유부남 코스프레야!”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여자가 씩씩대며 가버렸다. 여자가 가든 말든, 관심조차 없는 남편에게 태령은 천천히 다가갔다. 태령이 앞에 서자, 남편이 얼굴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유부남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귀찮아 죽겠네, 말을 덧붙이며 긴 손을 느리게 내저었다. 여자가 어지간히도 귀찮게 한 모양이었다. 그런 남편의 반응에 기분이 이상하다. 안도감도 들고, 조금 기쁜 것도 같고. 태령이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자 남편이 얼굴을 들었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를 관통한 섬광에 등골이 서늘했다. 지금껏 겪었던 남편의 싸늘함은 애교 수준이었으니까. 그대로 얼어붙어 눈만 깜빡거리는 태령을 바라보며 남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야, 또 꿈인가.”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으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손길이 나른하다. 오긴 왔는데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태령이 고민하는 그때 남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얼떨결에 남편을 끌어안자 목덜미에 더운 숨이 닿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묻는 게 아니라 혼자 중얼거린 거였다. 그런데 한숨 같은 속삭임이 태령의 목덜미에서 뭉개진다.
“많이 마셨지.”
피식 웃는 듯 바람 새는 숨결도.
“부인이 보고 싶은 만큼.”
또다시 일방적으로 태령을 피하고 있는 건 남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진짜 많이 보고 싶었거든.”
남편의 취중 진담은 또다시 태령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래놓고선 또 기억 못 할 거면서. 이러니까 내가 당신을…….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태령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이겼어요.”
기대한다고 했던 당신의 그 말, 드디어 이루어졌으니까.
“나는 당신이 미워요. 그것도 아주 많이.”
떨리는 태령의 손끝이 처음엔 남편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남편의 얼굴을 양손으로 조심히 감쌌다.
“그런데도 좋아.”
체념 어린 그 속삭임에 남편이 눈을 들었다. 눈꺼풀 아래 반쯤 잠긴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며 태령은 좀 더 다가갔다. 가까이, 아슬하게.
“서강준 당신이 좋아 죽겠다구.”
엉킨 시선으로, 닿을 듯 말 듯 한 입술로, 꼭꼭 숨겼던 진심을 전해 본다.
“그러니까 꿈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난 기억하겠지만 당신에겐 꿈이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이, 이 고백이, 이 키스가.
“당신에게 키스할 거니까.”
입술이 맞닿는 순간, 텅 비어 있던 태령의 가슴으로 남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