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랑, 이제 할 줄 안다고.2021.06.24.
현관 로비를 지나 거실의 중간까지 걸어온 강준이 멈추어 섰다. 발랄한 어쿠스틱 멜로디가 주방 복도에서 흘러나온다. 코끝을 파고드는 자극적인 음식 냄새까지. 설마, 아니겠지. 주방 앞에 도착한 강준은 제 눈을 의심했다. 침실에서 쉬고 있어야 할 아내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서는 강준의 인기척에 놀란 표정으로 아내가 몸을 틀었다. 난장판인 주방을 강준이 눈으로 훑자 민망했던 걸까. 굳이 묻지도 않은 말을 종알거렸다.
“저녁 준비 중이었어요. 이런 날 드물잖아요. 강준 씨가 퇴근할 시간에 내가 집에 있고. 윤 실장님이 강준 씨 저녁도 걸렀다고 해서. 몸 상태도 좋아졌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해서 집 앞 산책하다가 장 좀 봤어요.”
그런 아내가 낯설다. 평범한 부부처럼 퇴근한 남편에게 오늘의 일상을 보고하는 편안한 모습이. 처음 보는 모습이기도 했고.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민망했는지 아내는 싱긋 웃으며 몸을 틀었다.
“씻고 나올래요? 그럼 준비 끝날 것 같아요.”
하지만 강준은 벽에 몸을 기대고선 아내의 모습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하나로 높이 올려묶는 대신 부드럽게 풀어 내린 반올림 머리. 길게 드리워지는 긴 속눈썹과 섬세한 얼굴 옆선. 앞치마를 동여맨 가는 허리와 나긋나긋한 움직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린다. 손끝이 간질거려서 미칠 것만 같다. 천천히 다가간 강준은 뒤에서 아내의 허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강준의 행동에 놀란 듯 품 안에 가둬놓은 여린 몸이 잔뜩 굳는다.
“……강준 씨?”
아내를 품에 안고 아내의 향기를 맡으며 강준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랑이 맞는 것 같다고. 그게 아니고선 가슴을 꽉 채우는 이 빠듯한 감정이, 뇌를 뜨겁게 달구는 이 온도가 설명이 안 되니까.
“잠시만 안고 있을게요.”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건, 오늘 오후 아내의 집무실에서였다. 자포자기한 눈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 여자가 어떻게 되면 자신이 돌아버릴 거라는 걸 깨달은, 그 순간. 링거를 맞고 잠이 든 아내를 보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미 시작된 이 사랑을 접어야 할지 말지. 몹쓸 남편이 될지 몹쓸 형이 될지. 아직 시작 단계이니 컨트롤이 가능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아내의 마음도 자신과 같다면, 몹쓸 형이 되더라도, 미친놈이 되더라도. 지금 강준에게 중요한 건 자신을 향한 아내의 마음, 숨겨놓은 속내였다.
“유태령 씨.”
아내와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처음부터 어긋난 이 결혼을, 걷잡을 수 없이 비틀려 있는 부부 사이를, 다시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게 강준이 오늘 칼퇴근을 하려고 한 이유였다. 밀린 업무 때문에 비록 실패했지만.
“지금 말하면 뭐든지 이해하고 용서해줄게요.”
말을 할 때마다 가슴에서 조금씩 끄집어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심장이. 이래서 사랑은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아내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먼저 내보인 진심에 손톱만큼의 성의만 보여주길 바랐다. 그게 뭐든, 아무거나, 진실이든, 마음이든. 작은 성의만 보여준다면, 나머진 강준이 알아서 할 생각이었다. 머리 아픈 일도, 두려운 일도, 동생의 죽음에 대한 책임도, 하다못해 사랑까지.
“식사는 못 하겠네요.”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아내의 작은 손이 허리를 끌어안은 강준의 손을 풀어낸다. 품 안에서 부드러운 몸이 빠져나가고, 향기로운 체취가 코끝에서 멀어진다. 그 별것 아닌 행동들이 강준의 가슴에 차곡차곡 눈처럼 차갑게 쌓인다.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은 아내의 시선이 강준을 외면하듯 비껴갔다.
“샤워하고 테라스로 나올래요? 거기서 이야기해요.”
긴 속눈썹 아래 교묘히 눈동자를 숨겼지만, 강준은 알 수 있었다. 심장을 끄집어내서 보여주려 했던 자신과 달리, 아내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걸. *** 테라스로 나온 태령은 한숨부터 흘렸다. 윤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늦을 거라는 말과 함께 오후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말도 넌지시 전했다. 제 탓인 것 같아 밥 한 끼 해주고 싶었던 건데.
“나 때문에 또 굶네.”
이 모든 게 성질만 더럽고 생각은 없는 알리샤 탓이었다.
‘날 사랑한다는 말에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 했어. 근데 절대 경수 씨가 죽길 바란 게 아니야! 그 정도 각오로 날 납치하든 붙잡든 해주길 바랐을 뿐이야! 근데 바보같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울먹거리는 걸 보니 알리샤도 허경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령에게 중요한 건 알리샤의 마음도, 죽은 허경수도 아니었다. 허경수가 한신 서 회장의 혼외 손자이고 그 동생을 강준이 끔찍하게 아꼈다는 것. 남편이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한 결혼이라는 것. 그제야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딱딱 맞아 떨어진다. 이 결혼의 목적, 자신을 대하던 남편의 태도, 이혼은 절대 없을 거라던 경고까지. 남편은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알리샤에게 동생의 복수를 하려는 거였다. 그건 자신에게도 평생 지옥일 텐데.
‘엄마가 독일에서 내 흔적을 깨끗이 지웠어. 서강준은 확신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는 것뿐이야. 그 의심만 깨버리면 이 결혼에 문제는 없어!’
미련한 알리샤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서강준 같은 남자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결혼을 유지하려 하다니. 동생의 복수를 위해 이런 여자와 평생 부부로 지낼 강준이 불쌍했다.
“근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문득 남편이 주방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말하면 뭐든지 이해하고 용서해줄게요.’
남편은 무슨 말을 듣길 원했던 걸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남편의 품 안에서 태령은 힘찬 심장 박동을 느꼈다. 날 믿어달라는 남편의 속삭임 같았다. 그게 남편의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태령은 믿을 수 없었다. 당신은 내가 진짜 누군지 모르잖아. 그 진심도 내가 아닌 조 여사의 딸에게 느끼는 걸 텐데. 그걸 아는데 지금이라도 남편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당신이 흔들리고 있는 상대는 유태령이 아니라고. 나는…… 내 진짜 이름은…….
“정신 차려, 할머니를 생각해.”
하지만 태령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자신보다 더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흔들려선 안 된다고. 단 한 번 남편에게 드러냈던 진심. 앞으로 많이 미워할 것 같다는 말에 남편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기대할게요.’
드디어 남편은 그 바람을 이룬 것이다. 태령은 지금 남편이 많이 밉고 원망스러웠으니까. 그때 남편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테라스에 나타났다. 첫 잔을 말끔하게 비운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장모님이 당신을 폭행한 이유가 뭡니까.”
건조하고 심플하게, 원래 이래야 했던 관계다. 그런데도 막상 남편이 그렇게 대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시큰거린다.
“강 관장님이랑 같이 엄마 뒤통수를 치려고 했어요.”
차갑게 날이 선 남편의 눈빛에 심장이 꿰뚫릴 것만 같았다.
“난 계속 일을 하고 싶지만 엄마는 반대하고, 나로선 어쩔 수 없었어요. 이노패션을 내 걸로 만들려면 엄마랑 사이가 좋지 않은 강 관장님 도움이 절실했으니까.”
테이블 아래 꼭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나려 한다. 참아, 버텨, 견뎌내.
“엄마 말에 죽는시늉까지 하던 효녀가 일에 미쳐서 뒤통수를 치려 한다. 우선은 믿어주죠.”
태령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편이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그러곤 태연하게 대화를 틀었다.
“허경수는 왜 모른다고 했어요?”
묻는 게 아니라 확신이었다.
“어떤 여자가 남편에게 과거의 남자를 쉽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젠 남편이 화낼 포인트였고 태령은 기꺼이 각오했다. 유태령 노릇을 하고 있는 이상, 남편의 분노를 받아내는 것도 내 역할이니까. 그런데 여전히 남편은 무심하고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경수 씨처럼 내 성격을 받아주는 남잔 없었어요,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엄마가 반대했고 헤어진 후 귀국했어요. 당신 말대로 난 엄마 말에 죽는시늉까지 하는 효녀니까.”
“그 효심 때문에 내 동생에겐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하라고 했고, 내 동생은 진짜 죽어서 증명해 보였고.”
남편의 차가운 눈동자가 태령에게 속삭여왔다. 이제 만족하냐고.
“그 효녀 역할에, 어울리지도 않는 아내 연기도 포함이었습니까?”
“독일에서의 삶은 제가 누린 마지막 자유이자 일탈이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과거를 지우고 새출발 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뛸지언정, 흘러나오는 태령의 음성은 놀랄 만큼 침착했다. 그런데 남편이 피식 웃는다.
“당신을 향한 동생의 감정이 불장난인 줄 알았어요. 여자한테 푹 빠진 모습이 한심하기도 했고. 말릴 수 있었는데 못 말렸다는 의미지.”
무심한 듯 흘리는 남편의 말투가 자조적이었다.
“당신은 주도했고 난 방관했고. 동생의 죽음을 같이 책임져야 할 우리가 결혼하는 게 이치에 맞는 거고.”
이번만큼은 태령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 대놓고 모든 걸 털어놓을 줄은 몰랐으니까.
“결혼의 목적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건 서강준 씨가 내 남편이라는……!”
태령은 말을 맺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일어난 남편의 상체가 테이블을 넘어와서. 뜨겁게 예열된 손끝이 턱 끝을 잡아올려서. 사람을 활활 태우는 붉은 눈이 태령을 보고 있었다. 짙은 위스키 향이 밴 숨결이 그 눈을 더더욱 타오르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말뜻은, 남편인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까?”
심장을 헤집는 날카로운 질문에 태령은 눈을 내리깔았다. 속마음을 들킬까 봐 차마 남편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난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 같아서. 하지만 입술과 마음은 서로 다른 말을 흘린다.
“난 사랑 같은 건 할 수 없는 여자예요.”
“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담담하고 나직한 음성이 태령의 시선을 다시 끌어 올렸다.
“사랑, 이제 할 줄 안다고.”
아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강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도 그딴 거 못할 줄 알았는데. 당신이 기어이 날 그렇게 만들어놨다고. 그러니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하지만 아내는 강준의 눈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그 미소에 강준의 목구멍에서 쓴 물이 울컥 올라왔다.
“나한테 할 말이 그게 답니까?”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내가 누굴 사랑할 수 있는지.
“경수 씨한테는 내가 평생 속죄하며 살게요. 그러니까 강준 씨는 죄책감이나 책임감은 내려놓았으면 해요.”
아내의 잔잔한 눈, 단정한 얼굴, 차분한 말투. 강준은 처절하게 깨달았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요.”
아내는 자신에게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걸.
“외박은 안 하겠지만, 기다리진 마요.”
*** 강준은 결국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잖아. 아니면, 외박을 안 하겠다는 말을 안 했어야지.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출근한 태령은 김 비서에게 말했다.
“오전에 있는 김진우 모델 미팅에 나 대신 김 비서가 가요.”
진우가 요즘 잘 나가고 있는 신인인 건 확실했다. 마케팅팀과 기획팀에서 동시에 주디스의 메인 남자 모델로 김진우를 발탁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진우가 미팅을 위해 이노패션에 오기로 한 날이었다. 태령도 진우가 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댕댕이처럼 순진한 얼굴과 달리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미친개 성향도 있으니까. 그런 진우의 눈에 띄었다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제가 그래도 될까요?”
“김진우 팬이라면서요.”
“꺄악, 사장님 감사합니다!”
신이 난 김 비서가 집무실을 나간 후, 태령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 따윈 잊고, 일하는 거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평소처럼 집중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카페인이 절실해진 태령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야외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 잠이 깰 것도 같은데.”
집무실을 나온 태령의 걸음이 복도 중간에서 멈추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준이 보폭이 큰 걸음으로 여유롭게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편을 보자마자 수많은 단어들이 가슴에서 응집한다. 텅 빈 옆자리, 유독 추웠던 밤, 외박, 지키지 못한 약속, 얄미움. 차가웠던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사이, 남편이 태령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얄미울 만큼 무심한 자태에,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심장이 떨린다. 미운 마음보다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는 걸 깨닫게 할 만큼. 그래도 제대로 따져줄 거야. 적어도 외박에 대해선 난 자격이 있으니까.
“당신…….”
그때였다. 비상구의 문이 열렸다. 활짝 웃는 김 비서가 나타나고, 그 뒤로 더 활짝 웃는 김진우가 나타났다. 도망칠 수도 없게 김 비서가 태령을 불렀다.
“사장님!”
하필 태령의 눈높이에 남편의 단단한 가슴이 보였다. 한 번 안기면 제 몸을 폭 감싸듯이 휘감아버리는, 제대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 절대 봐주기 싫었는데. 서강준은 하늘이 돕는 타이밍의 귀재라고 생각하며 태령은 천천히 팔을 뻗었다. 남편의 품을 파고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당황한 남편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단단한 허리에 팔을 감고, 심장이 뛰는 곳에 뺨을 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