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목선 예쁜 거, 기억할게요.2021.06.20.
“자네가 왜…….”
이 상황에선 조 여사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천히 다가온 강준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선 태령을 품에 안았다.
“…….”
“…….”
서로의 눈이 어느 점에서 잠시 마주쳤다. 활강하듯 내려온 검은 눈동자는 태령의 상태를 살필 뿐,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오만한 남자의 눈이었다. 하지만 태령은 남편의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이 남자가 내게 뭐라고.
“자네가 놀란 건 알겠어. 그런데 오늘은 좀 빠져줬으면 하는데.”
어느새 차분해진 조 여사의 말에 느릿하게 올라서는 강준의 눈빛이 사납다.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담담한 남편의 목소리가 깊숙이 파고들어 태령의 가슴을 어지럽혔다. 왜 이 남잔 늘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는 걸까. 내가 최악일 때, 시궁창에 처박혔을 때, 자존심이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 한 번 정도는 모른 척해도 될 법한데 늘 손을 내밀고 품을 내어준다.
“강준 군, 이건 나와 내 딸의 사적인 문제야.”
“지금은 제 아내의 일이죠.”
그렇게 대답하는 남편의 단단한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절대 널 두고 가진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메시지처럼. 이상하게 눈가가 욱신거려 태령은 눈을 감았다. 습관처럼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담담한 척, 무섭지 않은 척, 외롭지 않은 척. 하지만 남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편의 품에 안기는 순간, 깨달았다. 사실 자신은 무섭고 두렵고 외로웠다는 것을.
“딴 여자랑 놀아나느라 바쁜 자네가 언제부터 내 딸을 그리 아꼈다고! 지금 자넨 간섭할 자격이 없어. 정 하고 싶으면 남편 노릇 제대로 할 때 하게나, 그럼 내가 받아들이지.”
“직접 보셨습니까?”
조 여사의 목소리에 흥분이 어리기 시작했지만, 강준은 여전히 차분했다.
“……뭐라고?”
“제가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거, 두 눈으로 보셨는지 묻는 겁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지금 나가십시오.”
마지막 경고를 흘리는 남편의 음성이 침전하듯 가라앉아 바닥을 긁는다. 남편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는 의미기도 했다. 눈치는 귀신 같은 조 여사가 얼른 꼬리를 내렸다.
“오늘은 이만 가지.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네. 난 내 딸을 내 방식대로 굉장히 사랑해. 자네에게 설명은 못 해주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고. 나중에 자네도 아마 날 이해할 걸세.”
조 여사가 나가고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그제야 강준은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병원부터 갑시다.”
그 한마디에 감겨 있던 눈꺼풀이 진동하며 올라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병원은 안 된다.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되지만, 조 여사와 약속한 사항이었다.
“병원은 싫어요.”
남편의 건조한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 태령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눈을 감당할 수 없어서 태령은 품을 더욱 파고들며 몸을 움츠렸다. 지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울까. 하지만 부끄러움보다는 남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 데려다줘요.”
중얼거리듯 말을 하는 태령은 흐려지는 정신과 함께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와서, 그의 품에 안겨서, 독기로 버티던 몸의 긴장이 풀린 것이다.
“당신이랑 집에 가고 싶어.”
이마로 번지는 남편의 짙은 한숨이 태령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눈을 뜨니 침실이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태령은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 6시, 주디스 키즈 방송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주디스 키즈, 어떻게 됐죠?”
담담히 묻는 음성과 달리 태령은 숨을 멈추고 있었다.
[15분 만에 1억 원어치 주문 들어오고, 방송 종료 10분 전에 올 컬러 다 완판되었습니다. 시간대별 판매현황과 매출 보고서는 메일로 보내놨구요.]
그제야 참았던 숨이 한 번에 흘러나왔다.
“하나 더, 오늘 내 집무실 녹화 영상은 USB에 저장한 후 삭제해줘요.”
[알겠습니다.]
조 여사가 자신을 폭행했던 그 영상은 훗날 꽤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김 비서, 고마웠어요.”
타이밍 좋게 내 남편을 불러줘서. 김 비서와 통화를 끝낸 태령은 그제야 창백한 손등 위의 링거 자국을 보았다.
“이것 때문이구나.”
몸 상태가 좋아진 게. 그 자국을 바라보며 만지작거릴 때였다.
“의사가 다녀갔어요.”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열린 침실 문에서 강준이 들어오고 있었다. 태연하게 다가와 옆에 앉은 남편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태령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
“보이는 곳은 괜찮은 것 같고.”
상처가 있는지 살피는 것 같은데 더 웃긴 건 태령 자신이었다. 못 볼 꼴을 보였는데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냥, 남편 앞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심리였다.
“블라우스 벗어볼래요?”
강준의 말에 긴 속눈썹 끝에 걸려 있던 눈동자가 진동했다.
“블라우스는…… 왜요?”
“등 쪽에 피가 묻어 있어요. 상처 확인하고 약 발라줄게요.”
그 눈을 바라보며 설명하듯 강준이 담담히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태령도 태연할 수 없었다.
“그건 제가 혼자 할게요.”
“그러던지.”
너무도 쉽게 흘러나온 대답이 의심스러워 태령이 바라보자 남편이 피식, 웃었다.
“태령 씨 뒤통수에 눈이 달리고 등에 손이 달렸다면.”
옅은 농담이 배인 그 한마디에 태령은 말문이 막혔다. 천천히 내려간 남편의 눈이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있는 태령의 손에서 멈추었다.
“혹시 나한테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그래요?”
그럼 안 부끄럽겠어요? 태령이 눈빛으로 항의하듯 대답하자, 남편이 아프지 않게 이마를 검지로 튕겼다.
“엉큼하기는.”
난생처음 듣는 말에 태령은 기가 막혀서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옅은 한숨과 함께 태령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등에 약을 발라주겠다는데 부끄럽다고 거절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건 곧 강준을 남자로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남편을 등지고 단추를 푸는 손가락은 가늘게 떨려왔다. 고작 상처일 뿐인데, 고작 등을 보이는 것 뿐인데. 단추를 반쯤 풀고 내리자 블라우스가 어깨선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집요하게 달라붙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흐트러졌다.
“약 바르는 동안 이거 마시고 있어요.”
남편이 진통제라도 되는 것처럼 뒤에서 스윽, 내민 건 요구르트였다. 웃픈 심정으로 요구르트를 받아 입에 문 순간, 태령의 얄팍한 어깨가 흠칫 솟아올랐다. 드러난 어깨에 그의 손이 닿은 것이다. 열감 어린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등 곳곳을 어루만진다.
“멍이 많이 들었어요. 긁힌 곳도 있고 생채기 난 곳도 있고.”
강준의 나직한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아침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상처를 보자 가슴 안이 또다시 들끓었다. 스스로도 미처 몰랐다. 제 안에 그런 잔인한 야성이 숨어 있을 줄은.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땐 무조건 반격해요.”
바닥에 쓰러진 아내를 본 순간, 자포자기한 듯한 말간 눈과 마주친 순간. 가슴이 아릿하면서 자신을 지금껏 지탱해주던 이성이 동시다발적으로 끊기는 것 같았다. 아내보다 더한 고통을 조 여사에게 배로 돌려주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조 여사를 빨리 내보낸 건 그런 이유였다. 스스로도 어떻게 돌변할지 감이 안 잡혀서.
“상대가 누구든. 뒷일은 내가 책임지니까.”
아내의 침묵에 강준은 쓰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하긴, 쓰레기만도 못한 남편인데.”
그제야 화들짝 놀란 아내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강준 씨를 그렇게……!”
하늘에 맹세하는데 강준도 본능이었다. 아내의 얼굴에서 좀 더 아래로 시선이 흘러내린 건. 무심코 강준의 시선을 따라간 아내의 손에서 요구르트가 툭, 떨어졌다. 새빨간 얼굴로 가슴에 두 손을 크로스하며 다시 빠르게 몸을 돌렸다.
“…….”
“…….”
어색하고도 기묘하게 흘러가는 침묵. 아내는 요구르트를 들고 다시 말없이 마셨다. 강준은 알 수 없는 열감이 머릿속에 차오르는 걸 느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희고 가늘었던 손가락처럼 아내는 온통 희고 가늘었다. 특히 우아하게 흘러내린 깨끗한 목선이, 시선을 자꾸만 끌어당긴다.
“강준 씨한테 항상 도움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처음으로 태령이 남편에게 조심히 내보인 진심이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럼 보답해주든지.”
그런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편의 음성이 이상했다. 별다른 게 없는데도 태령이 느끼기엔 그랬다. 분위기 탓일까.
“내 방식대로.”
그때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에 깃털처럼 부드럽게 와 닿았다.
“목선 예쁜 거.”
초옥-.
“기억할게요.”
살결 위에서 속삭이는 입술의 움직임에 태령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칼퇴근하고 들어올 테니, 푹 쉬고 있어요.”
강준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그래야 대화를 나눌 테니까.”
침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토해져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와중에도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가슴을 헤집었다. *** 욱신거리는 몸으로 태령이 직접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요양병원이었다. 링거를 맞고 있는 침대 위의 여자는 몇 주 전과 달리 산송장 같았다. 하지만 연민 따윈 느끼지 못한 채, 태령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언니가 식사 거부하다 쓰러진 거, 허경수 때문이죠?”
여자의 직감이란 무섭다. 평소처럼 겉도는 대화가 아닌, 오늘 남편은 핵심만을 파고들 것이다. 그래서 태령은 대비를 해야 했다. 남편과 조 여사 딸의 접점을, 숨기고 있는 진실을.
“언니가 그렇게 된 게 내 탓이라고 이모가 회사까지 쳐들어와서 날 폭행했어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가 그제야 피식, 웃었다.
“네가 맞을 짓 했나 보지.”
“그걸 강준 씨가 봤는데도요?”
태령의 담담한 말에 그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니까 다 말해줘요. 오늘 이 결혼이 깨지는 걸 원하는 게 아니면.”
“너 지금 나 협박해?”
표독스러운 눈동자가 독화살처럼 날아들었지만 태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 협박하는 거예요.”
너무도 태연한 대답에 바르르 몸을 떤 그녀가 핸드폰을 들었다. 조 여사에게 고자질하려는 거겠지. 빠르게 다가간 태령은 핸드폰을 낚아채며 앙상한 몸 위에 올라탔다.
“이게 돌았나! 내 핸드, 아악!”
하지만 조 여사의 딸은 너무도 쉽게 태령에게 제압당했다.
“내 말 똑똑히 들어요. 이모는 죽이지 못해 안달 난 나를 딸로 삼을 만큼 이 결혼에 목매고 있어요. 그런데 이 결혼이 언니 때문에 깨지면, 딸이라도 봐줄 것 같아요?”
조 여사에겐 모성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딸도 제 탐욕을 채울 또 다른 이용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라서 이 결혼 감당하는 거예요. 한신그룹 며느리도, 이노패션 사장직도, 서강준의 아내도, 그리고 악마 같은 언니 엄마까지.”
조 여사의 딸도 엄마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돈줄이었고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 그 모든 걸 태령은 진즉 간파하고 있었다.
“당장 이 결혼 깨지면 이모는 언니 돈줄부터 끊을걸요. 사기 결혼인 게 알려지면 언니랑 재혼하려는 남자도 없겠네요. 이모한테 언니 가치는 딱 그것뿐인데.”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증오가 차올랐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향한 건지, 조 여사를 향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모 성격에 언니한테 다 덮어씌우겠죠. 아, 이노에서 언닐 버린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정곡을 찔린 듯 조 여사의 딸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 말하라구요!”
태령이 매섭게 소리치자, 놀란 조 여사의 딸이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이모한테 절대 못 하는 그 말, 내가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겠다잖아요.”
앙상한 몸에서 내려온 태령은 조 여사의 딸에게 다시 핸드폰을 건넸다.
“선택해요. 나한테 다 털어놓고 오늘 일을 비밀로 할지, 지금 당장 이모한테 전화해서 다 고자질할지. 나는 관둔다고 하면 끝나겠죠. 물론 언닌 아니겠지만.”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네 할머니 생각 안 해?”
“그럼 내가 제정신으로 버텼을 것 같아요?”
태령은 단정한 얼굴로 싱긋, 웃어보였다.
“가양 병원 말고 다른 데서도 임상 테스트 들어간 병원이 있댔어요. 버틴 시간이 아깝지만, 할머니 치료는 그 병원에서 다시 알아보면 되구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병원에만 박혀 있는 조 여사의 딸이 그걸 알 리 없었다.
“그러니까 나 말고 언니 걱정이나 해요.”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순간.
“경수는 독일에서 만났어!”
천천히 돌아서자 죽일 듯이 노려보는 조 여사의 딸이 보였다. 그녀는 선택을 한 것이다. 오늘의 일을 조 여사에게 비밀로 하고 모든 걸 자신에게 털어놓기로.
“알리샤 바튼.”
조 여사 딸의 이름을 부른 태령은 의자를 끌고 와서 침대 옆에 태연히 앉았다.
“나한테 숨기지 말고 다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