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키스, 저도 좋아서 한 거라구요.2021.06.17.
무섭게 달려들어 챔피언 출신의 복싱클럽 관장을 넉다운 시켰다. 커피숍에 도착해서도 말 한마디 없는 검은 눈빛이 살벌하다. 강준이 그런지 벌써 일주일째.
“질투심 유발 작전은 때려치우고, 태령 씨가 널 거부하는지 테스트해 봐.”
“무슨 테스트.”
보다 못한 경진이 툭, 던진 말에 불쑥 튀어나온 나직한 음성마저 살벌하다.
“이래서 머리 똑똑한 놈들은 문제라니까. 뭐든지 참 복잡하게 생각한단 말이지.”
두 남자는 사실 친구인 강준보다 아내인 태령이 더 안쓰러웠다. 사랑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헛 우물을 파는 친구를 보니 더더욱.
“대화가 안 통하면 몸으로 먼저 대화해보라고. 순서는 바꾸라고 있는 거다?”
여, 알, 못에 고지식하기까지 한 서강준은 순서대로 가려는 게 뻔했다. 그러니 질투를 유발해서라도 기어이 마음을 확인하려는 거겠지. 마음을 확인한 후 스킨십도 순서대로. 사랑을 공부나 사업처럼 순서대로 하려면 쓰냐고, 이 답답히 헛똑똑아! 라고는 차마 못 하겠고.
“결혼한 선배나 친구들이 그러더라. 아내랑 화해할 때 가장 좋은 장소가 침대라나 뭐라나.”
경진의 말에 재우도 적극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진짜 효과 직방이래.”
증손주를 간절히 바라는 서 회장과 딜을 했다는 건, 두 남자만의 비밀이었다.
‘네놈들 말은 강준이가 듣는 것 같으니 잘 구슬려봐. 증손주 생기면 내가 다시 장 회장이랑 김 사장 설득해 볼 테니.’
미안하다, 친구야. 우리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서. *** 제주도에서 마지막 밤, 문이 닫히기 전. 늘 단정했던 아내의 눈동자에 어린 경멸이 강준의 심장에 못처럼 박혔다. 그 눈동자만 떠올리면 뇌는 멈추고 입은 얼어붙는다. 지은 죄가 있으니 어떻게 아내에게 다가가야 할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일주일째 아내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의 대화를 나누라니, 쫓겨난 것도 모자라 아내에게 뺨 맞을 일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조언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1층 침실 욕실에서 마주치기 전까진. 아슬하게 가운만 걸친 아내가 젖은 눈망울을 파르르 떨면서 얼굴을 붉히기 전까진. 아내에게 20분 후에 집에 도착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도 벌어진 이 상황, 타이밍, 모습. 분명 유혹이었다. 아니, 우연이었다고 해도 강준이 그렇게 오해하고 싶었다. 자꾸만 생각이 나고 보고 싶고 그립고 머릿속을 꽉 채우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품고 싶고. 일주일 내내 날 미치게 만든 건 당신이니까. 그러니까 모두 유태령 씨 탓이라고.
“나와 자고 싶어요?”
변명할 기회를 줘도 끝까지 침묵하는 아내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미친놈은 될지언정 욕망에 사로잡힌 짐승은 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아내는 말 대신 몸으로 대답해왔다. 강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작은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는 걸로. 한 가닥 남아 있던 이성이, 툭 끊기는 순간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달싹거리는 아내에게 입술을 겹쳤다. 그녀가 하려는 말과 떨리는 숨결까지 모조리 집어삼키며 강준은 생각했다. 아내가 자신을 밀어내주길,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기를. 참 이상한 양면성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살포시 벌어지는 부드러운 입술.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꿀처럼 다디단 숨결. 허리를 더 꽉 끌어안은 작은 손에서 번지는 수줍은 떨림. 처음으로 알게 된, 아내가 꼭꼭 숨겨놓은 희미한 진심. 그건 곧 기폭제였다. 강준은 더욱더 깊이 입을 맞추며 아내를 끌어안고 파고들어 헤집었다. 놀라울 만큼 아내는 여리고 부드럽고 달콤하고 촉촉했다. 제 몸의 반도 안 되는 부드러운 몸을 꽉 끌어안자 따스한 온기가 번진다. 늘 서늘했던 아내의 몸인데. 그래서 항상 자신의 온기에 홀리듯이 밤마다 안겨왔던 아내인데. 자신처럼 아내도 흥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돌아버릴 만큼 좋았다. 강준은 입술을 맞댄 채 쉰 듯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후는, 침대에서.”
마음 같아선 영원히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 이상 소중히 대해주고 싶었다. 깨끗한 아내처럼, 자신도 깨끗한 몸으로. 욕실에 세워두지 않고 넓고 푹신한 침대에서. 샤워하고 나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품 안에서 무너져내리는 아내를 강준은 꽉 끌어안았다.
“……태령 씨?”
꾹 감긴 얇은 눈꺼풀이, 긴 속눈썹이, 잔떨림조차 없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뜨거워 이마에 손을 대자 불덩이 같다. 데일 듯 뜨거웠던 아내의 온기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내는 그저 몸이 좋지 않아서 변명하지 않았던 거고 몸을 기대왔던 거였다. 그걸 오해하고 짐승처럼 달려든 건 자신이었고.
“빌어먹을.”
강준을 덮쳤던 뜨거운 욕망의 해일이 차가운 자괴감으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 눈을 뜬 태령은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며시 눈을 들자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잠들고 싶은 순간이었다. 옅게 한숨을 내쉬자 활강하듯 내려온 검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눈을 맞춰왔다.
“일어났어요? 몸은 좀 괜찮고?”
“……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에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게 나왔다. 그제야 남편이 몸을 움직여 태령을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상황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억이 안 나서요.”
민망하고 부끄럽고 창피해 죽을 것 같지만 모른 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떤 문제든 태령은 피하는 것보다 정면으로 충돌해서 빠르게 해결하는 편이었다.
“기억하기 싫은 건 아니고?”
시니컬한 말투에 태령이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열이 40도까지 올라서 집으로 의사 불렀어요. 링거 맞으니까 열은 내렸는데 자꾸 춥다고 안아달라고 해서.”
설마, 내가, 당신한테? 태령이 조금 의심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픽, 웃는다.
“더 솔직히 말해줄까요?”
아니요, 그냥 안 들을래요.
“욕실에서부터 춥다고 내 품에서 안 떨어졌어요.”
차라리 생각이 안 났으면. 하지만 정말 떠올라버렸다. 열은 펄펄 끓는데, 춥기는 너무 추워서, 남편에게 악착같이 매달렸다는 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안고 있었고.”
느릿하게 내려온 시선이 태령의 얼굴 아래로 향했다.
“내 셔츠도 그래서 입혀놨고.”
타올 위에 입고 있는 남편의 셔츠가 눈에 들어오자 태령은 사과부터 했다.
“정말 미안해요.”
“미안한 건 납니다.”
고개를 옆으로 튼 그가 느릿한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혼자 착각해서 덤벼들었으니.”
침대에서 내려온 강준이 태령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태령 씨가 아픈 것도 모르고 착각해서 일방적으로 키스한 거.”
차라리 비꼬는 거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남편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내 키스가 기분 나빴을 텐데, 아픈 몸으로 참아준 것도 고맙고.”
태령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이 말을 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픈 와중에도 당신과의 키스가 좋아서.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었던 거라고.
“다시는, 오늘처럼 무례하게 굴 일은 없을 겁니다.”
마치 태령이 아닌 강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돌아서는 그의 옷자락을 잡은 건 본능이었다. 잡고 나서 놀랐지만, 그렇다고 놓기는 싫었다.
“…….”
남편의 시선이 손에 닿았지만 태령은 옷깃을 더 꼭 움켜잡았다.
“오해는 풀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저 기분 안 나빴어요. 제 말은 그러니까…….”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지만 태령은 강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한 키스, 저도 좋아서 한 거라구요.”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만큼은 솔직하고 싶어서. 잠시의 정적 후, 강준이 다시 침대에 등을 지고 털썩 앉았다.
“나를 미워할 거라면서요.”
남편의 옅은 한숨 소리가 태령의 가슴을 쓴다.
“그럼 그냥 자책하게 두지 그랬어요.”
미워도 했고 원망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가 강준 씰 왜요.”
“좋은 남편이 아니었으니까.”
“저도 좋은 아내는 아니었는걸요.”
태령의 대답이 웃겼을까. 그가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그건 좀 위로가 되네요.”
위로하려고 한 말은 아닌데. 그때 몸을 튼 남편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검지가 턱 끝에 닿고 엄지가 아랫입술에 닿았다. 여린 입술을 쓸어내린 느릿한 손길이 가는대로 짙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알 수 없는 열감에 사로잡혀 눈을 감은 태령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오늘 하루만 외박 허락해줄래요.”
나직한 음성에 천천히 눈을 뜨자 눈이 마주쳤다. 남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머리가 좀 복잡해서, 생각 좀 하려고 그래요.”
“…….”
“태령 씨 없는 곳에서.”
그건 태령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을 보고 있으면, 아픔까지 잊을 만큼 좋았던 키스가 떠올라서,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서. 그래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내일 하루는 출근하지 말고 푹 쉬고.”
“……봐서요.”
“내가 걱정돼서 그래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편은 침실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태령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서강준 씨,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요.”
이기적인 배려도, 차가운 다정함도, 이제 그만했으면. 당신에게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아서, 그래서 겁이 나요. *** 강준은 어제 처음으로 외박이란 걸 했다. 아내는 괜찮다고 했지만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과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픈 그 와중에도 아내는 그에게 위로라는 연기를 했을 것이다. 머릿속도 복잡했지만 그래서였다. 자신이 있으면 아내가 편히 쉬지 못할 것 같아서. 하지만 아내의 비서와 직접 통화를 한 지금은 후회란 걸 하고 있었다. 그냥 외박하지 말고 곁을 지킬 걸 그랬다고.
‘사장님은 정상 출근하셨고, 분기별 실적 보고 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내는 아침에 발포 비타민만 먹었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다고 했다. 얌전한 고양이 같다가도 꼭 이럴 땐 고집불통이다. 하여간 말 안 듣지. 그 말 안 듣는 고양이에게 강준은 직접 죽을 배달해주러 가는 길이었다. 이왕이면 먹는 것까지 보고 올 생각이었고. 그때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장님, 이노패션 김가연 비서입니다. 무례한 부탁이란 거 알지만. 지금 당장 이노패션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김 비서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유는.”
[이노 사모님이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요. 아무도 들이지 말랬는데 사장님이 너무 걱정돼서.]
엄마가 딸을 찾아온 게 왜 걱정할 일일까. 하지만 김 비서처럼 강준도 뭔가 불안했다.
“10분 안에 가죠.”
통화를 끝낸 강준은 더욱더 차의 속도를 높였다. *** 아침 내내 머리가 핑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속도 울렁거리고, 미열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런데도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태령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강준 씨 말대로 하루 쉴 걸 그랬나.”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오늘 오후에 태산 홈쇼핑에서 주디스 키즈라인 첫 방송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회사 내부는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꽤 많은 자본이 투자된 만큼 기대감이 컸다. 무엇보다 단독 PB 브랜드인 만큼 첫 방송에서 실패하면 이후의 행보는 보장을 못 한다.
“조금만 버티자.”
……그럼 돼.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조 여사가 들이닥쳤다. 태령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등줄기를 싸하게 훑어내린다. 떨리는 숨을 삼키며 일어나는 태령의 시선이 책장 어딘가에 설치된 CCTV로 향했다. 잘 돌아가고 있겠지.
“엄마,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빠르게 다가온 조 여사가 손에 들고 있던 백으로 태령의 머리를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지자 뇌가 울리면서 눈앞이 흐려진다.
“화가 난 게 있으면 말로…….”
떨리는 손끝으로 겨우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조 여사의 손에 들린 각 잡힌 토트백이 태령의 몸 위로 무차별 폭격처럼 떨어졌다.
“네 그 더러운 주둥이로 말해 봐! 말로만 아니라고 하면서 이 자리가 탐이 났던 거니!? 내 딸이 죽기라도 하면 내가 너 같은 걸 진짜 딸로 삼을 것 같아서?”
이 순간조차 조 여사는 고단수였다. 얼굴을 피해 몸만을 겨냥한다. 아픔조차 못 느낄 만큼, 감각이 둔탁해졌다. 하다못해 비명조차 나오질 않았다. 머리카락이 뽑힐 만큼 세차게 잡혀 태령은 얼굴이 들렸다.
“네년 만나고 나서 내 딸이 식사를 거부했어! 그것도 나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해서 난 그걸 이제야 알았어. 내 딸이 쓰러지고 나서야 알았다고! 말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이모, 제발…….”
살고자 하는 본능에 흘러나온 그 속삭임이 조 여사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어쩜 네년이나 네 어미나 똑같니! 남의 자리 탐내고 남의 남자 뺏으려는 건!”
조 여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태령의 몸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무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롭게. 이젠 머리채까지 잡혀 세차게 흔들리자 눈이 감긴다. 짙은 어둠 속으로 의식이 서서히 빠져드는 순간.
“당장 내 아내한테 손 떼요.”
분노에 찬 남자의 나직한 음성이 공기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