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내가 오해를 할 것 같은데.2021.06.13.
각종 해산물과 다양한 회, 초밥까지. 널찍한 식탁의 자리가 부족할 정도다.
“으응, 웬 술이냐?”
서 회장의 시선이 제주소주가 들어 있는 아이스 버킷으로 향했다.
“회에는 소주잖아요. 할아버님이랑 같이 마시려고 준비했어요.”
발칙한 센스와 어울리지 않게 태령은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내가 주량이 좀 센데, 어찌 감당하려고.”
“듬직한 흑기사 있어서 걱정 안 해요.”
태령이 잔잔히 웃으며 바라보는 시선 끝에 강준이 있었다. 시작도 전에 서 회장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그런데 술잔이 두 개뿐이었다. 의아해서 바라보는 강준의 손에 아내가 쥐여준 건 물이 든 머그잔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이거나 마시고 있어요. 센스도 발칙한데 선전포고는 깜찍하기까지 했다. 피식 웃은 강준은 아내의 주사가 문득 궁금해져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지켜볼수록 아내는 강준을 놀라게 했다. 밥만 복스럽게 먹는 줄 알았더니, 소주마저도 단정하고 예쁘게 마신다. 서 회장을 너끈히 상대하는 주량도 놀랍고. 어른을 상대하는 매끄럽고 능숙한 모습은 더 놀랍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할아버지와 손녀라고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시야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할아버님, 적당히 드시면 반주지만 여기서 더 드시면 음주예요. 반주는 몸에 이롭지만 음주는 해롭다는 말도 있잖아요. 건강 해치실까 봐 걱정이 돼요.”
기분 좋게 돌려 말했지만, 아내가 서 회장에게 내린 축객령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데도 서 회장은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그럼 아가 말대로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일어날까?”
마지막 잔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나던 서 회장이 살짝 휘청이자 강준이 얼른 부축했다.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태령은 술 한 잔 안 마신 것처럼 단정하고 차분했다.
“할아버진 내가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호텔 로비에 내려오자마자 서 회장이 강준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예끼 이놈아, 네 덩치를 생각해야지! 코끼리도 잡게 생겨선 그 가냘픈 아가를…….”
영문도 모른 채 등을 맞은 강준이 억울함에 눈썹을 구겼다.
“제가 뭘 어쨌다고요?”
“아가 목이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뻘겋던데, 네 놈 짓이지?”
순식간에 억울함은 사라지고 목구멍이 꽉 막혔다.
“할아비가 몇 번을…….”
“평생 할머니 고생시킨 할아버지께 듣는 조언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아들도 죽고 혜순도 죽고. 서 회장은 어린 손자를 붙들고 말도 안 되는 조언을 지겹도록 퍼부었다. 그게 오히려 손자가 여자를 멀리하게 된 이유가 될 줄도 모르고. 여자도 결혼도 사랑도. 잘할 자신 없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놈아! 내가 혜순이랑 틀어진 건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었어. 하필 동갑이라 더 그랬고. 서로 대화로 해결하고 한발만 양보했으면 됐을 것을. 아까운 시간 낭비도 안 했을 것을.”
먼저 간 아내가 떠올랐는지 서 회장의 눈가가 붉어지는 그때, 차가 도착했다. *** 호텔로 돌아가니 태령은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가 치우는 걸 도우며 강준이 물었다.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술까지 마실 필요는 없었어요.”
술을 마셔서일까, 강준의 말에 태령이 예쁘게 눈을 흘겼다.
“술을 마셔야 할아버님이 자리를 안 뜨시죠. 눈치 빠르신 분인데 욕실만 들어가도 강준 씨가 여기서 지내지 않은 거 눈치채셨을 거예요.”
곰보다는 여우가 낫다고 했던가. 눈치껏 대처한 태령 때문에 그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태령이 문득 눈을 들었다.
“왜 그렇게 봐요?”
“내가 양파랑 결혼한 것 같아서.”
까도 까도 계속 나오잖아. 그것도 아주 나를 미치게 만드는 양파가. 뒤늦게 술기운이 오르는지 태령이 발그레한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 바람에 목에 두른 스카프가 움직이며 드러난 상처를 강준은 빤히 보았다.
“할아버지가 오해를 좀 했어요.”
“……?”
“목에 그 상처, 내가 물어뜯어 놓은 줄 알더라고.”
아팠을 것 같아서 미안하고 스스로에게 짐승 같은 놈이라 욕도 했다. 그런데 또 이 상처가 오래 갔으면 한다. 내 여자라는 각인을 새겨넣은 것도 같아서. 이상한 양면성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색하게 웃으며 아내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봐, 또 모른 척 시치미지.
“가려워서 긁었는데 살성이 약해서 상처가 생긴……!”
강준의 손이 목덜미에 닿자 아내는 흠칫, 했다. 검지로 스카프를 내린 후 붉은 흔적을 엄지로 천천히 문질렀다. 손끝에 달라붙는 피부가 밀가루처럼 부드럽고 서늘하다.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계속 어루만지게 된다.
“많이 아팠겠어요.”
강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참을 생각했었다. 분명 현실이었던 어젯밤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태령에게 사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냐고 묻는 아내의 눈빛이 간절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제발 기억 못 한다고 해줘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과 복잡한 감정으로 얽히는 게 싫은 거다. 지금 이 관계에서 더 발전하고 싶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어쩌지. 난 이제 당신이랑 더 복잡하게 얽히고 싶어졌는데.
“강준 씨도 그만 돌아가는 게 어때요?”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강준은 아내를 보았다. 그런데 시선을 피하는 아내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제 목은 그만 좀 만지구요.”
손을 떼는 대신 강준은 불만의 표시로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더 만지고 싶은데. 아직 한참 부족한데.
“강준 씨?”
조금은 힘이 실린 부름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뗐다.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되나.”
너무 대놓고 물은 것도 같고.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아내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잠 잘 오는 차 한 잔 타줄까요?”
그러니까 재워주겠다고 말겠다고. 하지만 아내는 이미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여자들 속은 알다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강준은 그 뒤를 따라갔다.
*** 선선해진 밤공기를 느끼며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밤바다가 예쁘다. 바람에 실려 온 바다 내음마저 좋을 만큼. 이래서 사람들이 밤바다를 보러 가는 걸까. 문득 남편이 궁금해진 태령은 조심히 고개를 틀었다. 자신과 달리 강준은 선배드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강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거 효과 좋네요.”
느리고 묵직한 중얼거림, 눈꺼풀 아래 반쯤 잠긴 눈동자. 졸음을 이겨보려 애쓰는 모습이 덩치 큰 어린아이 같아 태령은 부드럽게 물었다.
“많이 졸려요?”
“졸리면, 자고 가도 되나.”
새삼 느끼는 거지만 기습공격에 틈새 공략까지 잘하는 남자였다. 아까는 바로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왠지 망설여졌으니까. 태령은 애꿎은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자고 가라고 할까. 고민하는 그때 거실에 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 통화가 길어지는 건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다. 강준이 거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차분히 앉아 있던 아내가 강준을 보았다. 무심한 아내의 눈을 본 순간 강준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차 다 마셨으면 이제 가줄래요?”
우리 방금 전까지 좋지 않았냐고 말하는 대신, 강준은 짤막하게 물었다.
“이유는?”
이 방에서 못 자서가 아니라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왜 갑자기 180도 돌변했는지.
“할아버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선약을 잊었나 봐요.”
차분히 말을 이으며 태령이 긴 속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강준은 이미 보았다. 단정한 눈동자에 어린 희미한 경멸을.
“한사라 씨가 객실에서 지금 기다리고 있다니, 얼른 가보세요.”
선약 따윈 없다. 서 회장 때문에 급하게 오면서 컨시어지에 연락해서 지시했다. 찾는 전화나 사람이 있으면 아내의 객실로 연락을 달라고. 뭣 같은 타이밍보다 강준을 화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네요.”
그 한마디에 아내는 더욱더 차갑게 눈을 빛냈다.
“당신에게 그런 걸 물을 자격이 내게 있긴 하나요?”
“…….”
“그 자격, 당신이 박탈했잖아요.”
강준은 그만 쓰게 웃어버렸다. 그랬었지. 이 오해도, 이 상황도, 이런 쓰레기 취급도, 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지.
“내일 봅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준은 이만 돌아섰다. 지금 당장의 오해를 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아서였다. 우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었으니까.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문밖으로 나와 돌아선 강준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아내를 보았다.
“오늘은 꼭 즐밤 보내길 빌게요.”
하지만 문은 매정하게도 쾅-, 닫혔다. 그게 자신을 향한 아내의 마음처럼 느껴져 강준은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은 평화로웠다. 일도 잘 풀리고 조 여사도 조용하고. 그런데도 태령은 내내 심란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제주도의 마지막 밤 때문에. 한사라와의 일에 대해선 남편의 결백을 믿는다. 그런데도 남편을 쫓아낸 건 화가 나서였다. 그 메시지를 담담히 전달하지 못한 자신에게.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말에 아무 반박도 하지 않은 남편에게. 그런 스스로가 싫고 남편이 미워서. 몸이 좋지 않아 예정보다 일찍 퇴근한 태령은 소파에 앉아 중얼거렸다.
“오늘도 휑하네. 춥고.”
한때는 그랬다. 이 너른 집이 가득 차올라 있는 것처럼 느꼈을 때가. 늘 차갑게 느껴졌던 서늘한 공기에 따스함이 어렸을 때가. 남편이 빨리 들어온 날. 크고 거대한 체격과 달리 움직임이 조용한 그 남자의 체취와 흔적이 가득 차오른 날.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남편과 냉전 상태였다. 부부싸움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럴 관계도 아닌데. 새벽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인기척. 하지만 눈을 뜨면 비어 있는 옆자리. 그럴 때마다 태령은 애써 치부했다. 우린 원래 그래야 했던 관계라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소파에서 일어나자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이다. 2층 욕실에 들어간 태령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하는 수 없이 태령은 1층 침실로 향했다. 샤워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널찍한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욕조 옆으로 난 창 너머의 황홀한 야경도.
“반신욕 하면 좀 괜찮아지려나.”
태령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병원도 못 가고, 아프다고 응석 부릴 사람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고. 지금도 너무 추운데, 침대에 이대로 누우면 더 추울 것 같아서. *** 태령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느낀 건 한기였다. 물이 차갑게 식은 욕조에서 일어나자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이대로면 내일 앓아누울 각인데. 핸드폰을 챙긴 후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른 순간,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이 열렸다.
“…….”
“…….”
태령은 몸이 안 좋아서 눈앞에 헛것이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는 눈앞의 상황은 현실이었다. 특히 상체를 헐벗고 서 있는 남편은. 타월을 꼭 움켜쥐는 떨리는 손끝을 남편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타들어 가는 눈으로 빤히.
“9시에 들어온다고 메시지 넣었어요.”
천천히 입을 여는 남편의 시선이 태령의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향했다. 잠이 든 바람에 확인 못 했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그런데 이 시간에. 내가 사용하는 욕실에서. 태령 씨가 이 모습으로 있으면.”
느릿하게 올라온 짙은 시선이 작살처럼 태령의 얼굴에 꽂혔다.
“내가 오해를 할 것 같은데.”
이 상황, 이 타이밍, 이 모습. 남편이 어떤 오해를 할지 알 것 같았다. 2층 욕실에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1층 욕실에 하필 욕조가 있어서. 당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서. 할 말은 많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간신히 서 있는 게 지금 태령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유태령 씨, 무슨 말 좀 해 봐요.”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남편의 결백을 믿으면서도 태령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쌀쌀맞게 쫓아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려는 걸까. 뒤늦게 밀려든 미안함에 눈시울이 붉어진 태령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하는 시야에도 느슨하게 풀어진 흉근은 아찔하기만 하다.
“혹시 날 유혹하는 겁니까?”
태령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뇌가 울리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필 그때 남편이 물어왔다.
“나와 자고 싶어요?”
이것만큼은 대답해야 하는데. 하지만 머리가 핑 돈 태령은 남편에게 몸을 기대고 말았다. 단단한 허리에 절박하게 팔을 휘감고, 맨 가슴에 뜨거운 이마를 대고선, 쌕쌕 숨을 내쉬었다.
말 대신 몸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남편의 불붙은 오해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힘겹게 달싹거리던 태령의 입술이 집어 삼켜졌다. 오해를 하게 만든 것에 대한 남편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