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첫키스.2021.06.10.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스듬히 내리깐 눈동자에 농축된 취기가 태령에게도 옮겨온 듯했다. 저 눈동자에 잠시 사로잡혀서 몸을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태령은 손으로 얼른 입을 가렸다.
“한사라 씨는 어디 있나요?”
한사라를 들먹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남편의 키스를 거절하려고.
“나도 모르는데.”
한숨 섞인 남편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태령은 살며시 눈가를 접었다. 체력이 좋아서 외박까지 거론했던 남자가 몇 시간 만에 여자를 돌려보냈을 린 없고. 잠이 들어서 방에 두고 아쉬움에 내려왔으려나. 그래놓고선 또 내게 키스하려는 거고. 남편을 발로 차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순간, 강준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한사라 씬 문 앞에서 와인 주고 바로 돌려보냈으니까.”
태령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기억을 되돌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사라가 다시 연회장에 나타나긴 했다. 손에 든 와인 쇼핑백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자랑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다시 사라졌고 당연히 남편을 만나러 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호텔 객실이든, 아니면 다른 근사한 장소에서 데이트를 하든. 그런데 그게 만남의 끝이었다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고.”
태령은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남편의 노골적인 의도에 속이 뒤집어져서 더 뻔뻔하고 독하게 굴었는데. 그 모든 게 보여주기식 쇼였다니. 남편의 말에 의심보단 입안에서 거친 중얼거림이 맴돌았다. 망할 서 씨 집안 남자 같으니라고. 연숙이 시어머니와 그 말을 왜 자주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근데 왜 날 괴롭히고 도발하는 건데.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 남편의 커다란 손이 태령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이제…….”
귓가에 닿는 기묘하게 침착한 속삭임.
“키스해도 되나.”
그 속삭임에 홀려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을 피하지 못했다.
“……!”
입술이 맞물리는 순간, 비스듬히 내리깐 짙은 눈에서 독한 취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집어 삼켜질 것 같고, 활활 태워질 것 같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타인의 입술 감촉보다 그 눈이 태령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남편의 가슴에 올린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몸 안으로 서서히 번져 나가는 아찔하면서도 야릇한 기대감. 하지만 더 깊게 파고들지 않고 입술만 맞대고 있는 남편은 지독히도 금욕적이었다. 아내인 자신이 매력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이 남자가 점잖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남편의 입술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발그레한 뺨을 스쳐 깨끗한 목덜미로.
“단내가 나.”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간지럽다고 느낀 순간, 태령은 남편의 가슴을 손으로 밀쳐냈다.
“……!”
단내가 난다더니 사탕인 줄 착각한 걸까. 순식간에 빨리고 물린 목덜미가 쓰라렸다. 기가 막히고 황당하고 어이없는데. 그렇다고 술에 잔뜩 취한 사람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 태령이 할 수 있는 건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환영이 아직도 보이네.”
마른세수를 하며 픽 웃은 남편이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환영 따윈 이제 무시하겠다는 것처럼. 잠은 오지 않고, 오늘따라 유난히 춥고, 남편과 한사라는 자꾸 생각나고. 술이 간절해서 내려왔는데 남편 때문에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다시 객실로 돌아온 태령은 거울부터 확인했다. 목덜미에 붉은 흔적이 또렷했다. 물린 것도 억울하지만 더 억울한 건.
“……내 첫키스.”
씩씩거리며 침대에 누워도 기억은 점점 또렷해져 간다. 취기가 일렁이던 눈, 부드럽게 젖은 입술, 알코올 향이 짙었던 숨결. 그리고 남편이 흘렸던 취중 진담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으니까.’
가장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설마 남편은 지금껏 내내 그래왔던 걸까. 아무 짓도 안 해놓고선, 오해하도록 상황만 연출하는 연기를.
“왜 자꾸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거야.”
태령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왜 한사라는 그냥 돌려보내선. 이상한 말만 잔뜩 해선. 키스한다면서 아쉽게 입맞춤만 해선.
“…….”
아아악. 태령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말도 안 돼, 남편이 키스를 안 해줬다고 아쉬워하다니. 내겐 첫키스였지만 그 남자에겐 아닐 텐데. 한참 후에야 이불 위로 내민 작은 얼굴이 새빨갛다.
“근데 그 사람, 기억은 할까.”
많이 취했다고 했는데. 잠 못 드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날벼락이 떨어졌다. 서 회장이 전용기를 타고 제주도로 오고 있다고 했다. 손자 부부와 점심 한 끼를 하기 위해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선. 그 말을 비서실장이 전하는 목적은 하나였다. 그러니 두 분도 스케줄 알아서 캔슬하십시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태령은 먼저 도착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에 남편이 나타났다. 태령의 앞에 멈추어 선 남자에게선 어젯밤의 취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잤어요?”
담담히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말투에도, 지그시 응시해오는 눈빛에서도.
“그럭저럭요, 강준 씨는요?”
“나도 뭐, 그럭저럭.”
더 이어질 남편의 말을 기다려보지만 그게 끝이다. 설마, 기억 못 하는 걸까. 어젯밤의 만남, 취중 진담, 잠시의 입맞춤, 물린 목덜미, 붉은 흔적. 새벽 내내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들. 태령의 손이 절로 스카프를 두른 목덜미로 향했다.
“어젯밤 지하 1층 바(BAR) 복도에서 나랑 마주쳤는데, 혹시 기억 안 나요?”
남편이 기억을 안 해줬으면 한다. 그런데도 기어이 들추어내는 건 확인을 위해서였다. 타고난 성격이었다. 지레짐작했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다 미리미리 대처하자는 게.
“혹시 내가 실수했습니까?”
하지만 남편은 매끄럽게 질문을 되돌린다. 정작 태령이 원하는 대답은 해주지도 않고서.
“실수 같은 거…….”
태령은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했어요. 당신도, 그리고 나도. 확 그렇게 말해버리면, 당신의 그 포커페이스가 흔들리긴 할까.
“안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태령은 거짓말을 선택했다. 남편이 기억을 못 한다고 확신해서. 설사 기억한다고 해도, 남편도 자신처럼 어젯밤의 기억을 덮길 원할 것 같아서. 가장 현명한 답이고 지금 두 사람의 관계에 가장 적합했다. 덮고 잊고 모른 척하고.
“다행이군요.”
낮고 느리게 흘러나온 그의 음성이 미묘했다. 언뜻 내려온 눈빛이 흔적이 남은 목덜미를 더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며 태령은 싱긋 웃어보였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술을 진탕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당신의 그 편리한 기억력이. 그런데 남편도 피식 웃었다. 왠지 모르게 비소 같은 웃음이었다.
“이럴 땐, 참 잘 웃어.”
태령의 신경을 묘하게 건드리는 대답. 그게 거슬리지만 태령은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변함없이 유지했다. 당신의 미소와 말투가 거슬리는 것처럼, 내 미소도 당신에게 거슬렸으면 해서. 어제처럼 서로에게 동요하고 흔들리는 일은 없었으면 해서. 남은 시간 내내 서로에게 거슬리는 관계였으면 해서. *** 서 회장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눈앞의 손자 부부를 지켜보았다. 그러든 말든, 팔불출 같은 손자 녀석은 아내의 접시에 부지런히도 음식들을 나른다. 민망하고 수줍어하면서도 남편의 호의를 태령도 조용히 받아들였다.
“강준 씨도 좀 먹어요.”
간단히 남편의 음식도 챙기면서. 둘 다 정 아니다 싶으면, 확 이혼시키자는 생각으로 내려온 서 회장이었다. 그런데 손자 부부를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흐뭇하다. 서로에게 감정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보여서. 그런 둘 사이에 간질거리는 봄빛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아서. 특히 제대로 보니 손자며느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복스럽게 음식도 잘 먹고 예쁘고 차분하고 다소곳하고. 꾸민 외향이 화려해서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말투나 행동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내인 혜순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서 씨 집안 남자들의 여자 취향도 유전이 되나 싶을 만큼. 태령은 잘 모르겠지만 손자는 제 아내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족들에게도, 아니 만사에 무심한 녀석이 저렇게 감정을 못 숨기고 안달복달하고 있으니. 웃는 날보다 남몰래 눈물 흘린 날이 많았던 혜순과 며느리가 떠오르자 서 회장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자며느리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오늘 할아버지의 행동, 독단적이었다는 건 아시죠?”
강준의 말에 서 회장이 버럭 했다.
“이놈이 어디서 유세를 부려! 고작 계열사 두 개 굴리는 네 녀석이 바쁘겠냐, 그룹을 통째로 굴리는 이 몸이 더 바쁘겠냐!”
하지만 저승사자처럼 살벌하던 서 회장도 태령에게 향한 순간 부드러워진다.
“안 그러냐, 아가야?”
그때 서 회장의 눈썹이 휘릭 치켜 올라갔다. 목에 두르고 있던 태령의 스카프가 살짝 움직이면서 붉은 흔적이 언뜻 드러난 것이다. 가만. 저것이 혹시. 그 뭐냐. 키, 키스 마크!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겨우 잡아 내리려고 서 회장은 더욱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험험, 근데 아가는 이렇게 잘 먹는데 왜 더 야윈 것 같지?”
“회사 일 때문에 최근에 신경 쓸 일이 많았어요.”
태령의 대답에도 서 회장은 애꿎은 강준을 뜬금없이 노려보았다.
“저 녀석이 괴롭혀서 그런 건 아니고?”
“할아버지!”
“왜 부르냐! 이 헛똑똑 손자놈아!”
서 회장은 답답했다. 자신이야 고지식한 옛날 사람이라 쳐도 손자는 요즘 남자였다. 요즘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간 쓸개도 다 빼준다던데. 저 녀석은 유치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안 봐도 훤하구나. 아가를 아주 날마다 들들 볶았겠구먼.”
“할아버지, 그런 이야기는 우리 둘이 있을 때…….”
눈에 띄게 당황한 강준이 태령을 힐끗 보았다.
“시끄럽다! 아가 봐라, 딱 봐도 우리 혜순인데!”
강준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서 회장은 막무가내 일방통행이었다.
“우리 혜순이는 살림도 못 하게 하면서 금이야 옥이야 아꼈어! 근데 아가는 일까지 하잖느냐!”
태령은 모르지만, 강준은 알아들었다. 먼저 떠난 아내와 분위기가 똑 닮은 태령을 서 회장이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걸.
“아가야. 저 녀석이 네 말 안 들어주거나 괴롭히면 나한테 일러. 내가 아주 혼쭐을 내주마. 난 저 녀석 편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아가 네 편이니.”
서 회장에게 호되게 당한 강준은 체념한 얼굴이지만 태령은 이 상황이 재밌었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 봐야 하는 걸까. 마냥 어렵고 무서웠던 서 회장이 동네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느껴졌다.
“제가 정말 할아버님께 일러도 될까요?”
“그럼, 얼마든지 일러라! 내 오늘처럼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갈 테니!”
태령은 지금껏 조 여사의 딸을 부러워한 적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부러운 게 하나 생겼다. 정 많고 따스한 시어머니, 그리고 친근하고 든든한 시할아버님까지. 이런 시댁이라면 결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만큼. 문득 목이 타서 태령이 물잔을 입에 대는 순간, 서 회장이 조심히 물어왔다.
“그런데 아가야, 증손주는 언제 낳아줄 참이냐?”
“콜록콜록!”
물에 사레 걸린 태령이 기침을 했다.
“할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보다 못한 강준이 한마디 했지만 서 회장은 여전히 마이웨이였다.
“아가야, 증손주만 낳아주면 내 전용기 너 주마. 아니, 저 녀석 주려고 했던 한신 자동차를 줄까?”
대기업 총수 아니랄까 봐, 서 회장은 배포도 참 컸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강준은 아내인 태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차분한 음성이 들려온다.
[네, 강준 씨.]
“지금 방입니까?”
[……그런데요.]
위치를 확인하자 아내의 음성에 미묘한 긴장이 어린다. 도망이라도 칠까 고민하고 있겠지. 그런데 어쩌나.
“태령 씨 방 앞이니 문 좀 열어줄래요?”
대답 대신 옅은 한숨 소리가 넘어왔다.
“벨 눌러줘요?”
[기다리세요.]
전화가 끊기고 곧이어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아내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늦은 밤에 무슨 일이세요?”
늦은 밤은 무슨, 고작 8시인데.
“설마, 여기서 같이 자려고 온 건 아니죠?”
강준의 손에 들린 슈트케이스를 본 아내는 문을 잡고 있던 가는 손가락에 꽉 힘을 준다. 절대 허락 못 하겠다는 것처럼. 하지만 강준도 이유 없이 쳐들어온 게 아니었다.
“30분 안에 할아버지가 들이닥칠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요?”
“신선한 횟감을 혼자 먹기 아깝다고 떠왔답니다. 그래서 태령 씨 방을 말해줬어요.”
식사 내내 허허거리며 웃었지만 서 회장은 의심도 많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특히 경진에게 전화를 받은 이상, 더더욱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 사달이 난 건 모두 제 잘못이었고, 이상한 낌새라도 느끼면 당장 이혼하라고 할 것이다. 강준이 버티면 이노그룹에 연락해서라도 말이다.
“오늘 봤다시피 할아버지가 막무가내인 면이 있습니다. 특히 내 말은 가뿐히 무시하시죠.”
“회는 핑계고, 저희가 진짜 부부처럼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거네요.”
강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태령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잠시 후, 결심을 한 듯 아내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드디어 열린 금단의 문.
“대신 할아버님 가시면 강준 씨도 가야 해요.”
대답을 바라듯 아내가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강준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아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죠, 유태령 씨. 난 오늘 부인과 대화도 좀 나누고, 잠도 자고 갈 생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