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니면, 키스할 테니까.2021.06.06.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지만 타지 않았다. 멀어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강준은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은 돌아보지 않을까. 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아름다운 여배우와 뭘 해도 상관없다는 듯 미련 없이 사라졌다.
“세상에, 당신 아내분 보통 독한 게 아닌 것 같아요.”
분노감에 파르르 떠는 한사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강준은 깨달았다. 그간 좀 잘해줬다고 느슨해진 건 아내가 아닌 자신이었다는 걸. 그러니 잊었겠지. 아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독한 여자인지를. 그런 여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착각한 건 자신의 철저한 오만이었다는 걸.
“이번에도 안 탈 건가요?”
한사라의 말에 강준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한번 아내를 떠올렸다. 무심한 눈빛, 단정한 표정, 나긋나긋한 말투, 흐트러짐 없는 자태. 입으로만 말하지 않았을 뿐 온몸으로 강준에게 메시지를 날리던 아내를. 난 당신에게 흔들린 적도 없고 마음 한 자락 내어준 적도 없다고. 그러니 어린애처럼 유치한 도발은 그만 좀 하라고. 강준의 뇌를 제대로 흔들어놓고선, 아내는 매끄럽고 우아하게 빠져나갔다. 덕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차려지고 자괴감이 밀려왔다. 아내에게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 짓을 또 하고 있는 자신에게. 미치지 않고서야, 또 이런 짓을 하다니. 뒤늦게야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예전처럼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아니, 아니었다. 그저 아내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흔들리고 동요하고 휩쓸린 자신처럼, 아내도 조금은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서. 단정하고 매끄러운 얼굴에 상처가 아닌 질투가 어렸으면 해서. 그걸 보면, 깨끗하게 걷어낸 의심 대신 차오른 혼란을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우리가 어쩌면,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이거 가지고 다시 돌아가라는 건가요?”
한사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와인과 남자를 차례로 번갈아 보았다. 서진그룹의 차남이 그랬다. 서진그룹보다 레벨이 높은 집안의 자제인 이 남자가 자신의 팬이라고. 유부남이라고 해서 김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잘해볼 생각이었다. 그만한 재력에 잘생긴 외모와 깍듯한 매너까지 갖춘 남자는 보기 드무니까. 이혼과 재혼이 흠이 되는 세상도 아니고. 사라가 좋아하는 구하기 힘든 고가의 와인까지 선물로 준비했으면 의미는 뻔한 거 아닌가. 그래서 기껏 따라왔더니 문 앞에 덜렁 세워놓고선 와인 쇼핑백을 건네며 돌아가란다. 그러니 기가 막힐 수밖에.
“사라 씨가 좋아하는 와인을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을 난 지켰습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와인 하나 때문에 날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말을 믿으라구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길 왔는데. 그럼 우리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강준은 처음부터 한사라를 객실 안으로 들일 생각이 없었다.
“가져다주겠다는데 굳이 따라오겠다고 한 건 한사라 씨죠. 유부남인 것도 분명히 밝혔고.”
“당신이 유부남인 거 난 상관 안 해요. 그만큼 당신이 마음에 든다구요. 그러니까…….”
“한사라 씬 나에 대해 뭘 압니까?”
문에 기대선 강준이 차가운 표정으로 한사라에게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알고?”
“그건 당신이 알려주지 않았잖아요! 이름도 나이도! 하다못해 어느 집 아들인지도!”
“알려 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충격에 한사라가 숨을 격하게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저 한사라 씨에게 이 와인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주었고 볼일은 이제 끝난 것 같네요.”
미련 없는 강준의 대답에 사라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당신 아내도 허락했잖아요, 즐거운 밤 보내라고. 근데 도대체 뭐가 문젠데요!”
대한민국 남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한사라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강준에겐 소용없었다.
“그건 내가 허락 못 해요.”
그럴듯한 연기는 하겠지만, 진짜 선을 넘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처음 시작은 부부간의 도리 때문이었다. 쓰레기인 척은 굴어도 진짜 쓰레기가 되진 말자고. 그럼 그 여자와 다를 게 없으니까.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보내는 밤은.”
하지만 지금은 아내 때문이었다. 정말 쓰레기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아서. 아내 이외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아서. 그래서 이 유치한 도발은 오늘부로 끝이다. 그게 강준의 진심이었다.
*** 대상전자와 서진그룹은 한신그룹에 비하면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삼총사가 친해질 수 있었던 건 바로 할아버지들의 각별한 우정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세 식구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 경진과 재우도 참석했지만 강준만이 제주 출장 때문에 오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후 연숙의 부축을 받으며 식당을 나오던 서 회장이 연숙에게 불쑥 물었다.
“태령이한테 2세 계획은 물어봤고?”
손자가 결혼했다고 넌지시 밝혔더니 두 친구가 증손주 소식은 아직이냐고 물어온 것이다.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태령이가 강준이에게 마음 열기가 좀 어렵나 봐요.”
“어려울 게 무어 있어? 전 세계 다 뒤져도 강준이만큼 잘난 남편이 어디 있다고! 배부른 소리 하고는!”
“아버님, 정말 몰라서 이러시는 거예요? 그 잘난 남편들 때문에 어머니랑 제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는데.”
연숙이 곱게 눈을 흘기자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하던 서 회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 마련된 작은 정원에 먼저 가겠다던 경진과 재우가 서 있었다.
“일정까지 무리하게 쳐내고 제주도 내려갔는데. 강준이 녀석, 성공했으려나?”
“어헛, 나를 뭘로 보고. 지금까지 내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실패한 거 봤냐? 관건은 강준이 아내가 질투를 하느냐 안 하느냐지.”
두 사람은 서 회장이 뒤에서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다.
“연예인보다 잘생긴 재벌 3세가 3,800만 원짜리 와인을 선물로 주겠다는데. 한사라가 더 적극적으로 강준이 객실까지 쫓아와서 달려들 거다.”
“그러다 진짜 둘이 눈 맞으면 어쩌지? 한사라 겁나 예쁘긴 한데.”
“너한테야 그러지 강준이한테는 그게 미모겠냐? 난 태령 씨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여자랑 같이 있는 것만 보는 거랑 객실 가는 걸 보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르잖아.” “우리 내기할래? 태령 씨가 질투할지 안 할, 악!”
서 회장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경진의 엉덩이를 냅다 때린 것이다. 화들짝 놀라 돌아선 두 남자가 서 회장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런 고얀 놈들! 친구가 먼저 결혼했으면 잘살게 도와주진 못할망정, 부부 싸움에 부채질을 해?”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서야 두 남자는 서 회장 앞에 풀 죽은 아이처럼 무릎을 꿇었다.
“있는 대로 다 고해!”
온갖 엄살을 부리는 경진 대신 재우가 차분하게 그간의 일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어느새 나온 두 남자의 할아버지들도 철없는 손자들의 편을 차마 들어줄 수 없었다. 재우가 말을 끝맺자 서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아버님, 이래도 손자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남편이라고 하실 건가요?”
새초롬한 연숙의 말에 눈앞이 깜깜해진 서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윤 실장이 손자 부부가 사이좋아 보인다고 했다. 특히 손자 녀석이 더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손자만큼은 자신이나 아들과는 다르게 훌륭한 남편이 되어줄 거라고. 그런데 손자가 왕년의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천천히 눈을 뜬 서 회장은 철없는 손자 친구들의 처분부터 내렸다.
“박 사장, 그리고 장 회장. 남자들은 결혼을 해야 철이 드는 법 아니겠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오던 두 남자는 간절한 눈으로 자신들의 할아버지를 보았다. 하지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영만아.”
서 회장의 부름에 한신의 수석 비서실장이 얼른 달려왔다.
“스케줄 다 취소하고 내일 아침에 당장 제주도 가는 전용기 띄워라.”
손자 부부가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당장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 밤 11시. 강준은 호텔의 유명한 라운지 바를 두고 지하에 자리한 작은 규모의 위스키 바를 찾았다. 머리가 복잡해서일까. 아니면 허전하게 빠진 무엇 때문일까. 잠이 오는 대신 독한 술이 당기는 밤이었다. 가장 독한 위스키를 주문 후 아내에게 배운 대로 세 잔을 원액으로 연달아 마셨다. 확 몰려오는 취기에 숨을 깊게 내쉬자 또다시 아내가 밀려든다.
‘그렇죠, 여보?’
부인이라는 말에도 질색하면서 여보라니. 가슴을 쓸어내리던 대담한 손길은 또 뭐고. 가는 손끝이 전해오는 깃털 같은 자극에도 셔츠 안의 단단한 근육이 요동쳤다. 아내의 앙큼한 도발에, 요망한 손기술에, 속이 뒤집히면서도 몸이 제대로 동했다.
‘그럼 두 분 즐밤 보내요.’
그렇게 제대로 도발해놓고선, 아내는 쿨한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덕분에 아내가 얼마나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지 알았다. 아,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지. 지금 난 이렇게 아내에게 질척이고 있는데. 하늘에 있는 경수가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형은 그 외모 썩히는 거 죄인 거 몰라요? 여자 좀 만나요, 제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는데 어쩌라고.’
‘나의 알리샤라면 형도 홀라당 넘어갈 텐데.’
경수가 했던 말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경수야.”
나도 네 여자에게 빠져버린 것 같아서. 더 이상 복수는 의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강준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망설여졌다. 아내가 동생의 여자였다는 건 불변의 진리. 동생의 여자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쓰레기 짓이니까.
“미치겠네.”
나보고 어쩌라고. 바 위에 수표 한 장을 올려놓은 후 강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 정신을 차리려고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겠다. 알코올에 흠뻑 젖은 몸은 자꾸만 비틀거리고 무릎도 몇 번이나 꺾였다. 벽을 짚고 몇 걸음 걷다가 강준은 우뚝 멈추어 섰다. 이젠 머리를 꽉 채운 것도 모자라 환각까지 보이는 건가. 자신을 어지간히도 괴롭히던 아내가 청초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강준 씨?”
조금 놀란 듯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움직이면 안개처럼 사라질 환영이라고 생각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더 짙어지는 향과 선명해지는 말간 얼굴. 강준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만져보면 알겠지. 천천히 뻗은 손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여린 얼굴선을 훑으며 깨끗한 목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 그러자 환영은 끊어질 것처럼 짧은 숨을 가냘프게 토해낸다.
“.......(…….)”
“.......(…….)”
코끝을 휘감는 향과 손끝의 감각이 생생하다. 남자를 미치게 하는 냄새, 촉감. 그런데도 강준은 환영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동요하는 표정을 품고 있는 눈앞의 여자가 진짜 아내일 리가 없으니까.
“술 많이 마셨어요?”
술이라, 많이 마시긴 했지. 독한 알코올로 머릿속을 깨끗하게 씻어내리고 싶어서. 늘 그랬던 것처럼, 무엇도 담지 않고, 생각 없이 잠들고 싶어서.
“많이……취한 것 같아서.”
떨리는 음성에 희미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이봐, 목소리도 다르잖아. 큭큭, 강준의 목 안에서 깊은 울림처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지금 좀 많이 취했어요.”
차라리 눈앞의 아내가 환영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거리낌 없이 원하는 걸 할 수 있으니. 하지만 환영이 아니라면 꽤 위험한데.
“그래서 미치겠다고.”
절제나 이성 따위,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눈을 감으며 강준은 허리를 숙였다.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 그리고 입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아내의 숨에서 산뜻한 민트 향이 났다. 빌어먹게도 이 여잔 향도 좋은데 숨도 달다. 향도 진하고 풍미도 깊은 싱글몰트 위스키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그냥 미치게 좋아서, 그 생각밖에 안 들어서,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당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코끝이 스치는 순간, 강준은 생각했다. 차라리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뭐 하는 짓이냐고 밀어내줬으면. 동시에 짐승처럼 위험한 나를 이대로 받아들여 줬으면. 이상한 양면성이 머리에서 엉켜 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힘겹게 눈을 뜨자 알코올로 일렁이는 뇌처럼 주변까지 일렁인다. 하다못해 눈앞의 환영조차도. 어지러움에 몸이 살짝 휘청이는 순간, 떨리는 손끝이 허리를 파고들며 조심히 감아왔다. 뿌연 시야로 미치도록 그의 취향임과 동시에 속을 뒤집어놓는 아내가 보였다. 차분한 눈매, 깨끗한 눈동자, 말랑말랑한 눈빛.
“그러니까 환영이면 좀 사라져.”
그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취하게 만든 건 독한 알코올이 아니라 아내라는 걸.
“제발 도망가라고.”
홀리듯 뻗은 손끝으로 아내의 작은 턱을 잡아올리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아니면, 키스할 테니까.”
입술을 내리면서,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내면서, 강준은 얼굴을 내렸다.